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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문화&과학 > 라이프 & 트렌드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6월26일 제7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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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꺼내라

‘꽃무늬 남방’은 자리에도 못 낄 정도로 화려한 꽃, 식물, 요정 등 별별 무늬 프린트들이 거리를 정복했네

▣ 심정희 <에스콰이어> 패션 디렉터

올여름 트렌드 리더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뻔뻔해지는 것이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뻔뻔함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뻔뻔함. 부디, ‘사람들이 쳐다보면 어쩌지?’ ‘요란한 옷은 나한텐 안 어울려’ 식의 소심한 생각은 가을이 올 때까지 접어두시길. 바야흐로 지금은 디자이너들이 내놓은 다양한 프린트, 그 대담한 즐거움을 누려야 할 때다.


△ 소심한 당신에게 귀띔하노니, ‘사람들이 나만 보면 어쩌지’하는 생각은 접어두어도 좋다. 거리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로 넘쳐나니까. (사진/ 왼쪽부터 45_PradaDonnaSS08·Prada m S8 118·MMD SS08_036)

‘나만 보면 어쩌지’ 걱정은 접어두시길

누구나 옷장 속에 한두 벌쯤 사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있게 마련이다. 변신을 꾀하기 위해 샀으나 변신을 꾀하기엔 너무 바빠 잊어버린 옷들, 살이 빠질 것을 성급히 예측하고 샀으나 마음처럼 줄지 않는 체중 때문에 한번 몸에 제대로 꿰어보지도 못한 옷들…. 그리고 그 옷들 중에는 어느 기분 좋던 날(혹은 아주 기분이 좋지 않던 날) 들뜬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혹은 지나치게 가라앉은 기분을 달래기 위해) 산 옷들도 한두 벌쯤은 끼어 있게 마련이다. 빨갛고 노란 꽃이 옷 전체를 수놓고 있거나, 얼굴보다 더 큰 나무 잎사귀가 그려져 화려하기 그지없으나, 세상 구경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비운의 옷들…. 그러나 그 가련한 옷들을 이제 꺼낼 때가 된 것 같다. 올여름 유명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이 대담무쌍한 프린트의 옷들로 패션쇼를 채움으로써 어느 때보다 화려한 옷들로 길거리가 채워질 전망이니까. 소심한 당신에게 귀띔하노니, ‘사람들이 나만 보면 어쩌지?’ 식의 염려는 잠시 접어두어도 좋다. 잔잔한 꽃이나 잎사귀가 그려진 당신의 옷- 그럼에도 너무 화려해 그간 당신이 입지 못했던 옷- 은 이제 빌딩숲 한가운데서 만나는 감색 슈트만큼이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할 테니까.

요 며칠 사이, 트렌드에 민감한 여성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나 최신 유행하는 옷들이 걸린 백화점 진열대 곁을 지나가본 이라면 누구나 느꼈겠지만, 올여름엔 시선을 자극하는 프린트들 천지다. 같은 종류의 꽃이 균일하게 프린트된 ‘꽃무늬 남방’쯤은 프린트 축에도 못 낀다. 거리는 지금 커다랗게 사람 얼굴을 그려넣은 블라우스, SF 만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담은 듯한 핸드백, 18세기 영국 어느 귀족의 꽃밭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원피스 등으로 가득하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은 꽃무늬로, 디자이너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꽃무늬를 표현함으로써 세상을 크고 작은 꽃천지로 만들었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Monogram Aquarelle papillon·12A PradaDonnaAccSS08_1·Hysteria·G059 shoes side detail)

‘패션계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벨기에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은 이번에도 서정적인 방식으로 꽃을 표현했다. 언젠가는 1만 송이가 넘는 장미로 패션쇼장을 장식했는가 하면 평소에도 꽃밭에 앉아 사색하기를 즐긴다는 그는 한 벌의 옷을 하나의 꽃밭으로 만들기로 작정한 듯 100여 종의 꽃을 선택한 다음, 그중에서 함께 어우러질 만한 것들만 다시 4∼5종씩 선별해 하나의 아이템에 프린트했다. 그런가 하면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고전미와 퓨처리즘이 결합한 듯한 색다른 꽃무늬를 내놓았다. 그는 15세기 베니스를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분위기의 커다란 꽃무늬를 광택 나는 소재에 입체감 있게 프린트함으로써 ‘현대 여성을 위한 갑옷’을 연상시키는 볼륨감 있는 미니 드레스에 더 독특한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섹시하고 기발한 의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정평이 난 이탈리아의 디자인 듀오 돌체&가바나는 꽃무늬를 옷감에 프린트하는 대신, 현대미술 작가의 손에 붓을 쥐어준 다음 직접 꽃무늬를 그려넣게 했다. 실존하는 화가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드레스를 수련이 그려진 모네의 그림 못지않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시킨 것.

꿈속에서 본 환상 그대로

올여름 ‘별별 프린트 레이스’에서 꽃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제2주자는 트라이벌 프린트다(‘트라이벌 프린트’란 본디 원시 부족을 연상시키는 에스닉한 프린트를 뜻하는 말이지만 폭넓게 보자면 지질이나 화석, 나뭇잎 등 사람의 손이 닿기 전의 원시 환경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프린트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서정적이거나 예술적이거나 테크닉하거나 디자이너의 개성과 의도에 따라 다양한 느낌으로 표현된 꽃무늬와 달리 트라이벌 프린트는 크게 두 가지 느낌으로 분류된다. 세렝게티 초원의 뜨거운 태양과 생명력 넘치는 식물들을 연상시키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원시적인 트라이벌 프린트와 일명 ‘테크니컬러’라 불리는 색상들과 결합해 탄생한 미래 지향적인 분위기의 트라이벌 프린트. 지중해 연안 건물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타일 모티브를 드레스에 새겨넣은 베르사체나 화석의 단면을 수채화로 표현한 듯한 프린트를 선보인 에트로 등이 가장 대표적인 트라이벌 프린트라 할 수 있겠다.

스타는 언제, 어디서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패션계의 스타들 또한 예외는 아니다. 패션계의 두 빅 스타, 마크 제이콥스와 미우치아 프라다가 별별 프린트 시대에 대응하는 방식만 해도 그렇다.


△ (왼쪽부터 Dries Van Noten S8009·Emilio pucci S8 011)

먼저 미우치아 프라다. 프라다는 꽃이 가득한 서정적인 꽃밭이나 첼시의 갤러리로 프린트를 찾아 떠나는 대신 자신의 꿈속으로 침잠했다. 그는 “현대 여성에게는 환상이 필요하다”고 부르짖으며 현대 여성이 꿈꾸는 환상의 세계(독특한 분위기의 꽃과 식물이 만발하고, 요정이 꽃봉오리 속에서 잠들어 있으며, 프라다 핸드백이 날아다니는)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결과 그는 미래적이면서도 고전적이고, SF적인가 하면 에스닉하기도 한 독특한 분위기의 꽃과 식물, 요정 등을 옷과 신발, 핸드백 등에 골고루 프린트해 세상 어떤 프린트와도 다른 새로운 프린트를 만들어냈다.

그런가 하면 예술과 패션이 돈독한 우정을 쌓는 데 가장 큰 힘을 보태는 조력자이자 방대한 컬렉션을 소유한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한 루이뷔통의 마크 제이콥스는 이번엔 리처드 프린스와 손을 잡았다. 그는 리처드 프린스의 코믹 작품들을 옷의 프린트로 활용했는데, 리처드 프린스를 향한 애정을 제대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은 듯 프린스의 대표작인 <간호사> 시리즈의 등장 인물로 분한 모델들로 쇼를 시작하기도 했다.

화려한 프린트는 남성복에서도 동시에 나타난다. 여성용 프린트들만큼 빨갛고 노랗고 파랗진 않지만 꽃이나 식물 줄기 등 보태니컬 프린트부터 미래적인 분위기의 지오메트릭 패턴에 이르기까지 솔리드 컬러보다 프린트가 강세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남성복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 시즌, ‘프린트 멋쟁이’로 변신하기로 마음먹은 남자라면 D&G나 프라다, 드리스 반 노튼, 돌체&가바나 등에서 갖가지 프린트들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백화점 ‘신상’을 확인하기 전에

그러나 이번 시즌 프린트 열풍에서 가장 고무적인 것은 다양한 프린트가 유행한다는 점이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당신에게 꽃이면 꽃, 나뭇잎이면 나뭇잎 한 가지 프린트만을 입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건 바꿔 말하면, 화려하기만 하다면 어떤 프린트를 선택해도 무관하다는 말이며, 프린트의 유행에 발맞추기 위해 새로운 옷을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백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기기에 앞서 옷장 문을 열 것. 당신의 옷장 속에도 분명 당신이 사놓고 잊고 있었던 화려한 프린트의 옷들이 한두 벌쯤은 존재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