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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한홍구 칼럼 목록 > 칼럼내용   2005년10월26일 제5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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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검장과 검찰총장을 맞바꾸다

1950년 ‘수사지휘권 갈등’이 빚은 괴이한 검찰인사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표 써야 할 때는 침묵하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된 지금 ‘결단’ 내리시나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1950년 6월22일, 이승만은 참으로 괴이한 인사를 단행했다. 검찰총장 김익진을 서울고검장으로, 서울고검장 서상환을 검찰총장으로 맞바꾸는 발령을 낸 것이다. 권승렬 법무부 장관은 아예 면직되었다. 경찰에 대한 의존도가 극히 높았던 이승만이 수사지휘권 문제로 검찰과 불편한 관계였던 경찰의 손을 들어준 조치로, 한마디로 김익진에게 스스로 옷 벗고 나가라는 뜻을 이런 전무후무한 인사를 통해 나타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검찰과 경찰은 수사지휘권 문제로 갈등이 끊이지 않았는데, 김익진은 “경찰 조사에는 의견만 있고 증거는 없다”면서 경찰의 부족한 수사능력을 꼬집었다. 지금 강정구 교수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의 기상천외한 검찰 인사를 촉진한 것도 공안사건들이었다. 경찰이 열심히 ‘빨갱이’를 잡아 검찰로 송치하면, 검찰에서는 왕왕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빨갱이’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다 보니 검사가 백주에 우익 청년단체의 테러를 당해 사망하는 일도 있었고, 여순반란 사건 당시에는 토벌군이 검찰 지청장을 총살해 큰 말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검찰 내에서도 이름난 반공검사가 빨갱이들을 자꾸 풀어준다고 다른 검사를 구속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검찰총장이 하루아침에 서울고검장으로 발령이 나버리는 이 희한한 인사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검찰을 길들이기 위해 단행된 것이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고, 후배들 보기에 민망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김익진은 사표를 내지 않았다. 사표를 내는 것이 곧 정치권력이 인사권을 통해 검찰에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에 굴복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던 이태희는 김익진 총장이 서울고검장으로 강등되자 이승만 대통령을 상대로 ‘인사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냈고, 이승만은 이태희를 부산지검장으로 좌천시켜 이에 ‘화답’했다.

경찰이 ‘빨갱이’로 몰면 검찰이 풀어주다

이번 강정구 교수 사건에서도 수사권 독립 문제로 검찰과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경찰이 구속수사 의견을 내어 검찰의 선택의 여지를 빼앗은 채 검찰을 궁지에 몰았다는 관측이 있다. 이런 관측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검-경 수사권 갈등 속에서 공안사건을 계기로 검찰의 인사파동이 촉발됐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는 분단된 채 너무나 오랜 기간 반공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써온 나라의 검찰이 짊어져야 할 숙명적인 멍에였는지 모른다.


△ 1975년 4월8일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상고심 판결. 이 사건을 계기로 검찰은 정치권과 한몸이 되었다. (사진/ 보도사진연감)

해방 직후 검찰과 경찰 사이의 수사권 갈등은 일제시대 대륙법 체계에 따라 검찰이 수사권을 갖고 사법경찰을 지휘하다가, 미군정이 되면서 검찰은 공소유지만을 담당하고 수사의 중심은 경찰에 있는 영미법 체계가 도입됐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더구나 일제시대에 고등경찰 출신이 지도부를 장악한 경찰은 일본인들 밑에서 법원 서기 정도를 하다가 출세해 검사가 된 젊은 검사들을 무시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당시 오제도와 함께 유명한 사상검사로 이름을 떨친 선우종원에 따르면 미군정은 사사건건 경찰만을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에 정부 수립 이후 경찰과 검찰 사이의 위계질서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로 대두됐다고 한다. 얼마 전 어떤 검사가 경찰이 공문에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고 돌려보낸 일이 화제가 됐는데, 이 방법은 건국 전후 검찰이 경찰의 군기를 잡는 데 많이 써먹던 것이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있던 시절도 아닌데, 틀린 글자 하나만 있어도 서류를 다시 작성해오라 하니 경찰로서도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건국 초기에 검찰은 검찰 직속의 사법경찰기구를 설치해 검찰 중심의 수사 체제를 확립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대통령의 신임 속에 방대한 기구를 늘려나가던 경찰에 대해 완전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던 검찰은 대검 중앙수사국의 신설과 각 지검의 수사과의 특화를 통해 대공·공안 기능을 강화해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검찰사를 전공한 문준영의 연구에 따르면 경찰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문제는 전전의 일본에서도 검찰이 직면한 주요 과제였는데, 193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출구가 사상범죄의 영역에서 모색되어 1941년 치안유지법, 국방보안법 위반 범죄에 대해 검찰 중심의 일원적 수사 체제가 법적으로 확립됐다고 한다. 분단과 전쟁을 거쳐 극단적인 반공규율 체제 속에서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탈바꿈한 국가보안법이 맹위를 떨치고, 식민지 시기의 억압적인 치안유지 기구들이 오히려 더 발전하면서, 검찰도 과거의 사상검찰 체제를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하게 됐다.

당직 서던 검사가 인혁당 공소장에 서명

1960년의 4월혁명은 검찰에게도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태어날 기회가 되었다. 4월혁명 직전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 도중 실종된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주검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여론은 들끓게 됐는데, 반공검사로 이름을 떨치던 오제도는 대공3부합동수사위원회의 책임자로 이 사건을 조사했다. 오제도는 이렇게 주검을 앞세워 여론에 불을 지르려는 것은 남로당의 수법과 동일하다면서, 마산 사건에는 공산당의 배후 조종 혐의가 있으며, 간첩 관련 여부를 수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는 법, 나라를 혼자 지키는 것처럼 설치며 많은 적을 만들었던 정치검사 오제도는 4월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 관련자로 검사로서는 특별하게 국회에서 파면동의안이 발의됐고, 통과를 앞둔 상태에서 사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김익진 검찰총장에 대한 부당한 강등 인사에 항의해 사표를 쓴 게 아니라 이승만을 상대로 인사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냈다가 좌천됐던 이태희는 검찰총장이 되었고, 이태희에 앞서 서울지검장 시절 이승만의 개입에 맞섰던 최대교는 서울고검장이 되어 부정선거와 부정부패 관련자들을 기소했다. 이승만에 의해 법무부 장관에서 면직된 권승렬은 과도정부의 법무부 장관으로 돌아왔다.


△ 공안부의 영역을 확장해가던 검찰은 1985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다. 1988년 법원을 나서는 피해자 권인숙씨(오른쪽)와 담당변호사 조영래씨. (사진/ 한겨레)

법원과 검찰에서 자율적인 과거 청산이 기대되던 4월혁명 이후의 시기는 5·16 군사반란으로 막을 내렸다. 세상이 다시 바뀐 것이다. 그리고 50년대 검찰의 숙원이었던 대공·공안 기능을 전담할 중앙수사국의 설치도 물건너가게 되었다. 대공과 공안을 전담할 조직이 검찰 내부의 기구로서가 아니라 검찰보다 더 크게, 더 강력하게 중앙정보부로 탄생한 것이다. 과거 검찰에서는 오늘날 공안부에 해당하는 부서가 정보부였는데, 중앙정보부의 설치로 인해 정보부란 명칭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고, 서울지검에 공안부가 설치됐다.

1960년대 공안검찰의 역사에서, 아니 검찰 전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64년의 제1차 인혁당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겨레21> 527호에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검찰의 행로를 바꾼 워낙 중요한 사건인지라 지난번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중심으로 간단히 짚어보겠다. 중앙정보부는 한일회담 반대시위인 6·3 사태의 배후에 북한의 간첩의 지령을 받아 조직된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발표했는데, 이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도저히 기소할 가치가 없다며 기소를 거부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의 압력을 받은 법무부와 검찰 수뇌부는 기소 압력을 넣었고, 공안부 검사들이 말을 듣지 않고 다른 검사들도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면 검사장님이나 차장검사님이 직접 기소하시죠”라며 빈정거렸다. 그래서 서울지검장은 그날 밤 당직을 서던 검사를 시켜 공소장에 서명을 하게 한 것이다. 참 편하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이여! 수사를 하지 않고도 공소장에 서명해도 되다니!

사표란 이런 때 내는 것이다. 오제도의 사표가 사표 안 내면 파면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낸 것이었다면, 공안부장 이용훈과 공안부 검사 김병리, 장원찬은 사표를 던졌다. 당혹스러운 사태에 직면한 검찰 수뇌부가 직접 설득에 나선 결과 김병리와 장원찬은 사표를 거두었지만, 이용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개별 검사가 누리던 자율성과 소신은 이렇게 짓밟히기 시작했다. 원래 공안부에는 검사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는 김형욱이 자기 회고록에서 자신의 심복이라 표현할 정도로 중앙정보부와 밀착한 인물인지라, 사표 낼 때 우물쭈물 화장실 간다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세 사람만 내게 됐다고 한다. 이 사건을 결국 맡아 처리하게 된 검사는 한옥신인데 그는 당시 고검 검사였다. 당시에는 고검 검사는 지검 검사에 비해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그가 이 사건을 맡은 것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낸 유능한 공안검사였지만, 그가 이런 말썽 많은 사건의 설거지를 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대표적인 공안검사이면서도 북에서 남파된 사촌을 하룻밤 재워준 탓에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로 인해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마 내가 발표문 읽을 수 없어서…."

군이 국민들로부터 국방개혁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려면, 절대로 이룩될 수 없는 '절대 억지'를 위한 전력이 아니라 방어에 필요한 합리적이고 충분한 전력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북의 위협뿐 아니라, '잠재적이지만 증가하고 있는 주변국의 위협' 이라는 모호한 말로 새롭게 제시된 위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잠재적 위협론에 따르면 "국가관계에서 영원한 우방도 적국도 없으며, 동북아시아처럼 강대국이 집중된 지역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정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박정희의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를 하던 36살의 신직수가 근 8년 가까이 검찰총장직을 차고 앉았다가 법무부 장관으로 옮긴 이래, 검찰총장 출신이 법무부 장관으로 가는 것은 군사독재 정권에서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모든 검사의 아버지’였던 분이 법무부 장관이 되어 보이지 않게 정치권력의 입장을 전달하니 검찰과 정치권이 갈등을 일으킬 소지는 없었다. 안기부장 주재의 관계기관 대책회의, 청와대 사정비서관과 대검차장과의 직통 라인, 청와대 파견검사 제도 등 다양한 창구를 통해 권력의 뜻은 즉각 검찰에 전달됐다.


△ 노무현 대통령과 전국 평검사 대표들과의 토론회.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국정원과 보안사의 영향력이 퇴조하자, 검찰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되었다. (사진/ 박승화 기자)

사회가 다변화되면서 검찰은 경찰이 송치한 사건뿐 아니라, 검사가 주동적으로 사건을 포착해 수사하는 이른바 인지수사가 확대,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제 검찰은 일어난 범죄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예방과 단속으로 영역을 넓혀갔고, 공안사건에 대해서도 ‘기획’을 하기 시작했다. 문준영에 따르면 10월유신을 전후한 시기 검찰이 강조한 ‘믿고 살 수 있는 밝은 사회’ ‘사회기강 확립’ ‘법의 생활화’ ‘준법정신 함양’ 등의 슬로건은 1930년대 후반 이래 군국주의 일본이 ‘소화유신’(昭和維新) 당시 일본의 검찰이 강조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유신 직후인 1973년 1월 형사소송법의 개악으로 검찰은 그동안 불편해하던 재정신청제도, 구속적부심제도, 보석제도 등을 입맛에 맞게 폐지 또는 변경했다.

재벌과 검찰의 결탁이 진정 무섭다

전두환의 5공이 들어서면서 공안검찰의 입지는 크게 강화됐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했기 때문에, 기세등등했던 중앙정보부는 이름도 안기부로 고치고 한동안 자숙해야 했다. 그리고 어인 일인지 육사 출신들이 법대 출신을 좋아해 이른바 육법당(陸法黨)을 만들어 요직을 갈라먹는 시절이 왔기에 검찰, 특히 공안검찰의 출세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특히 공안통인 정치근이 부산지검장에서 막바로 검찰총장에 임명되고, 곧이어 법무부 장관으로 승진하면서 공안은 검찰 내에서 성골이 된 것이다.

권력 내부에서 안기부, 보안사, 경찰 정보기구와 경쟁을 벌이면서 공안부의 영역을 순수 대공사건에서 학원, 종교, 노동 등으로 확장해가던 검찰은 1986년 5·3 인천사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으로 인해 홍역을 치르게 된다. 검찰은 가해자 문귀동을 옹호하면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를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극렬분자로 매도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인천지검에서 수사했는데, 당시 지검장 김경회는 작고한 뒤 간행된 회고록에서 그 뼈아픈 사건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안기부장과 대책회의를 하고 온 검찰총장은 자신에게 발표문과 대통령 보고문에 성고문의 ‘성’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안기부의 입장이라고 전했다고 한다. 지검에 돌아와 간부들을 모아 회의를 하는데 담당검사가 들어와 대성통곡을 했고, 자신도 회의가 끝난 뒤 문을 걸어잠근 채 소리 없이 울었다고 한다. 모 국장은 술에 취한 채 김성기 법무장관의 차 앞에 누워 부천서 사건에 대해 확실한 말을 하기 전에는 댁으로 갈 수 없다며 울면서 발버둥쳤다고 한다. 김경회는 자기는 죽어도 발표할 수 없다고 버텨 결국 부하인 부장검사가 대신 발표문을 읽었는데, 그에게는 “평생에 못할 짓을 내가 시킨 꼴이 되었다”고 미안해했다. 참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누구도 사표를 던지지 않았다. 꼭 필요한 사표 한 장을….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국정원과 보안사의 영향력이 퇴조하자, 검찰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되었다. 전에는 독재권력이 정보기관을 상호 견제시키고, 재벌의 힘도 어느 정도 제어했다. 그런데 민주화되고 나니 검찰공화국이란 말이 생기고, 삼성공화국이란 말이 나온다. 그리고 떡값 사건은 삼성공화국과 검찰공화국의 짝짜꿍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통제받지 않는 두 권력의 결탁은 진정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장래를 위협하는 일이다.

강정구 교수 불구속 수사 지휘로 촉발된 검찰총장의 사표 제출은 검찰, 특히 공안검찰이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한때 ‘신공안’이란 말을 만들어 공안 조직의 변화를 모색했지만, 1999년 진형구 대검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세상은 변하고 전통적인 공안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데, 할 일은 없으니 낮에 폭탄주 마시며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다가 벌어진 촌극이라는 것이다.

공안부는 법무부 훈령에 규정된 내란, 내란 목적 살인, 외환(外患) 유치, 모병이적(募兵利敵), 간첩 등 무시무시한 진짜 공안사범을 본 지 정말 오래됐다. 대신 공안부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한총련 대학생 등 공안 관련 사범이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강정구 교수도 공안사범이 아니라 공안 ‘관련’ 사범이다. 2004년 6월 법무부는 전국지방검찰청의 17개 공안과 가운데 서울중앙지검을 제외하고 나머지 16개를 폐쇄할 방침이라 밝혔지만, 아직 실행되지는 않고 있다.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의 파업 유도 발언 파문 때도 그렇고 강정구 교수 불구속 수사 지휘 파문 때도 그렇고, 공안이 하는 일은 없이 나라 걱정만 하다가 일이 커진다는 말이 검찰 주변에 떠돌고 있다. 일본은 애국자들이 망치고 한국은 매국노들이 망쳤다는 것이 20세기 전반기의 역사인데, 이제 한국도 ‘선진 조국’이 된 탓인지 너무나 주관적인 애국자들이 문제가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공안검사들의 각별한 나라 걱정이 이제 나라의 각별한 걱정거리가 되는 세상이니, 세상은 계속 변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