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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한홍구 칼럼 목록 > 칼럼내용   2006년06월22일 제6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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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인간개조

총살형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시작된 신영복 교수의 20년 감옥생활… 밑바닥 인생과 몸을 부대끼며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뜬 ‘대학 시절’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사형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죽여버리겠다는 법적 결정이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의연해질 수 있을까? 뒤에 민청학련 사건 당시 서울상대생이던 김병곤이 사형을 선고받고 “영광입니다”라고 되받아 전설을 남겼지만, 그 받아침은 진짜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도 선고의 순간에 최대한 의연한 척하려 했지만, 눈은 판결문을 읽는 판사의 입으로 가더란다.


△ 6월8일 고별 강의를 하는 신영복 교수. 그는 교도소에서 보낸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종종 표현한다.(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무기징역이라 하려면 입이 삐죽 앞으로 나오고, 사형이라 말하려면 입이 옆으로 찢어지는데, 그 짧은 순간에 입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오길 간절히 바라게 되더라는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잊혀지지 않는 명대사 “나 떨고 있니?”처럼, 아무리 사상범이라 한들 죽음 앞에선 떨리기 마련이 아닐까? 20대의 청년 신영복은 1심과 2심인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각각 구형과 선고, 그리고 군법회의의 형 확정 절차인 관할관 확인을 거치며 모두 여섯 번이나 자신의 이름에 사형이라는 무거운 꼬리표가 붙는 것을 들어야 했다.

국민학생 친구들을 위해 글을 쓰다

처음에는 사형이 근거 없다고 생각했지만, 곧 ‘아, 이 정권은 충분히 사형을 집행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심각하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실제로 그가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에 갇혀 있는 1년 반 동안 일상을 같이 보내던 여섯 명이 차례로 사형 집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들의 죄목은 대개 상관 살인인데, 신영복은 1960년대의 억압적인 병영문화가 낳은 가슴 시린 비극을 연속적으로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사형이 확정되는 순간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너무 짧은 삶으로 끝나고 만다는 애석함과 쓸쓸함이 밀려왔다. 당시의 젊은 언어로는 죽음은 삶의 완성이기에 논리적으로 사형이 삶의 단절로 귀결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당시 혁명적 의식에 투철했던 청년들의 낭만적인 정서는 척박한 식민지 땅에 태어나 군사정권에 항거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식민지 청년들 앞에 놓인 삶의 당연한 한 형태라고 합리화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접견을 마치고 돌아가는 노부모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신영복은 자신의 죽음이 자신에게야 삶의 완성일 수 있지만, 부모님께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상실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죽음이란 것도 결코 한 개인의 죽음일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이 들까? 신영복은 지금 생각하면 의외지만, 혹시 돈 빌리고 안 갚은 것은 없는지, 약속해놓고 지키지 못한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아직 사형수였던 시절에 쓴 글에 ‘청구회 추억’이란 것이 있다. 감옥에서 휴지에 적어서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헌병의 도움으로 집으로 전해진 이 글은, 신영복이 우연한 기회에 사귀어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 당시 국민학생이던 꼬마 친구들을 위해서 쓴 것이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장충체육관 앞에서 2년 넘게 만나던 꼬마 친구들은 왜 신영복이 갑자기 자기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지 모를 것이 아닌가?


△ 감옥에서 쓴 신영복의 엽서는 고친 흔적이 없다. 명상을 토해 머릿속에서 교정까지 다 봐두었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사건 당시 현역 육군 중위였기 때문에 그의 사형집행 형식은 교수형이 아니라 총살형이었다. 교수형이 아니라 총살형이란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거리였다. 프랑스혁명의 선봉에 섰다가 옥사한 대수학자 콩도르세는 ‘찬란한 햇빛 아래 죽는 것’을 그렇게 바랐다지 않는가. 모든 사형수가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와닿는 신영복의 사색은 총살형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처연한 낭만과 갈라진 현대사의 처절한 아픔이 안겨준 젊은 날의 임사체험(臨死體驗)의 결과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대법원에서 상고 포기로 형이 확정된 뒤 신영복은 1970년 9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서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 신영복은 당시에는 전향 문제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육군교도소에서는 전향 문제에 대한 권유도 없었고, 그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다. 당시 안양에는 사상범이라고는 신영복 한 사람뿐이었다. 전향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 선배도 없었다. 교도소 당국은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미 다 전향을 했다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가족들도 통혁당 사건의 다른 관련자들도 전향서에 날인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강력히 권하였다. 그래서 인적사항을 적고, 북한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간단한 내용으로 ‘전향의 변’란을 메우는 것으로 전향서를 작성했다.

<엽서>에는 왜 고친 자국이 없는가

신영복이 전향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뒤,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게 되고, 특히 박정희 정권의 강제전향 공작이 본격화될 무렵이었다. 그는 한 사람이 자기의 사상을 끝까지 견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으면서, 반성도 하고, 고민도 하고, 자기 합리화도 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견지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굉장히 쉽고 편의적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다고 해도 자신은 결국 전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조직성원이었다면 좀더 심각하게 고민했을지 모르나, 그는 조선노동당원도 아니고, 통혁당원도 아니었다. 빈농 출신으로 정치 일꾼이 되어 온몸으로 사회주의 세상의 짜릿함을 맛본 적이 있는 남파 공작원들, 게다가 그들은 북에 가족을 두고 있었다.

신영복이 20년 감옥 생활에서 꼬박 15년을 보낸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것은 1971년 2월이었다. 안양과는 달리 대전은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좌익 사상범이 많았다. 그는 이미 전향서를 쓴 상태에서 대전으로 이감왔기 때문에 특별사동에 수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도소 당국은 전향했지만 통혁당 사건 무기수인 신영복을 바로 공장에 출역시키지 않았다. 한 1년 정도 독방과 혼거를 거듭하면서 관찰한 뒤에야 교도소 당국은 출역을 허락했다.


△ 글씨 스승 정향 조병호 선생을 찾은 신영복 교수. 그의 한글 서예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인쇄본으로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렵지만,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그대로 영인한 <엽서>를 보다 보면 고친 자국이 거의 없다는 점에 문뜩 깜짝 놀라게 된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도 다 사연이 있었다. 20대 후반의 지식청년 신영복은 감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냥 두면 다 잊어버릴 것 같은 이 경험을 어딘가 기록해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분단된 조국의 감옥에서 그런 생각을 담아둘 수 있게 유일하게 허용된 공간은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엽서였다. 밖으로 보낸 엽서가 모여 있으면, 언젠가는 내가 다시 읽어보리라 하는 생각에서 감옥 시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로 엽서 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주제를 하나 잡으면 한 달 내내 감방 안에서 면벽 명상을 통해 생각을 거듭하고 미리 머릿속에서 교정까지 다 봐두었다가 엽서를 쓰는 날, 머릿속에 완성된 문장 형태로 갖고 있던 것을 토해냈다고 한다.

면벽 명상이나 독서를 하기에는 독방이 좋을 것 같지만, 20년 감옥 생활 중 5년여를 독방에서 보낸 신영복에 따르면 독방의 징역살이가 더 힘들고 때로 정신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혼자 있으면 언어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방을 왔다갔다 하며 혼잣말을 하는데, 그러면 교도관은 통방하는 줄 알고 앉으라고 야단을 친다. 혼자서 이야기하다 보면 종종 이상한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서 후딱 그쳤다가, 다시 혼자서 말을 하기를 반복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이란 역시 같이 대화하고 부대끼며 사는 존재였던 것이다.

장기수들의 역사와 만나다

신영복이 파기환송 후 다시 재심을 받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 친구나 후배들 중에 이미 대전에 와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징역살이가 인생에 있어서 조금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도록 밤잠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공장에 출역하는 것보다는 오로지 독서에 열중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교도소 재소자란 물론 우리 사회의 하층민이긴 하지만, 룸펜적 성격을 벗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들과 접촉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영복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신영복이 보기에도 재소자의 대부분이 룸펜적 성격이 강해서 사회 변혁 의지라든가, 노동계급으로서의 건강한 자부심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들도 역시 민중이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억압구조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영복은 그들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들과 맨살을 맞대는 접촉을 하면서 지식청년이었던 자신이 가졌던 관념성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하게 된다.


△ 신영복 교수는 감옥에서 사람과 세상을 다시 만나 자기 개조를 이루었다. 아들과 함께 산행에 나선 신 교수.

교도소에서 사람을 만나고 같이 지낸다는 것은 바깥의 도시에서 잠깐 악수하고 헤어지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온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징역 생활에서 도덕적 가식을 부리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감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정직한 알몸 그대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방에서 대개 몇 년을 같이 보내며 서로의 삶과 살아온 내력을 공유하면서 개인에 대한 이해를 넘어,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또 다른 사회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하, 목수가 집을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리는 게 아니라 일하는 순서대로 주춧돌부터 그리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은 책이나 교실에서 인식했던 것과는 다른 펄펄 뛰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했다.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학교 사택에서 쭉 자라고, 책을 통해 정서를 키워온 사람으로서, 그런 자신의 인식의 틀이 깨어지는 것은 감옥 초년에 그가 겪은 가장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영복이 육군교도소 시절이나 독방에서만 있은 안양 시절에는 잘 몰랐다가 대전에 와서 새삼 발견한 사실은 교도소에 노인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었다. 공장에서건 사방에서건 그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신영복은 개인의 성격과 범죄를 연결시켜왔던 그때까지의 단순한 논리를 반성했다. 그들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관해서 이야기 듣노라면 그 혹독한 상황에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범죄가 개인의 성향보다는 사회나 시대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영복은 밑바닥 인생들과 맨몸으로 부대낀 오랜 감옥 생활을 통해 지식청년으로서의 관념성을 깨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감옥은 청년 신영복에게 여기에 더해 어떤 새로운 역사의식을 일깨워주었다. 1970년대 초반은 아직 해방으로부터 채 3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절이었다. 조국이 찢어진 상황에서 전쟁의 격동에 몸을 내던졌던 사람들, 또는 그 격랑에 휘말린 사람들 중에 아직 감옥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물론 50대 60대를 넘긴 노년이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부역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빨치산 출신도 있었다. 빨치산에도 한국전쟁 중에 입산한 ‘신빨치’만이 아니라 전쟁 발발 이전에 입산했던 ‘구빨치’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또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 안내원들도 있었다. 신영복은 해방 전후의 분단 현실을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는 분들과 일상을 같이했다. 막연하게 책에서 보았던 한국 근현대사의 사람들을 만나 이들에게서 생생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노인들로서는 20대의 명석한 신영복에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신영복은 마치 체험하듯 역사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생환된 역사’였다.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한 그 느낌!

서구 근대를 뛰어넘는 관계론 구상

신영복은 그 시절 한학의 대가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선생과 4년간 한방에서 지내는 행운을 얻게 된다. 박치음이 <소쩍새>란 노래를 헌정한 노촌 선생은 참 특이한 분이시다. 명문 연안 이씨 집안의 종손으로 조선 봉건사회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 사회를 거쳐 전쟁을 겪으며 월북해, 사회주의 사회를 몸소 겪고 분단의 현실 속에서 남파되고, 일제 때 그를 체포했던 형사가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다시 체포돼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8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로 튕겨져나온 분이 이구영 선생이시다.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 보수적이기 쉽지만 노촌 선생은 드물게도 더불어 고르게 잘사는 대동의 꿈을 간직한 채 사회주의적 사고를 체화하셨고, 또 고전에 대해 진보적 해석을 내리셨다.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노촌선생을 만나기 이전부터였다. 60년대 대학 시절의 문화에 대한 반성과도 관련이 깊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한국 사회는 근대화 모델을 따라 줄달음쳐 갔다. 해방 이후의 격동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 뒤의 부패와 가난을 겪는 동안 한국 사회는 오로지 서구적 문화, 서구적 가치 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그쪽에 몰두했지, 우리 것에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자존심이 없는 개인, 자부심이 없는 민족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반성 속에서 신영복은 감옥에 들어가서 동양 고전을 깊이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 고전의 지혜와 가치에서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문제의식 말고도 옥중의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빠져들게 된 데에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아주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징역 초년의 왕성한 지식욕에 하루 한두 권씩 책을 읽을 나이였으니 책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자연히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중국 고전이 딱이었다. <노자 도덕경> 같은 책은 5200자에 불과하지만 몇 달을 두고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신영복은 동양 고전을 통해 얻은 내용과 징역살이에서 깨달은 내용을 ‘관계론’이란 개념으로 정리해간다. 서구 사회는 개별적 존재성을 패러다임으로 하는 사회인 반면, 동양이나 근대를 뛰어넘는 사회는 관계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일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2004년 말에 출간한 <강의>의 핵심적 내용이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곳곳에 들어서는 건물, 특히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은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 어디 기념물뿐이랴. 최근 대박을 터뜨린 소주 ‘처음처럼’도 그의 글씨다. 얼마 전 어느 서예학회에서 ‘서예의 실용화’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는 기사를 보고 신영복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혼자 웃음지은 적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처음 ‘전시’된 것은 아마 ‘동상예방 주의사항’이나 ‘재소자 준수사항’ 같은 소내 게시물들이 아니었을까? 어려서 할아버지께 잠시 배우다가 잊어버렸던 붓글씨를 신영복은 옥중에서 다시 만났고, 감옥에 서도반이 생기면서 만당 성주표(晩堂 成柱杓),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 선생에게서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특히 풍양 조씨 노론 대가집 후예인 정향 선생은 추사의 서법을 이은 민형식(閔衡植) 선생이나 한말의 서화 대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에게 배운 분이었다. 교도소장이 글씨 한 점 얻을 욕심에 서도반이 생긴 뒤 한 번 모신 것인데, 교도소란 살인범·도둑놈이나 가는 곳으로만 알던 정향 선생이 신영복 등 사상범들이 옥중에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시며 “아,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시고는 7년간 매주 교도소에 오시어 글씨를 지도해주셨다고 한다.

민체, 우리 서예의 중요한 경지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서예의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 이전 한글 글씨는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적이고 귀족적인 미학을 지닌 궁체는 시조나 별곡, 성경 구절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썩 잘 어울리지만, 신경림, 신동엽의 시나 민요, 또는 투쟁 현장의 목소리 같은 것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신영복은 그런 내용과 형식 사이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중 어머니께서 보내는 모필 서간체 글씨를 보며 깊이 느낀 바 있어, 어릴 적에 춘향전 필사본 등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두루말이 글씨를 생각하면서 한문 서도에서 익힌 필법을 도입해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民體), 또는 연대체(連帶體),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해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신영복은 교도소에서 보낸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종종 표현한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키우고, 생생한 역사의식을 길렀으며, 게다가 양화공·봉제공·목공·영선·페인트 등 여러 가지 기술까지 익히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88년 8월14일 잡혀간 지 꼭 20년 20일만(그러나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음력으로 꼭 20년 만이다. 생일날 잡혀가서 생일날 풀려났다고 한다)에 출옥했다.

그는 20년의 징역살이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위를 넘어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 부분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레닌을 포함해 수많은 실천가들이 성공하지 못한 자기 개조를 이뤄냈다는 것!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야,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라며 칭찬하더란다. 신영복은 그렇게 세상과 다시 만났다. 하나의 나무가 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들이 더불어 숲을 이뤄가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주던 그가 지난 6월8일 아쉬운 정년 고별 강연을 했다. 20여 년의 청년기, 꼭 20년의 귀양 생활, 그리고 귀양이 풀린 뒤의 해배(解配) 기간이 20년가량이었다. 해배 2기라고 할 수 있는 앞으로의 20년, 더불어 숲의 중심에서 신영복은 우리에게 어떤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