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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기자가 뛰어든 세상 등록 2004.12.30(목) 제541호


[기자가뛰어든세상] [김보협·김진수] 등대를 닮고 싶었노라

최서남단 소흑산도 4박5일 등대관리원 체험… 속도와 효율을 초월한 100살의 바다 지기에게 배우다

▣ 소흑산도=글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꼭 한번 들어가보고 싶었다. 뭍과 물이 만나는 곳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등대. 늘 궁금했지만 등대 문은 항상 굳게 닫혀 있었다. 등대지기를 한번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그저 노래 속에만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기자가 뛰어든 세상’ 아이디어로 등대를 내놓았을 때 “다 무인등대로 바뀌어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실제 있었다.

‘바다 콜택시’ 타고 섬 속의 섬으로

등대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빛, 희망, 좌표 등 추상적인 단어들을 쫓아가다 보면 쉽게 등대로 구체화되어 간간이 아이템에 올랐다. 하지만 등대를 향한 먼 여정을 떠나기 직전까지 괜히 덤벼들었나 하는 부담을 떨치기 힘들었다. 등대는 무겁게 다가왔다.

고백하건대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가기까지 등대에 관한 기초적인 사실도 몰랐다. 일단 어디든 섭외를 해야 할 텐데 어디에 전화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해양수산부 산하에 부산·인천·목포·포항·제주 등 11개 지방해양청이 있고, 해양청 소속인 규모 큰 49개의 유인등대(무인등대는 519개)가 공식적으로 ‘항로표지관리소’라는 명칭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항로표지관리소 안에 직원들이 생활할 수 있는 관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몰라 등대 건물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줄 알았다.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 불빛이 있는 공간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새울 각오를 하고 갔다. 관리소 직원들이 ‘등대지기’라는 호칭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있는 소흑산도 항로표지관리소(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에서 4박5일을 머문 뒤에 알 수 있었다.

이왕이면 멀리, 가기 힘든 곳을 가기로 했다. 그래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긍지와 보람뿐만 아니라 애환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등대에 머문 시간보다 서울에서 소흑산도까지 오고 가는 데 걸린 이틀이 힘겨웠다.

12월13일 오후 서울 용산역에서 목포행 열차를 탔다. 겨울철에는 짝수날 아침 8시에 배가 출발하기 때문에 목포에서 1박을 해야 했다. 목포에서 소흑산도까지는 4시간. 다물도, 대흑산도, 상태도, 하태도를 거쳐 소흑산도 선착장에 도착하니 박수현(56) 소장이 마중나와 있었다. 등대가 있는 곳까지는 산을 넘어가면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낚싯배를 빌려 해안선을 따라가니 3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관리소 직원들이 한달에 한번씩 휴가를 내어 가족들이 있는 목포로 오갈 때 이용하는 경로다. 박 소장은 “등대가 대부분 바다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있다 보니 민가와 떨어지는 곳에 있다”며 “우리도 목포 갈 때는 산을 넘어다니기도 하지만 한달 식량을 싸가지고 들어올 때는 배를 빌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낚시객들이 많을 때는 가는 길에 내려주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등대만을 오갈 때는 뱃삯을 따로 치러야 한다고 했다. 섬 속의 섬으로 ‘바다의 콜택시’를 타고 들어가는 셈이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았다. 등대 바깥 세상과 이어지는 유일한 끈은 유선전화 1대 뿐이었다.

등명기와 무신호기 앞에서

절벽 언덕 위로 등대가 보이는가 싶더니 배가 자그마한 접안시설에 가 닿았다. 박 소장은 물가로 가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이놈들이 서울에서 손님들 온 걸 아네요.” 숭어였다. 살아서 펄떡거렸다. 마중 나가기 전에 잡았다고 했다. 배낭 속의 삼겹살 몇근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관리소 직원들의 식량을 축낼 수는 없어서 전날 밤 쌀·라면·김치 등과 함께 장을 봐둔 것이었다.

짐을 풀고 나니 그 숭어들은 회덮밥이 되어 나왔다. 오는 길은 고생스러웠지만 ‘낙도(落島)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삼면이 트여 바다가 보였고 뒤에는 커다란 산이 있었다. 공기가 맑고 풍광이 좋았다. 갈대밭과 대죽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닷가에 닿을 수 있었다. 휴양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따라 햇살까지 좋아 봄날 같았다.

관리소를 둘러보는 데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실 절반만 한 사무실에는 책상 3개와 각종 기계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사무실 벽면 현황판의 연혁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1907.12 조선총독부 체신국 흑산도 등대, 1945.12 미군정청 운수부 해사국, 1955.12 목포지방해무청….’ 곧 100살이 되는 등대 나이에 우선 놀랐다. 짤막한 연혁 속에 아픈 근현대사가 녹아 있어 서늘해졌다.

사무실 옆 기계실에는 전기 공급이 중단될 경우에 가동되는 발전기가 있었고, 발전기가 고장나거나 기름이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충전된 축전기가 있었다. 태풍으로 전기 공급이 끊기더라도 등댓불은 밝혀야 하기 때문에 2차, 3차 대비책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이다.

등탑은 2~3층 높이 크기로 생각보다 초라하고 작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철제 사다리가 있었고 올라서니 2층엔 빛을 발하는 등명기가 유리로 만든 커다란 도자기마냥 둥근 원판 위에 놓여 있었다. 등명기 안 전구의 겉모습은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과 비슷했는데 밝기는 수십배에 달하는 700W짜리였다. 등탑 내부엔 등명기를 제어하는 기계가 들어차 있었다. 2002년 새 등명기로 교체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침저녁으로 등댓불을 켜는 게 중요한 업무였는데 이제는 알아서 켜지고 알아서 꺼졌다.

밀려오는 쓸쓸함 “3~5년이 고비에요"

등탑 옆 건물엔 무(霧)신호기가 있었다. 빛이 안개를 뚫지 못할 때 항해하는 배들은 소리로 방향을 잡는다고 했다. 등명기는 15초에 한번씩 깜빡이는 것으로, 무신호기는 55초 쉬었다가 5초 소리내는 것으로 이곳이 소흑산도 항로표지관리소임을 알린다. 등탑 바깥쪽엔 반경 100해리(약 185km) 이내에서 인식이 가능한 위성항법 정보시스템의 안테나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었다.

등대에는 올 10월에 부임한 박 소장을 포함해 모두 3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박인식(42)·김용복(35)씨다. 소장을 빼고는 모두 “주사”로 통했다. 3명이 24시간을 쪼개 8시간씩 당직을 섰다. 그런데 그 당직이 일반적인 당직 개념과는 달라 보였다. 당직 시간엔 사무실이나 등탑 등 어느 위치에서 뭔가 업무를 계속해야 할 것 같은데 꼭 그런 건 아니었다. 매일 아침 9시 조회에서 그날 일을 점검한다. 일이 있을 땐 다 같이 모여서 작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엔 사무실에 있건 관사에 있건 등대가 제구실을 하고 있는 한 당직자는 ‘업무 중’이다. 밤에 잠을 자더라도 ‘대기 상태’이다. 항상 시간에 쫓겨 생활하던 기자의 눈엔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당직과 비당직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은, 거꾸로 뒤집으면 출퇴근이 따로 없어 24시간 근무 체제라는 얘기도 가능했다.

“사실 예전에 비하면 힘든 일이 많이 없어졌지요. 80년대 중반 관사에 기름보일러를 놓기 전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다 비축해놓는 일도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해안가 유류창고에서 지게로 기름을 져나르기도 했고요. 지금은 내일 당장 철수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게 자동화돼 있습니다.” 박 소장의 말이다. 뭔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유지하는 일이 주업무이다 보니 시간을 다투는 일은 없다. 등대의 여러 시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관리하고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것, 그리고 기상청의 위탁업무인 기상·해양 관측이 주요 업무였다.

오후 5시40분께 어스름해지자 등대에 불이 들어왔다. 빛은 사면으로 뻗어나갔다. 1분에 한 바퀴씩 회전하니 한 자리에서 보면 15초에 한번씩 깜빡이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등대들은 10초에 한번, 8초에 한번 깜빡이는 것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알린다고 했다. 금방 어둑해지더니 멀리 고깃배들도 하나둘씩 불을 켜기 시작했다.

밤엔 홍도가 고향이라는 박 주사네 집에서 ‘환영 만찬’이 열렸다. 숭어가 이번엔 회와 튀김으로 소주 댓병(1.8ℓ)짜리와 함께 상에 올랐다. 1급 요리사 못지않은 맛과 멋을 냈다. 한병을 비워갈 즈음 “이 일은 3년에서 5년이 고비”라며 속깊은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고된 일은 없지만 외롭고 쓸쓸한 게 가장 견디기 힘들죠. 육지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기도 해요. 해질 때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고독병이 생겨요. 가족이 같이 생활할 수 있도록 각각 독립된 집이 있지만 아이들이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 ‘기러기 아빠’가 되는 거죠.” 관리소 직원들은 자기를 잘 관리하는 것,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겹다고 말했다.

한 울타리 남자 셋의 바다 생활

아프게 되면 고립이 가져오는 파장은 더 컸다. 비상약이 갖춰져 있다고는 하지만, 식중독처럼 빨리 손을 쓰면 덜 아플 수 있는 병을 견뎌야 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고 했다. 큰 사고라면 몇만원을 써서라도 보건소가 있는 큰 마을로 가거나 해경을 통해 119 헬기를 부를 수도 있지만 그 정도가 아닌 경우엔 몸이 스스로 치료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특이한 점은, 외로운 곳에서 남자 셋이 한 울타리 안에서 사는 만큼 같이 모여 식사를 할 것 같은데 ‘개인 급식’이 원칙이었다. 밥때가 되면 각자의 집에서 혼자 먹고 뒷정리를 하고 볼일을 본다고 했다. “휴가 때 각자 먹을 것을 챙겨오고 입맛도 다르니까….” 부하직원에게 요리나 설거지 등 일이 몰리고 윗사람도 마냥 편치만은 않기 때문에 생긴 ‘관습법’ 같았다.

무미건조한 생활에 활력을 주는 요소는 휴가와 취미생활이다. 뭍에 오가는 과정이 쉽지 않아 분기별 휴일을 세달로 나눠 한달에 1주일가량씩을 몰아쓴다. 오는 1~3월의 경우 모두 17일. 5·5·7일을 쉬고 휴가가 겹치지 않도록 상·중·하순으로 각자의 일정을 조절했다. 취미는 낚시가 주를 이뤘다. 이들에게 바다는 일터이면서 쉼터이자 놀이터 구실도 했다. 낚시는 놀이이면서 조금 과장하면 생존수단이었다. 고기가 잡히는 날엔 식탁이 푸짐해졌다. 예전엔 “먹을 만큼만 잡았지만” 고기가 줄어들면서 “잡힐 때까지 잡는다”고 했다. 고기가 물지 않는 날에도 바다는 뿔소라나 톳 같은 반찬을 제공했다.

등대 생활 사흘째인 12월16일은 취재를 마치고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전날 밤부터 창문이 덜컥거릴 정도로 바람이 불더니 새벽녘에 풍랑주의보가 내려 목포에서 배가 뜨지 못했다. 발이 묶였다. 배는 18일에 들어온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못 나간다고 하니 답답했다. 겨울철엔 하루에도 기상이 몇번씩 바뀐다고 했다. 오후에 바람과 파도가 잦아들더라도 한번 뜨지 않은 배가 올 리 없었다. ‘뭘 해야 하지?’ 생각지도 않게 주어진 48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오전엔 책을 뒤적거리다 오후엔 박 소장을 따라 걸레를 들고 등탑에 올라갔다. 해무 때문에 2~3일에 한번씩은 닦아줘야 빛이 멀리 나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밥값을 한 것 같았다. 이틀 동안 밤마다 등대 빛을 담기 위해 고생했던 김진수 기자는 “더 좋은 그림을 잡아야겠다”며 뒷산 언덕배기로 올라갔다. 따라나섰다. 낮에는 구름이 짙더니 밤엔 별이 쏟아질 것 같았다. 바다에는 다른 색의 별들이 떴다.

GPS가 좇지 못하는 등대의 가치

18일엔 다행히 배가 떴다. 나흘 밤낮을 같이 먹고 자고 하다 보니 관리소 직원들이 가족처럼 느껴졌다. 이미 민폐를 끼칠 만큼 끼쳐 미안해서라도 얼른 떠나야 했다. 선착장으로 가는 배에 올라 등대를 뒤돌아보니 첫날 올 때 보던 등대와 달라 보였다. 등대는 낮에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밤에는 빛으로, 안개 낀 날에는 소리로 바닷길의 안내자가 된다. 위성항법장치(GPS) 같은 첨단 과학기술 덕분에 등대 같은 아날로그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뱃사람들은 여전히 눈으로 등대를 확인하고 나서야 맘이 놓인다고 했다. GPS에 의존해 운전하더라도 도로표지판이 없으면 난감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속도나 효율과는 거리가 먼 등대를 떠나오면서 그곳 사람들이 등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류한 배 구한 일 뿌듯"

인터뷰/ 박수현 소흑산도 항로표지관리소장

2005년이면 등대 생활 20년째를 맞는 박수현(56) 소장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은 등대 생활 덕분”이라고 말했다. 박 소장은 목포 부둣가에서 화려한 청춘을 보내고 그릇에 그림을 그려넣는 전사업종에 근무하다가 1986년 지인의 소개로 등대 근무를 시작했다.

-육지 생활을 오래 한 만큼 처음 적응하는 데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목포해양청 관내 항로표지관리소 직원 30여명 중 60~70%는 섬 출신이다. 아무래도 섬을 아는 사람이 잘 견딘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석유를 많이 쓰는 도자기업이 어려워졌고, 이 회사가 망하면 저 회사로 옮겨다니길 여러 번 했다. 화공약품이 많은 곳이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 술을 많이 먹다 보니 어느 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술을 먹어야 진정이 되고…. 이러다 죽겠다 싶어 전직을 결심했고 등대 생활을 시작했다.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

=아무래도 외로운 게 견디기 힘들다. 뭍에서 떨어져 살다 보니 뜻하지 않은 일이 많이 생긴다. 2년에 한번씩, 가까운 곳과 먼 곳을 번갈아가며 근무하는데, 1997년 진도에서 배로 40분 정도 걸리는 하저도에서 부친상을 당했다. 그런데 풍랑주의보가 내려 배가 뜨지 않았다. 억지로 배를 빌려 타고 나갔다. 딸 셋, 아들 하나를 키우는데 아들놈이 고3이 된다.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다.

-보람을 느낄 때도 많을 것 같다.

=자부심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다. 1997년 어령도에 있을 때 일이다. 진도에서 김 양식을 하던 조그만 배가 돌풍을 만나 10여 마일 떨어진 그곳까지 표류해왔다. 겨울 한밤중이었는데 등대 불빛을 보고 길도 없는 곳을 기어올라와 “살려달라”고 했다. 한달 뒤 면장과 마을 사람들이 고맙다고 인사를 온 적이 있다. 뿌듯했다.

-젊은 후배들한테 조언을 한다면.

=직장이 특이하다 보니 인간관계가 좁아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이 일 그만두면 나중에 만날 사람이 없다. 학교·고향 친구, 특히 친척들하고 계도 하고 자주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난 매달 중순께 휴가를 쓴다. 그때 여러 모임이 몰려 있다. 휴가 가서도 집에 있는 시간이 적어 가족에게 미안하지만 나도 내 생활을 즐겨야 하지 않겠나.



‘등대지기’ 싫어요

항로표지관리소 직원들은 등대지기 노래도, 등대지기라는 말도 싫어한다. 1988년 등대가 ‘항로표지관리소’라는 공식 명칭으로 바뀐 만큼 관리소 직원으로 불리길 원했다.

등대라는 말이 워낙 굳어진 만큼 굳이 쓴다면 ‘등대원, 등대 지킴이’ 정도는 몰라도 등대지기는 낮춤말로 여긴다. ‘지기’의 사전적 의미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돼 있어 높고 낮음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지기가 붙는 다른 말들, 예를 들면 산지기·묘지기·문지기 등과 견줘보면 국가공무원의 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실제 중년의 관리소 직원들은 자녀들 때문에 맘고생을 한두번씩 했다. 뱃길을 열어주는 항로표지가 뭔지, 아버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설명할 여유도 없이 아이들이 “니네 아빠 등대지기라며?” 같은 말을 듣고 상처를 받는다. 1988년 항로표지관리소라는 낯선 이름을 얻게 된 데는 등대 가족들의 민원도 한몫했다. 박 소장은 “덕분에 대장(등대장)에서 소장으로 강등됐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이름을 바꾼 지 16년이나 됐는데 월급명세서에 ‘소흑산도 등대’로 찍는 사람들은 뭐여?”라고 말했다.

등탑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등대는 여전히 관리소의 주요 기능이기는 하지만 이젠 부분이 됐다. 예전엔 광파표지(빛)·음파표지(소리)가 중심이었다면 서서히 전파표지로 옮아가고 있다. 전파표지는 전파의 직진성·등속성·반사성 등을 이용해 송신국에서 발사하는 전파를 선박에 설치한 수신기로 위치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것이 위성항법정보시스템(DGPS·Differential Global Positioning System)이다. 24개의 위성이 오차범위 1m 이내로 정확한 위치 정보를 제공해준다. 소흑산도를 포함해 11곳 관리소에 관련 시설이 설치돼 있다. 선박은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고, 대전에 있는 중앙사무소에는 선박의 운행 정보가 취합된다.

소흑산도 관리소에서 만난 김용복 주사는 “등대도 과학기술과 만나 디지털화하고 있다”며 “새해엔 무선설비와 관련된 자격증을 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제의 욕심, 팔미도 등대

인류 최초의 등대는 기원전 280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 입구에 세워진 파로스 등대다. 대리석 성벽 140m에 60m 높이의 탑을 쌓았고, 그 꼭대기에 화대가 있어 야자수로 불을 지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지만 14세기에 지진으로 사라졌다. 라틴어 ‘pharus’는 이후 등대를 뜻하는 단어(영어 pharos, 불어 phare)가 됐다.

우리나라도 고대에는 횃불을 이용해 항로를 밝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근대식 등대는 1903년 6월1일 처음 불을 밝힌 인천항 입구의 팔미도 등대다. 우리의 자체적인 요구보다는 수탈과 침략을 위한 일본의 욕심 때문이었다. 1900년대 초 서남해안쪽 등대가 집중적으로 건설됐는데, 동해안보다 섬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하다는 점도 작용했지만 곡창지대 수탈과 중국 침략의 전초기지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최근에 세워진 유인등대는 독도 등대(1998년 12월19일)다.

1869년 근대식 등대를 세우기 시작한 일본에서는 어민들이 등대 건설을 막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등대가 세워져 바다를 밝히게 되면 어족의 씨가 말라 어민들이 큰 피해를 본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점등 이후 다음해에 고기가 많이 잡히면서 어민들의 의심이 풀리기 시작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해양수산부가 2003년 발간한 <대한민국 등대 100년사>는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게 될 때는 여러 가지 반발이 있다. 특히 자발적인 의지를 통해 등대를 도입하기보단 서양 열강이나 일본의 한국 진출을 염두에 둔 등대의 건설은 반발의 정도가 더 컸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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