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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박노자 칼럼 목록 > 내용   2007년09월06일 제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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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학구 선생과의 만남

“인간에게 국경은 없다” 조선인 출신 소련 ‘한국·일본통’ 그의 소설 같은 삶의 메시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글쎄, 소련으로 가고 나서는 나에게 딱 한 가지 자존심 세우는 방법이 남았지. 좀 지식인연한 소련인을 대하게 될 때면 당신 쇼펜하우어를 읽었느냐고 물어보곤 했어. 그러한 반동 사상가 이름을 어디에서 들어본 듯하다는 사람은 많아도 읽었다는 놈은 없었거든. 그 책들이 스탈린 시절에 금서였지. 그런데 난 학교 시절에 일본말로 <의지와 표식(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이미 다 독파했어. 그게 도쿄에서 1912년에 나와 나중에 몇 번 더 일역돼 다시 나왔거든. 식민지 조선에서도 웬만한 도서관에 가면 있었지. 글쎄, 조선 사람으로서 왜정을 싫어하게 돼 있지만 그게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야. 일본말로 나온 세계사상 관련 서적이 아니라면 난 내 생각을 정리할 길이 없었을걸. 하여간 모든 역사 현상들은 양면이 있는 것이지.”


△ 학계에서 화제가 됐던 연구를 계속 발표했으나 제국의 폭력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1990년 모스크바. 류학구 선생(왼쪽)과 그의 스승인 미하일 박(박준호) 모스크바국립대 교수. (사진/ 류수민 제공)

한 사람의 정체성은 얼마나 ‘회색적’인가

1999년, 가을의 어느 날, 서울 강남터미널 근방의 한 아파트에서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보드카를 마시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일제의 징병에 끌려갔다가 결국 소련군에 잡혀 팔자에 없는 ‘전범’ 신세가 되어 반세기 동안 망향의 한을 안게 됐다. 그러면서도 그는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왜정과 일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들어온 ‘근대사상’을 분리해서 생각했으며, 근대 세계와의 접촉을 가능케 한 일본어에 고마워하기도 했다. 식민모국 일본을 흑색으로만 그렸던 ‘공식적 기억’의 세계와, 이 노학자가 이야기했던 ‘개인의 인생’은 너무나 달랐다. 근대사에 대한 ‘민족적 기억’의 장이 비판적 해부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생각은, 나에게 그때부터 강하게 들었다.

한때 소련 지식인들을 쇼펜하우어라는 시금석으로 시험하곤 했던 강남터미널 근방의 아파트 주인은 과연 누구이었던가? 중국이든 소련이든 북한이든 ‘후진적 북방’에 대해 하도 무관심한 한국 사회이기에 그가 대중적 주목을 받지 않았지만 사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소설 이상으로 ‘소설적’이었다. 일개의 ‘일군 전범’이 1970년대 소련에서 한국·일본학의 대가가 됐다는 것으로 보면 ‘인간 승리의 입지전’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 ‘인간에게 국경이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메시지일 것이다. 욕망이 강해지고 지식이 많아질수록 고통이 많아진다는 쇼펜하우어의 화두를 안고 평생 싸움했던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국제성이 낳은 ‘식민지의 지식’으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소련인’과 ‘조선인’의 정체성을 평생 겸비했다. 소련에서 살았을 때 그는 자신의 뿌리를 깊이 의식하는 ‘고려인’이었지만 1990년대 남한에 돌아온 뒤에는 ‘소련인’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근대의 경계선들을 가로질렀던 한 사람의 정체성이 얼마나 ‘회색적’일 수 있는지를, 그를 보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소련 한국학 학계의 ‘신화’가 된 그의 이름은 류학구, 또는 류한배이다. 그는 1925년 경남 진주의 비교적 넉넉한 기독교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우수한 성적으로 진주고보를 졸업했다. 그가 반세기 만에 다시 고향 진주로 돌아갔을 때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건물 하나 발견할 수 없었지만 ‘학맥’만큼은 남아 그에게 도움이 됐다. 그의 학교 후배 중에는 구자경 LG명예회장 등 나중에 남한 사회의 ‘거물’이 된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졸업 이후 일본 유학을 시도해봤지만 자금이 모자라 결국 비용이 비교적 덜 드는 하얼빈으로 가서 만주국립대 산하의 하얼빈 학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다. 제국 시대의 ‘국제성’이라 할까? 그의 동급생 중에는 일본인과 만주인 그리고 소수의 조선인이 있었으며, 교수들 중에는 러시아 한국학의 원조인 블라디보스토크대학의 보드스타윈(1875∼1924) 교수의 딸을 포함한 러시아인들도 끼어 있었다. 그에게 쇼펜하우어의 염세론과 함께 또 하나의 평생 화두가 된 마르크스주의적 사학 이야기도 처음 거기에서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국은 각종 문화들의 ‘섞임’뿐만 아니라 ‘전쟁’을 의미하기도 했다. 광복 닷새 전인 1945년 8월10일, 그가 일본군에 징병됐다. 소련군의 폭격을 맞아도 소련 군인들을 상대로 총을 한 번 쏴보지도 못한 그였지만 일본 군복을 입은 ‘죄’로 그도 전범이 되어 소련군 수용소에 들어갔다. 조선인들은 그냥 집으로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해방군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해방이 돼야 할 식민지 출신의 포로에 대한 ‘정리’ 작업을 계속 늦추기만 했다. 1948년 말이 돼야 신원 조회 등이 다 끝난 류학구는 드디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지만 반도가 이미 두 조각으로 갈리진 상황에서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고향 진주가 아닌 이북뿐이었다. 고향으로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류학구는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귀환을 포기하고 또 하나의 제국, 소련의 경내로 들어가 일본과 한반도를 상대로 방송했던 방송사에서 아나운서를 맡게 됐다.

소련이 그를 귀하게 여긴 이유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나름의 신념과 일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감을 가진 그가 망가진 일본 제국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해 일본인들을 상대로 누구보다 사상교양·선전선동 작업을 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제국과 현재의 제국 사이에서의 생활은 그렇다고 개인적 ‘행복추구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소련 국적을 얻어 소련의 한 중국사 전공자와 결혼해 가정생활을 꾸리는 동시에 모스크바에서 숙원인 한국사 공부를 하게 됐다. 1960년대 모스크바대학에서 전후 소련 한국사 연구의 창시자 미하일 박(박준호) 교수의 제자가 된 그는, 식민지 시절부터 꿈꾸었던 ‘식민사관 극복’에 학자로서의 인생을 바치게 됐다.

1969년 ‘한국 고대사 관련의 일본에서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만주사와 조선사를 하나로 아우른 ‘만선사관’과 ‘한국사의 반도적 성격’ ‘정체성’ ‘모방성’에 대한 식민지 시기 일본학계의 통념들이 언제, 어떤 정치적 의식의 지배하에서 만들어졌는지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1975년 단행본으로 나온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그가 읽었던 일본 책들을 읽을 능력이 되지 않았던 소련 후학에게 필독서가 됐다. 그런데 같은 시기 남북한에서 이루어져던 식민사관 극복 노력을 그가 두루 참고했지만, 그의 책은 이북에서도 이남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북에서는 주체사관이 외국 학자들의 업적 인용을 어렵게 했으며, 남한에서는- 소련과의 적대적 관계를 떠나서도- 영어·일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이들이 많아도 러시아어에 능통한 사학자는 없었다. 류학구 선생이야 제국들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생을 살았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는 한 제국의 패권적 학지(學知)의 장 안에 묶이게 된다.

러시아에서도 ‘창씨개명’ 당하다

조선인 출신의 소련 거물급 ‘한국·일본통’ 류학구는, 어떻게 보면 1970∼80년대를 ‘화려하게’ 살았다. 그는 학계에서 화제가 되곤 했던 신라 골품제 연구, 고구려에서의 부(部) 체제 연구나 일본 마르크스주의적 사학계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관련된 논문을 계속 발표하는 한편, 소련 지도부의 일본 관련 자문과 소련 공산당의 핵심 문서들의 일본어 번역, 그리고 소련 지도자들의 일본어 통역을 맡곤 했다. 그러나 그런 그를 제국의 폭력이 비켜가지 않았다. “러시아인도, 중앙아시아 출신의 ‘정통’ 고려인도 아닌 틈입자가 소련에서 한국 고대사와 일본 사학사의 권위자가 됐다”는 데에 대해 당국에서 불만이 일자 그가 일제 시절에 강요당했던 것처럼 일종의 ‘창씨개명’을 당해 학술 논문들을 러시아식 성인 ‘유리코브’라는 필명으로 내게 되는 일이 있었다. 그의 모친과 친척들이 계속 진주에서 살았지만 일본으로 드나들곤 했던 그는 잠깐이라도 현해탄을 건너 가족들을 만날 권리는 없었다. 딱 한 번 일본 친구들의 도움으로 일본에 체류할 때 진주 본가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거의 40년 가까이 헤어져 살고 있는 모자가 평생 못 만날 각오로 하는 전화 통화가 어떤 것인지 독자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류학구를 기용한 제국은, 동시에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은 그의 가장 본원적이고 자연스러운 욕망을 무자비하게 차단하고 말았다.

그를 잇는 많은 ‘영원한 틈입자’

그런데 그 어떤 제국도 다행히 영원할 수는 없다. 휘청거렸던 1980년대 말 소련이 금전적 대가와 투자 등을 노려 남한과의 수교를 서두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러시아어와 한국어 모두 완벽하게 할 수 있었던 류학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1990년 가을 고르바초프와 노태우의 제주도 정상회담부터 시작해 한-소 간의 거의 모든 중요한 만남에서 양쪽의 ‘소통’을 담당하게 된 류학구는 늦게나마 고국에 알려져 소련(러시아) 국적을 계속 보유하는 동시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됐다. 1991년부터 주로 서울에서 거주한 류학구의 ‘반세기 늦은 귀환’은 행복했던가? 가족, 선후배와의 만남이야 반갑기 짝이 없었겠지만, 남한 사회가 학자로서의 류학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나의 아쉬운 느낌이었다. 류학구 이상으로 러시아를 잘 아는 한국인은 아마도 없겠지만, 남한 사회가 늘 요구하는 국내 내지 구미의 ‘학벌’이 없는 그는 어느 대학의 러시아어·러시아문학과에서도 전임 교원이 된 적이 없었다. 그가 2004년에 숨졌을 때 그의 부고를 낸 몇 안 되는 국내 신문들은 그를 학자가 아닌 ‘한-러 정상회담 통역’으로 명명했다. ‘국내’라는 좁은 우물에서 ‘레디메이드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경계인’ 류학구는 이질적이었다. 그런데 자본이 국경을 계속 흔들고 있는 지금에는, 류학구 선생과 같은 ‘영원한 틈입자’ 생활의 기쁨과 슬픔을 맛볼 사람들이 계속 많아질 추세가 아닌가 싶다.

참고 문헌

1. <소련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나의 모스크바 담판)> 정재문, 오름, 2003(제7장 제3절: ‘자랑스러운 고려인’).
2. <한민족 러시아이민사 연구서설: 한민족공동체 구상과 관련하여> 류한배(류학구), 세종연구소, 1999.
3.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 형성 과정과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류한배(류학구), 세종연구소, 2001.
4. “Проблемы ранней истории Кореи в японской историографии” Рю Хакку, М,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