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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목록 > 내용   2006년10월11일 제6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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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영조와 맞선 김일경, ‘사초’를 위해 죽은 김일손, 상식을 뒤엎은 신채호…시대를 논리를 뛰어넘어 미래와 대화했던 역사의 선각자들을 만나보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newhis19@hanmail.net

몇 년 전 받은 전화 한 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덕일 선생님이십니까? 저 아계 후손입니다.”

필자는 선조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의 후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분은 자꾸 경종과 영조 임금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학 세대가 아니라 호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아계의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봐 삼가면서 조선 후기에 아계라는 호를 썼던 인물들을 떠올려보았다. 한 명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의 후손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계 후손의 전화를 받다

‘아계(?溪) 김일경(金一鏡·1662~1724).’

조심스럽게 확인해보니 과연 ‘일자 경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필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김일경의 후손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김일경은 조선 후기 그 누구 못지않게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유명한 만큼 금기시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소론 강경파이던 그는 경종 원년(1721) 12월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신축환국(辛丑換局)을 달성한 주역이었다. 그러나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사형됐던 인물이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그는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다. <영조실록>의 사관이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8일)라고 부기할 정도로 영조를 부인했다. 경종에게는 사육신 못지않은 충신이던 그는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부대시처참(不待時處斬)됐다. 연좌된 그의 자식들도 절멸됐다. 게다가 영조 31년 나주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김일경의 아들 중에 혹시 살아남은 자가 있을지 모르니 찾아서 처단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역적 김일경의 종손 가운데 성명을 바꾸고 중이 된 자가 있다”는 정보가 있자 발본색원을 지시할 정도로 김일경의 후손은 영조·노론과는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던 처지였다. 그리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노론이 계속 집권했기 때문에 김일경은 신원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후손 중 한 명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노론은 조선 멸망에 협조한 대가로 일제시대 때도 그 세력을 온존했으며, 특히 역사학계는 노론 유력 가문의 후예로서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에 참가했던 한 사학자가 해방 이후에도 태두의 지위를 누리는 바람에 김일경은 학문적으로도 신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 저서를 보고 비로소 노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는 역사학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암에 걸려 있었던 그분은 2년쯤 뒤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역사의 붓을 잡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이켜보곤 한다.

필자 자신이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질 때문인지 필자는 역사의 음지에 가려진 시대와 인물들에게 더 큰 관심이 갔다. 그러나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는 이유가 판단 대상이다. 아계 김일경처럼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 정당에 맞서 싸우든지, 백호 윤휴(尹?)처럼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맞서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든지, 명재 윤증(尹拯)처럼 증오의 시대에 사랑의 정치를 역설하다가 은둔하든지, 이가환·이승훈처럼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를 지향하다가 사형되든지, 소현세자처럼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가 독살되든지 했어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노론의 나라를 떠난 정약종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쓰는 동안 수없이 내면에서 물어왔던 질문이 있다. 정약전·약종·약용 중에 누구의 인생을 살 것이냐는 질문이다.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에서 양반 윤지충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이 발생하자 정약용과 큰형 정약전은 천주교를 버렸지만 작은형 정약종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정조 사후 노론이 남인들을 천주교도로 몰아 멸절시키고자 설치한 죽음의 국청에서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당당히 꾸짖고 형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노론의 나라를 떠나 하늘로 간 정약종의 인생은 범인이 쉽게 따를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정약용이 소내(苕川) 고향집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붙인 것은 그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노자>(老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여유당은 그가 정조 없는 노론의 세상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길에 오른 그는 세상과 절연하고 훗날 ‘다산학’이라 불리는 학문의 성을 쌓았다. 반면 정약전은 정약용이 ‘선중씨(정약전) 묘지명’에서 “공(정약전)이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냈다”라고 쓴 것처럼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필자가 형제의 처지가 되었다면 정약용처럼 살았을까 아니면 정약전처럼 살았을까? 정약용의 반 정도 학문을 하고, 정약전의 반 정도 어부가 되었을 것이라는 자답이 돌아왔다. 제대로 된 학자도 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어부도 되지 못할 필자의 한계임을 스스로 안다.

역사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종종 역사가를 생각한다. 그중 세 사람 정도가 마음을 흔든다. 한 사람은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다. 사마천은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된 이릉(李陵) 장군을 옹호했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잘 알려진 대로 궁형을 받았다. 그는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치욕 중에 으뜸가는 것은 궁형을 받는 일입니다. 궁형을 받은 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습관은 까마득한 옛날부터입니다. …(저는)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벌금형으로 대신할 만한 재산도 없었고, 친척이나 친구로부터 한마디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토로했다. 그가 궁형의 치욕을 감수하고 살아남은 이유는 개인 사마천의 목숨보다, 사대부 사마천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후세에 <사기>(史記)를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이 두려워 궁형을 택한 것이 아님을 <사기> 본기의 순서는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섬겼던 한나라의 개국시조 고조 본기보다 그와 싸웠던 항우 본기를 앞 순서에 두었다. 임금도 아니었던 항우를 개국시조의 본기보다 앞세운 것은 승자의 자리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않는 그의 시각을 나타낸다. 그리고 자신을 궁형에 처한 무제를 미신이나 좋아하는 용렬한 군주로 그렸다. 역사가의 붓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죽음으로 지킨 ‘조의제문’

연산군 때의 사관 김일손(金馹孫)은 사림 영수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는 이미 죽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다가 화를 입게 된다.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수양대군을 항우에 비유한 ‘조의제문’은 “신하(수양대군)가 임금(단종)을 찬시(簒弑·자리를 빼앗고 죽임)했다”는 기록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일손은 ‘조의제문’에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덧붙였는데, 이것이 유자광 같은 훈구 공신들에게 간파되면서 무오사화가 발생한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를 사화(史禍)라고도 쓰는 이유는 김일손·권경유·권오복 같은 사관들이 사지가 찢겨 죽는 능지처참을 당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청도군에서 지병인 풍병을 치유하다 의금부에 체포된 김일손은 “내가 잡혀가는 것이 사초(史草·실록의 기초기록) 때문이라면 반드시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사초는 사관의 목숨을 걸고 후대에 전해야 할 진실이었다. 김일손 역시 김일경처럼 모든 자손들이 연좌돼 멸절됐다. 김일경의 핏줄은 우여곡절 끝에 보존됐지만 김일손의 핏줄은 폭군 연산의 거듭된 추적으로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자식보다 소중하게 전하고자 했던 ‘조의제문’은 <연산군일기>에 그의 국문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단재 신채호는 식민사관의 틀을 깨고 우리 역사의 무대가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를 가르쳐준 역사가이다. 게다가 그는 역사 기록의 한자 한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제의 실증사학자들 이상으로 입증한 사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에서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던 평양의 ‘한사군 낙랑군’을 최씨의 낙랑국과 구별해 부정한 기록을 보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료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사기>를 쓰기 위해 살아남은 사마천, ‘사초’를 전하기 위해 죽어야 했던 김일손, 상식을 뒤엎었던 신채호! 이 세 역사가의 공통점은 그 시대가 아니라 다음 시대와 대화한 데 있다. 그 시대의 논리를 뛰어넘는 역사 인식이 세 역사가에게는 있었다. 역사의 진정한 몫은 이렇게 다음 시대와 대화하는 것이리라. 과거를 가지고 미래와 대화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질이다. 필자 역시 다음 시대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과거의 역사 인물들을 초대하고 과거의 사건들을 되새겨볼 것이다. 이를 통해 시대와 불화했던, 그래서 그 시대에는 버림받았던 인물들이 미래와 화해할 수 있다면 감히 바랄 수 없는 망외의 소득일 것이다.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이 이번호부터 3주에 한번씩 연재됩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한국사에서 금기가 되었던 부분이나 시대와 불화했던 인물들의 이야기, 일제 식민사관을 걷어내고 한국사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들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현재 사단법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조선선비 살해사건> <사도세자의 고백> <살아있는 한국사> <역사에게 길을 묻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