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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김연철의 냉전의 추억 > 내용   2008년09월03일 제7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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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팀의 아리랑이 그리워라

1963년 도쿄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해 처음 모였던 남북 체육회담, 그때 이미 ‘태극기’를 포기했는데…

▣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끝났다. 아쉬움이 남는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인 남과 북이 최소한 공동 입장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2000년 시드니, 2004년 아테네에서도 공동 입장을 했는데, 2008년 베이징에선 왜 못했을까? 냉랭한 남북관계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노골적으로 주장되는 분단사관의 영향도 있다. 이 사람들은 단일팀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 입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한반도기를 둘러싼 뉴라이트 세력의 편견도 마찬가지다. 지난 시절 남북 체육회담이 어떻게 진행돼왔는지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 2000년 9월15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열린 올림픽 개막식에서 ‘코리아팀’으로 하나가 된 남과 북의 선수단이 공동 입장을 하고 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한반도기는 오랜 체육회담의 산물

2000년 9월15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올림픽 주경기장. 96번째 입장한 나라는 ‘코리아’였다. 태극기도 아니고 인공기도 아닌 한반도기를 들고 180명의 남북한 선수들이 공동으로 입장했다. 장내에는 <아리랑>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다. 주최 쪽은 장내 아나운서를 통해 “남북한이 하나가 되어 행진한다”고 알렸다. 관중석에는 울림이 일었다. 1명, 2명, 3명, 어느새 11만8천여 명의 관중 모두가 일어났다. 그리고 기립박수를 보냈다. 위대한 행진이었다. 세계의 많은 신문들은 ‘올림픽 정신의 구현’이라고 평했다. 흐뭇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단지 공동 입장이었다. 남쪽 기수였던 농구선수 정은순은 개막식이 끝났을 때 말했다. “한 깃발을 들고 같이 입장했는데, 왜 운동장을 나서면 다른 국기를 달고 갈라져야 하나요?”

이후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과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2004년 아테네올림픽, 2005년 마카오 동아시안 경기,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과 도하 아시안게임 등 모두 8차례 개·폐회식에 남북 동시 입장이 이뤄졌다.

그때 흔들었던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 지도, 즉 한반도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뉴라이트 진영의 주장처럼,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드는 것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말려드는 것일까? 이들은 마치 한반도기를 북한이 만든 것처럼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 한반도기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랜 체육회담의 산물이다.

남북한 최초의 체육회담은 1963년 1월24일 스위스 로잔의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본부에서 열렸다. 1964년 도쿄올림픽 단일팀 구성이 목적이었다.

이 시절 어떤 배경으로 체육회담이 열렸을까? 동·서독 단일팀이 자극이 됐다. 동·서독은 1951년부터 55년까지 200여 차례의 공식·비공식 회담 끝에 마침내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국명은 독일(Germany), 깃발은 검정·빨강·황금색의 3색 바탕에 흰 올림픽 마크, 국가는 베토벤 교향곡 9번 d단조 4악장 <환희의 송가>였다. 물론 당시 동독이나 북한이 단일팀 구성에 적극적으로 나온 데에는 IOC 가입이라는 배경도 작용했다. IOC는 동·서독 단일팀 구성을 전제로 동독의 IOC 가입을 승인했다. 북한 역시 IOC 가입을 위한 방편으로 체육회담을 활용했다.

맨 처음 합의는 올림픽 표식 밑 ‘KOREA’

1963년 첫 번째 남북 체육회담 당시 쟁점은 단일팀의 단기, 단가, 선수 선발 원칙이었다. 단가는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남쪽은 <아리랑>을 제안했다. 이에 비해 북쪽은 전반 25초는 남쪽 애국가, 후반 25초는 북쪽 애국가로 하자고 했다. 북한 역시 ‘국가’를 애국가로 부른다. 하지만 회담 과정에서 북한은 남쪽이 제안한 <아리랑>에 쉽게 합의했다.

문제는 깃발이었다. 남쪽은 애초에 태극기를 제안했다. 북쪽은 두 가지 안을 제시했는데, 1안은 전면에 태극기, 후면에 인공기였고, 2안은 한반도 중심부에 올림픽 표식이었다. 몇 달 뒤 IOC는 올림픽 표식 밑에 영문으로 ‘KOREA’ 표시를 중재안으로 제시했고, 남북한 모두 이에 동의했다. 단일팀의 깃발이나 노래를 정할 때 자신의 국기와 국가로 정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대화는 지속되기 어렵다.


△ 1991년 4월29일 일본 지바의 니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숙적 중국을 꺾고 우승한 ‘코리아 여자탁구팀’ 선수들이 인사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깃발에 대한 합의는 1970년대 후반에도 재확인됐다. 1979년 4월 평양에서 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이었고, 북쪽의 제안으로 그해 2월20일 판문점에서 남북 탁구협회 대표들이 만나 단일팀 구성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단가는 논의할 필요도 없이 <아리랑>으로 결정됐고, 단기에 대해 남쪽은 1963년 당시의 입장, 즉 올림픽 표식 밑에 ‘KOREA’ 표시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단일팀 논의는 진전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단일팀을 구성하기 위한 체육회담이 열렸지만 성과는 없었다. 좀더 진지한 체육회담은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가능해졌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단일팀 구성을 위한 체육회담은 가장 진지하고 밀도 있는 회담이었다.

1989년 3월9일부터 1990년 2월7일까지 9차례의 본회의와 6차례의 실무접촉이 이뤄졌다. 한반도기는 이 논의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단가는 1963년 이래 <아리랑>으로 굳어져 있었다. 문제는 호칭, 단기, 선수 선발 방식이었는데, 단기와 관련해 남쪽은 1차 회담에서 흰색 바탕에 녹색 한반도 지도와 그 아래 영어로 ‘KOREA’를 표기하자고 제안했다. 북쪽은 이에 반해 흰색 바탕에 황토색 한반도 지도와 그 아래에 청색 또는 적색으로 고려의 영어 표기인 ‘KORYO’를 표기하자고 주장했다. 남북 양쪽 모두 흰색 바탕에 한반도 지도를 넣자고 제안한 것이다. 지도의 색깔만 달랐다. 2차 회담에서 남쪽은 북쪽의 1차 제안을 반영해 흰색 바탕에 황토색 한반도 지도를 넣되, 주변을 녹색으로 하자고 수정 제안했다. 북쪽은 2차 회담에서 한반도 지도 색깔을 하늘색으로 하고, 아무런 외래어 표기를 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남북한은 명칭 표기 없이 흰색 바탕에 하늘색 지도를 넣은 한반도기에 합의할 수 있었다. 남쪽은 단일팀의 깃발로 상대방이 받을 수 없는 태극기를 이미 1963년에 포기했다.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한반도기의 형태가 만들어졌고, 하늘색은 상호 조정을 거쳐 결정된 것이다.

아쉽게도 베이징 아시안게임 단일팀은 성사되지 못했다. 선수 선발 문제에 대한 양쪽의 입장을 조정하지 못했고, 남북한의 신뢰 수준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과가 적지 않았다. 당시 합의사항은 최초의 단일팀 구성으로 이어졌다.

1978년과 1991년, 둘 다 동반우승인데…

1991년 4월29일 일본 지바의 니혼 컨벤션센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우승팀의 국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태극기도 인공기도 아닌 한반도기였다. 남과 북의 애국가가 아닌 <아리랑>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남북 최초의 단일팀, 코리아팀이 우승한 것이다. 세계 최강의 중국을 꺾고 말이다. 중국과의 결승전은 그야말로 감동의 한판 승부였다. 3시간40분간의 혈투에서 승리가 확정되자, 남과 북이 아닌 코리아팀 선수들이 얼싸안고 울었다. 두 달여 합숙훈련을 거치면서 그들은 하나가 됐다. 임원과 감독들도 울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린 이들은 또 있다. 관중석의 재일동포들이다. 경기가 시작되면서 민단과 총련은 합동으로 응원단을 조직하고 목이 터져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코리아팀을 응원했다.

시상식에서 한반도기가 올라가고 <아리랑>이 연주될 때, 관중석에서는 눈물의 합창이 울려퍼졌다. 슬픔의 <아리랑>이 아니라, 기쁨의 <아리랑>이었다. 남과 북, 민단과 총련을 하나로 묶는 통합의 <아리랑>이었다. 당시 동포들이 흘린 기쁨의 눈물은 2008년 3월 정대세의 눈물과는 달랐다. 총련 출신으로 북한의 국가대표가 되어 남북 대결의 현장에서 그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의 의미와는 달랐다. 단일팀의 감동은 1991년 6월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도 재연됐다. 8강전에서 코리아팀은 브라질에 1-5로 패배했다. 그러나 크나큰 감동을 남겼다.

두 번의 단일팀, 그것이 전부였다. 남북관계의 영향으로, 혹은 선수 선발의 입장 차이로 단일팀 구성은 쉽지 않았다.


△ 1991년 2월12일 열린 남북 체육회담에서 분단 46년 만에 처음으로 단일팀을 만들기로 합의한 남쪽 장충식 대표(오른쪽)와 북쪽 김형진 대표가 합의문서에 서명한 뒤 밝은 표정으로 손을 맞잡고 있다. (사진/ 한겨레)

그동안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많은 남북 대결이 이뤄졌다. 냉전시대의 대결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197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남북한이 만났다. 전·후반을 뛰었지만 0-0 무승부였다.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래서 공동 우승을 했는데, 시상식에서 다툼이 벌어졌다. 시상대에 먼저 올라간 북쪽 주장 김종민은 남쪽 주장인 김호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김호곤 선수가 겨우 비집고 올라가 자리를 잡았지만 그만 뒤에서 북쪽 골키퍼 김광일이 미는 바람에 시상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시상대에 올라간 김호곤은 김종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으면서 사진 찍자”고 제안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 그들은 웃고 있었다.

탁구는 지금도 화기애애하네

축구시합 전에 개최국 타이는 남북 양쪽에 유종의 미를 거둬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전 벌어졌던 농구장에서의 불상사가 재연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며칠 전 농구 결승 리그에서의 남북 대결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주먹질에 가까운 몸싸움으로 전반전이 끝나자 주최 쪽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30명의 폭동진압 경찰을 경기장에 투입했다. 경기는 제대로 마칠 수 없었다. 후반전 15분을 남기고 남쪽이 51-37로 이기고 있었는데, 북쪽이 심판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면서 그대로 퇴장해버렸다. 냉전시대의 풍경이었다.

정상회담이 이뤄지고 남북관계가 활성화되면서, 남북한 경기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남북 대결이라 하더라도 과거 냉전 시기의 죽기 살기식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야 되겠는가? 탁구처럼 단일팀의 경험이 있는 종목에서는 지금도 만나면 화기애애하다. 앞으로 많은 남북 대결이 이뤄질 것이다. 그라운드에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 남북관계가 어려울수록 스포츠 무대에서의 악수와 격려는 필요하다. 언제쯤 다시 온 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코리아팀을 만날 수 있을까? 세월이 하수상하니, 그때의 감동이 더욱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