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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강준만 칼럼 목록 > 내용   2005년08월11일 제5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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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 민주화시대의 명암

왜 간호조무사는 신생아를 학대했을까, 왜 사이버 삐끼들은 횡행하는가
인정욕구가 매우 강한 한국의 네티즌들, 티티테인먼트로 흐를까 염려된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인간이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너무나도 깊고 근원적이어서 인류의 역사 발전에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 옛날에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욕구가 발휘되었지만, 오늘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군사 영역에서 경제 영역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동기는 먹고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경제생활이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을 얻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은 명백해진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체제인바, 오늘날 사실상 모든 선진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 사회의 폭넓은 진화라는 마르크스주의적·헤겔주의적 의미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

국내 언론이 대서특필해준 덕에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을 요약해본 것이다. 후쿠야마는 좀 독특한 유형의 본질주의 함정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들 밥은 먹고 살잖아?” 사람 사는 걸 ‘밥’이라는 본질로 환원해버리면, 그 밥의 값이 천차만별이라는 건 사소해진다. 극심한 빈부 양극화 체제에서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도 그 세계에선 나름대로 ‘인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겠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데 부유층이 추구하는 ‘인정’과의 엄청난 괴리에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인정의 빈부격차’가 다시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정의 빈부격차’는 아직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 아주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에 의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개념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화’로 인해 ‘20 대 80’(부유층 20%, 빈곤층 80%)이 이루어진 세상에선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을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괴성까지 질러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게 괜한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즘 그렇게 말했다간 시대착오적인 인간으로 몰매 맞기 십상이다. 게임은 ‘국민산업’이 아닌가.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인정투쟁’의 민주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아니 언제는 그런 시대에 살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전투적으로 묻는다면, 인류 역사 이래로 그랬다고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하겠지만, 겸손한 자세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 조무사가 신생아를 학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건으로 경찰서에 출두한 어느 간호 조무사는 “싸이월드에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영아들의 인상을 특색 있게 해 주변 다른 간호 조무사 또는 간호 관련 종사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이거 아주 중요한 ‘인정투쟁’이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연예인 누드 사진을 보고 싶으면 내 홈피로 오세요”라는 글을 올려 작은 소동을 빚었던 주인공도 자신의 홈피 방문자 수를 늘려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초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도 인정투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의 ‘성기 노출’ 사건도 그랬지만, 무슨 사건만 터졌다 하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삐끼’들이 나타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놀러 오세요. 보러 오세요. 화끈해요. 죽여준다니까요.” 아니다. 삐끼는 아니다. 삐끼는 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지만, 우리 시대의 사이버 삐끼는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 조회 수를 올리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그러는 것뿐이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거짓말로 유혹하는 삐끼들도 있다지만, 행여 화를 내선 안 될 일이다. 조회 수 올리는 걸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그 소박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몸부림에 감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 달라졌다. 과거 보통 사람들의 인정투쟁은 수단이 미비했다.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이라 할 미디어는 엘리트의 독무대였다. 학생들의 경우 공부를 빼놓곤 기껏해야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뭔가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수단이 없었다. 운동을 잘하거나 주먹을 쓰거나 연애박사가 되는 길로 빠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돈질도 부유층 자제에 국한되었다.

유희주의에서 공동체주의까지

인터넷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인터넷이 ‘규범 테크놀로지’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파급 효과가 인터넷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더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보자면 ① 유희주의 ② 다문화주의 ③ 극단주의 ④ 공동체주의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다.


△ 정부가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을 때 네티즌들의 대다수가 이에 찬성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정치개혁연대 회원들이 인터넷 실명제에 항의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첫째, 유희주의다. ‘유희주의’란 말은 없다고 시비를 걸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유희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찜쪄 먹을 수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좋겠다. 인터넷의 본질은 유희다. 사람에 따라 ‘오락’이라고도 하고 ‘엔터테인먼트’라고도 한다.

‘엔터테인먼트 경제’는 이미 주류로 등극한 지 오래다. 인포테인먼트, 에듀테인먼트, 폴리테인먼트, 도큐테인먼트, 마켓테인먼트, 이터테인먼트, 처치테인먼트, 워크테인먼트, 쇼퍼테인먼트, 볼런테인먼트, 티티테인먼트 등 엔터테인먼트를 물고 들어가는 수많은 합성어들이 양산되는 게 그 위력을 잘 말해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미래연구소 소장 폴 사포는 “디지털 기술은 너무나 흡인력이 강해서 ‘모든 것’을 유희의 도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읽을 수 있듯이, 위대한 문명의 몰락은 모든 것을 유희화한 데서 비롯됐다”고 경고했다.

그대로 믿을 말은 아니지만, 유희 아닌 것들이 이젠 유희와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해졌다. 유희는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으로 등극하면서 전투성을 획득했기에 더욱 그렇다. 예컨대 정치가 무슨 수로 유희와 경쟁할 것인가. 하긴 그래서 정치가 자꾸 유희화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사주간지마저 유희와 타협하지 않고 이렇게 골치 아픈 이야기 하면 문을 닫아야 하는 건가? 생각해볼 점이다.

둘째, 다문화주의다. 최근 인터넷엔 “님의 노예로 부려주시옵소서” “어린 ‘주인님’을 찾습니다” “내 속옷도 팔아요” 등을 외치는 카페가 많아졌나 보다. 가령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발’이란 단어를 치면 발을 탐닉하는 카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한 포털 사이트에는 이런 카페가 600개 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이런 카페를 ‘변태 카페’라고 이름 붙였지만, ‘변태’의 경계 설정은 이제 날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그간 다문화주의는 소수자의 권익 옹호라는 점에서 좋은 의미로만 여겨져왔다. 인터넷 이전엔 당당하게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소수자를 이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소수자’의 폭발을 몰고 왔다. 인터넷 이전엔 뭉치기 어려웠던 소수자들까지 대거 인정투쟁을 위해 독자적인 동아리 또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늘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이젠 일부 진보파도 다문화주의 공격에 합세했다. ‘성향의 소수자’건 ‘취향의 소수자’건 이들의 특성은 자신의 열악한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단일 이슈 정치’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슈 한 가지만을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진보파는 이런 정치 행태가 소수 집단간 ‘연대’를 파괴해 진보 정치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점점 한국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

셋째, 극단주의다. 인터넷은 대중의 전폭적인 참여와 그들의 인정투쟁 욕구로 인해 전반적으로 보아 반지성주의로 흐르게 돼 있다. 지성주의는 좋고 반지성주의는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한겨레> 문화생활부장 이인우는 “반지성주의·반지식인 정서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문화의 특징적 흐름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고 본다”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인터넷을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는데, 이게 중립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쇄술이 지식의 생산과 소유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급속하게 전파되고 공유되고 가공되는 인터넷 문화가 지식과 정보의 평균화, 지성의 평등화가 가능한 것 같은 착각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고 있는 것 같다.”

화끈한 해결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지성주의와 사이버 폭력이라는 극단주의가 상호 무관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정부는 사이버 폭력을 일소하겠다며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는데, 흥미로운 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반대하는 의견보다 최대 4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야후 조사에서는 찬성 79%, 반대 20%로 나타났으며, 20~30대 이용자가 많은 네이버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5%가 실명제 도입에 찬성한 반면 반대 입장은 32%에 그쳤다. 이게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심층 분석해볼 필요가 있겠다.


△ 인터넷 전문가들은 한국 인터넷이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사진은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한국인터넷 게임리그 결선 경기. (사진/ 한겨레 이정우 기자)

넷째, 공동체주의다. 지금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오염된 단어가 되었지만 초기의 ‘해커’를 떠올리면 되겠다. 해커는 원래 ‘인정’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도덕성 수준도 높았다. 남들이 자신의 기술 수준을 인정해주는 기쁨 하나로 돈도 받지 않고 폐인이 될 정도로 자신을 혹사해가며 프로그램 개발에 헌신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다. 누군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할 때에 남들이 얼마나 주목해주느냐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내가 무슨 희생을 하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약해질 것이다. 반면 나의 희생이 영웅적 행위로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애초 마음먹었던 희생의 정도보다 ‘오버’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사이즈’와 ‘주목’의 경계를 깬 열린 공간으로 이타성과 협동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인터넷 강국론’은 정말 허구가 아닐까

이렇듯 인터넷을 주요 무대로 삼은 인정투쟁엔 명암이 있다. 세계 각국의 인터넷을 두루 살펴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국 인터넷 문화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네티즌들의 인정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간 한국은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 충족에 무심한, 아니 억압적인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대중의 인정 욕구 충족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인정 욕구 충족의 방식이 획일적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인정 욕구가 충족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는 인정 욕구 충족에서 일렬 종대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돈,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명품, 골프 등 모두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한 문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위계가 “한국에선 인간답게 살려면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수많은 속설들을 낳았고, 또 이것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조차 자랑스럽게 뻐겨대는 ‘세계 10대 경제강국론’에 흔쾌히 박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

인터넷이라는 축복이 인정 욕구 충족의 다른 출구를 열어준 것은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야 마땅하겠건만, 다문화주의의 일부와 공동체주의를 제외하곤 이것마저도 혹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싶어 주저하게 된다. 인터넷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는 많은 인터넷 기업가·전문가들이 한국 인터넷은 세계에서 가장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른바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그런 주저가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정투쟁 민주화의 내실화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