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목차 지난호보기 독자마당 기사에대한의견

한겨레21 구독신청 sitemap

e-Book
표지이야기 특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과학 인터뷰 스포츠/건강 사진/만평 칼럼 독자마당
Home > 칼럼 >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 내용   2008년07월16일 제719호
통합검색  검색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우리 민족’ 개념을 고대사에 투영해 ‘통일신라’를 부정하는 남과 북… 당시 정세에서 동족은 누구고 외세는 누구였는가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 한국학

남북한이 분단돼 서로 많이 이질화됐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고대사를 보는 시선에서는 오히려 서로 가까워지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 통일’ 내지 ‘통일신라’와 같은 용어에 대한 입장이 그렇다. 분단 초기에는 지리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북한과, 영남의 경제·정치적 역량을 고려해 신라 계승을 암묵적으로 주장한 남한이 각자 신라 통일의 문제를 자기 쪽에 유리한 방식으로 다르게 설명했다.

1980년대 좌파 민족주의의 영향


△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영정. 백제가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외세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상황에서 김춘추가 당나라와의 동맹에 올인한 것을 비난만 해야 할까. (사진/ 선현의 표준영정)

북한에서는 이미 1956년판 <조선통사>에서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의 정복”이라고 서술했다. 그때만 해도 적어도 정복 이후 신라가 거느린 삼국 인민의 “당나라 침략자를 반대한 투쟁”을 좋게 봐주는 등 신라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대접’을 해주었지만, 1970년대 이후 ‘신라 통치배’들을 보는 시선이 싸늘해졌다. 1991년판 <조선통사>는 “저들의 영토 야욕을 채우려고 외래 침략세력을 끌어들인 신라 봉건 통치배”들을 엄준히 필주(筆誅)하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강성대국 발해의 정통성”을 강조할 뿐이다. “반민족적 신라 통치배”를 비난하는 이 목소리는 물론 남한이 미국이란 외세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북한의 비난과 맞닿아 있지만, 실제로 남한에서도 신라 통일에 대한 시선은 가면 갈수록 부정적인 쪽으로 바뀌어가기만 한다.

1950년대에야 이선근(1905∼83) 같은 관학자들이 “삼국을 통일시킨 화랑정신”과 “김유신 장군의 위업”을 찬양하고 이병도(1896∼1989) 같은 학계 원로도 “고구려 영토 대부분의 상실”을 ‘유감’으로 처리하되 “우리 민족이 대동강 이남에서 단일 정부 밑의 단일 국민이 된 것이 다행”(<한국사 고대편>, 1959)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견해는 특히 좌파 민족주의가 힘을 얻었던 1980년대에 비판을 받아 통념으로서의 위치를 잃었다. 소장파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한국역사연구회의 <한국역사>(1992)는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긴 하되 그 통일의 불완전함과 ‘남북국 시대’라는 그 다음 시대의 성격을 강조했다. 그 뒤를 이어 좌파 민족주의적 경향의 중진 학자인 김영하 교수(성균관대)는 당나라의 한반도 경략에 발맞추어 외세와의 공조로 백제만을 겨우 정복한 신라에는 “통일을 완수할 힘도 의도도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고 ‘통일신라 시대’ 대신에 ‘신라와 발해’ 내지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의 사용을 적극 주장했다(1993).

이 영향으로 한영우 교수(서울대)와 같은 보수적 원로도 ‘통일신라’ 대신 ‘후기 신라’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등(<다시 찾은 우리 역사>, 1997) 남한에서도 통일신라론은 용도폐기의 위기에 빠졌다. 특히 2000년 이후 고구려·발해에 대한 의식을 첨예화시킨 중국과의 ‘역사 전쟁’ 속에서 신라의 “반민족적 외세 끌어들이기”와 “만주 영토의 상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일반화됐다. 즉, 고조선사나 근·현대사에서는 남북한 사이의 공동된 역사 인식 만들기가 아직도 요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김유신·김춘추에 대한 비판과 을지문덕, 연개소문, 대조영 등에 대한 찬양에는 남북한 가릴 것 없이 대다수 한반도 주민들이 의견을 같이할 듯하다.

남북한을 초월한 이와 같은 ‘합의’가 왜 가능하게 됐는가? 여기엔 남북한이 공유하는 종족적 민족주의의 모태라 할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 사학의 시각이 뒷받침됐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김춘추”를 가리켜 “역사의 죄인”이라 단죄하고, “단군 이후로는 우리 민족의 모든 영토를 제대로 통일시킨 사람은 아직 없없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러한 결론을 내린 이유는, 무엇보다 “만주라는 우리의 고토(故土)와 한반도”를 모두 한 나라로 만든 국왕이 단군 왕조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의식 때문이었다(<독사신론>, 1908).

안확 등 신라에 후한 점수를 주려는 민족주의적 사학자도 있었지만, 단재와 같은 유형의 김춘추 비판을 계속 이어나간 학자들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예컨대 한국 민속학의 원조이기도 한 손진태(1900∼50)는 김유신이나 김춘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민족과 연맹하는 것이 민족적으로 최대의 죄악이다. 신라가 그렇게 한 것은 귀족 국가의 비민족적 본질 때문이다”라며 “외세와 손잡은 신라”를 비난했다(<한국민족사개론>, 1948).

당나라와의 동맹이 없었다면…

신라 지배자들의 ‘반민족적 행동’을 통렬히 비판하는 신채호나 손진태의 목소리는, 친일파에 대한 비판으로 현재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친일파에 대한 비판이야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동질화된 한인(韓人)이라는 종족적 집단의 모습을 1500년 전 과거로 투영해 삼국의 싸움을 ‘동족상잔’으로, 그리고 당나라와의 연합을 꾀했던 신라의 행동을 ‘형제에 대한 배신’으로 각각 이해하려는 태도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사실 수나라나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신라를 반민족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전근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근대적인 시각이다. 신라 본위주의적으로 쓰인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삼국유사>와 같은 야사에서도, 주색에 빠지고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던 백제의 의자왕(재위 641~660)을 ‘토벌’한 김춘추가 ‘성인’(聖人)으로, 그리고 그 재위 기간은 ‘성대’(聖代)로 찬양됐다. 사대(事大), 즉 중국 위주의 동아시아적 국제 질서가 당연시됐던 시절에 중국의 도움을 얻어 백제와 고구려를 친 신라는 삼국 중에서 “제일 도덕적인 국가”로 인식됐다. 조선 전기의 <동국통감>(1484)은 삼국 통일로 고통스러운 전쟁을 중단시키고 장기적 평화를 가져다준 신라의 “인심(人心)의 순박함”을 극찬했는가 하면, 조선 후기의 <동사강목>(1778)은 마한의 멸망 이후 삼국시대를 “정통이 없었던 시대”로 보면서도 통일신라만큼은 ‘정통’이라고 평했다. <동사강목>은 수나라 침략을 막은 고구려를 호평하지만, “외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승리”라고 찬양하기보다는 “도덕성이 부족한 단명의 수나라에 본때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전통시대 사학에서는 신라의 승리가 “도덕적 우월성에 의한 천명(天命)”으로 이해되고,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동아시아 전체를 한국사 전개의 기본적 테두리로 설정하는 이상 신라와 수·당나라의 동맹관계는 반민족적 행위라기보다는 일종의 국제연대로 인식됐다.

물론 이런 인식을 오늘날의 (암묵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사대주의라고 몰아붙이기 쉽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잦은 교류로 풍요로워진 신라의 문화가 삼국 간 전쟁의 종식과 함께 660년대 이후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황금기를 맞은 것만큼은 사실이 아닌가?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에 수반되는 빈번한 교류가 없었다면 당나라의 불교를 섭취해 독자적인 교학의 세계를 연 원효나 의상, 원측, 태현 등 7~8세기 신라 고승의 출현이 가능했겠는가? 당나라 병력을 한반도 남부에서 쫓아내느라고 기력이 쇠진된 신라는 과연 당나라와의 치명적 충돌을 빚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고구려 옛 영토의 전부를 경략할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신라에 대한 전통시대 사학의 옹호는 도덕주의적 수사(신라의 순박한 인심의 승리 등)로 치장돼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7세기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 현실적 역학관계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태도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은 기존 사학의 논의는, 20세기 초 ‘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면서 근본부터 흔들렸다. 단재의 민족주의적 논리대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다 똑같이 ‘신성한 부여족’, 즉 ‘우리 한민족의 형제’라면 고구려가 아닌 중국과 손을 잡아 고구려와 백제를 친 신라는 “도둑을 도와 자기 형제를 친 부끄러움을 남긴” 나라가 되는 것이다(<독사신론>). “계속 자강(自强)을 하여” 다행히 나중에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라도 할 수 있었던 신라에 대해선 단재가 약간의 호감을 보이지만, 민족의 힘만을 최고의 가치로 봤던 그에게 핵심적 관심사는 강대국인 고구려였다. 이와 같은 논리는 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상식이 됐다. 오죽하면 민족주의보다 기독교적 사관을 추구했던 젊은 날의 함석헌(1901∼89) 선생까지도 “조선민족 전체의 테두리를 지켜온 우리의 수비병인 고구려의 패망은 우리 역사 전체의 최대 비극”이라 보고 그 패망으로 “만주가 상실되고 반도의 약국이 탄생된 것”을 한탄스럽게 여겼겠는가? 그는 ‘신라의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긴 썼지만 ‘빈약한 통일’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중국 모방이라는 독충에 걸린” 통일신라의 문화를 별로 좋게 보지는 않았다(<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1934).

북한 사학이 신라 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한반도 북반부 국가로서 고구려·발해 계승 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근저에 흐르는 심성은 단재나 함석헌이 표현했던 고구려에 대한 민족주의적 긍지와 신라의 ‘외세 끌어들이기’에 대한 민족주의적 불만이다. 이 민족주의적 심성을 남한 지식 계층의 상당 부분, 특히 1970~80년대식의 좌파 민족주의 이념가들이 공유하고 있기에 신라 통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최근에 남한에서도 거의 헤게모니를 잡은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사에 대한 단재의 기본 관념은 남북한 양쪽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협하는 인식

만약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비판의 목적이 한-미 동맹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면 필자도 그 목적에는 동의한다. “한-미 동맹은 냉전의 산물”이라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훈계한 중국 정부 쪽의 이야기는 외교적 결례일지라도 내용상 틀리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과 본질적으로 달랐던 1500년 전의 상황에 오늘날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중국인들이 보기에야 신라, 고구려, 백제가 서로 풍속이 비슷한 ‘삼한의 후예’였지만(<구당서>), 실제로는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를 동족으로 보지 않았다. 세 나라 지배층 사이에 신화나 제사 체계는 물론 언어라든가 행정 체계 등이 서로 다른데다 누적된 적대감까지 가미돼 동족이 아닌 경쟁세력일 뿐이었다. 5세기 후반부터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서로 가까워졌으나 540~550년대에 이르러 한강 유역과 가야를 둘러싼 갈등이 계기가 되어 다시 적대자가 되고, 554년에 신라와의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재위 523~554)이 전사하자 불구대천의 적이 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642년의 김춘추와 연개소문 사이 교섭의 결렬이 보여주듯이, 신라가 죽령 바깥으로 손을 뻗지 말아야 하고 오늘날 영남 지역만을 차지하는 약소국으로 남아야 한다는 고구려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한강유역을 잃고서는 패망을 면할 수 없다는 신라 지배자들의 인식이 타협의 여지 없이 상충됐다.

적에 둘러싸여 궁지에 몰린 신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기보다는 수나라의 수치스러운 패배를 복수하여 천하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어차피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을 복속시키기로 마음먹은 당나라 태종(재위 626-649)의 대외 정책에 편승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는 ‘만주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영토를 확충시킨 신라 문화의 전례 없는 융성과 고구려의 계통을 이은 발해의 등장이었다. 서로 종족적으로 이질적이고 정치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신라와 발해는 나중에 각각 고려·조선과 금나라 계통으로 이어져 한반도와 요동 문화의 요람이 됐다. 백제 정복으로 그 영토가 확충된 신라가 후대의 한반도 통일국가(고려, 조선)의 태반이 됐다는 의미에서는, 이미 7세기 말에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일통’ ‘통일’ 같은 용어를 계속 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듯하다.

또 한가지, 만주 상실을 전제로 한 통일이 불완전했다고?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에 한반도 남부와 중부에서 그 종족적 틀이 공고화된 ‘조선인’ ‘한인’(韓人)이라는 종족 집단은 만주를 ‘상실’했을 리가 만무하다. 만주를 차지한 일이 애당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훨씬 후대에 형성된 ‘우리 민족’을 고대에 투영해 고구려를 높이고 신라를 낮추고 만주의 상실을 애통하게 여기는 ‘역사 정치’는 학술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남북한 사이의 동질감을 높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김춘추의 민족적 배신’에 대한 비난과 만주 상실 타령은 한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을 부추겨 한-미, 한-일, 북-중 동맹을 대신할 동아시아적 공동 질서의 확립을 정서적인 측면에서 원천 봉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동아시아적 공동체가 출현하지 않으면 과연 우리의 근본적 염원인 남북한의 통일이 가능하겠는가? 민족주의적 배타성을 벗어난 지역적 시각이야말로 남북한 통일을 위한 가장 긴요한 준비가 아닌가 싶다.

참고 문헌

1. ‘통일신라 호칭 문제’ <통일신라의 대외관계와 사상연구>, 백산자료원, 2000, 1∼27쪽
2. ‘신라 삼국통일론은 타당한가’ 김영하, <역사비평> 20호, 1993
3. ‘연개소문과 김춘추’ 노태돈, <한국사 시민강좌> 제5집, 1989, 14∼39쪽
4. <한국사학사의 연구> 한국사연구회 편, 을유문화사, 1985, 67∼1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