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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한홍구 칼럼 목록 > 칼럼내용   2005년06월14일 제5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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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률의 삶은 계속돼야 한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원폭 피해자 2세의 죽음이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는 이유
핵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과 북한의 야심 앞에서 그들을 생각한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김형률이 죽었다. 지난 5월29일, 일요일이었다. 일을 하다가 습관처럼 인터넷 뉴스를 클릭하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음 기사를 보았다. 열흘 전쯤 국회에서 열린 ‘원자폭탄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한 입법 방향’ 토론회에 같이 토론자로 참석했고, 그 며칠 뒤에도 일본에 다녀온다며 평화박물관 사무실에 들렀는데…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믿을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이 파리해 보이는 그를 보며 솔직히 몇년이나 버텨줄까 걱정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갈 줄은 몰랐다. 사흘 뒤면 평화박물관과 한국청년연합회 등 몇개 단체가 그와 같이 준비한 ‘원폭 60년, 고통의 기억과 연대 그리고 평화’라는 전국 순회 전시회가 열리게 되어 있는데….

원폭 피해자 규모도 파악 안됐다


△ 원폭 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삶을 바친 고 김형률씨. 그는 메일 끝에 “삶은 계속돼야 한다”는 말을 꼭 붙였다. (사진/ 박승화 기자)

김형률을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늦더위가 한창이던 때였다. 2005년이 해방 60주년인데 평화박물관은 이를 어떻게 맞을 것인가 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고민했는데, 다들 해방 60주년이나 분단 60주년은 정부는 물론이고 통일운동 단체 등 각종 단체에서 요란한 행사를 할 터인데 평화운동은 평화운동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준비하자는 의견이었다. 2005년은 해방 60주년이기도 했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6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주위에 알아보니 어떤 단체도 원폭 60주년을 되돌아보는 작업을 준비하는 곳이 없었다. 그러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하고 다들 합의했지만, 막막했다. 평화운동을 시작한 사람들로서 그저 막연하게 원폭 문제를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만 생각할 뿐, 우리 자신도 아는 것이 없었다. 뭘 알아야 면장을 하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이럴 때는 피해자의 목소리부터 들어보는 것이 순서다. 그래서 소개받은 사람이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김형률이었다.

2002년 3월 김형률은 대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원폭 2세로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라는 유전성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김형률의 어머니는 아주 어린 시절 히로시마에서 피폭됐다고 한다. 김형률은 원래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그의 동생은 생후 20일 만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김형률의 두 형과 여동생은 다행히 건강에 별 문제가 없다. 원폭 1세 문제와 또 다른 것이 2세 문제다. 2세 중에는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부모는 우산 장사와 짚신 장사 자식을 같이 둔 마음일 수밖에 없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걱정,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걱정이다. 아픈 자식을 보면 2세 문제가 공론화돼 어떤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2세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 혹시 성한 자식들 혼사나 취업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되고…. 김형률이 밭은 기침을 하며 가녀린 그 몸으로 끝까지 부둥켜안은 것은 이렇게 어려운 문제였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유족들, 비전향 장기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그리고 원폭 피해자들…. 우리가 수십년 동안 외면해온 사람들이다. 핵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놀라운 무지와 무관심과 무감각을 자랑한다. 나 자신도 관심을 갖고 꼼꼼하게 챙겨본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주변의 근현대사 전공자들에게 물어보아도 원폭 피해자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원폭 피해를 다룬 논문도 거의 없고,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한국인 피해자에 대해 제대로 조사 한번 한 적이 없다. 그러니 통계도 아주 거친 추정치일 뿐이다.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선구적으로 조사한 이치바 준코(<한국의 히로시마>의 저자)에 의하면 전체 피폭자 수는 히로시마 42만명, 나가사키 27만1500명으로 총 69만여명인데 그 중 조선인은 히로시마 5만명, 나가사키 2만명으로 총 7만명으로 추산된다. 피폭으로 사망에 이른 사람은 모두 23만여명이고, 그 중 조선인은 4만명으로 추산된다. 전체 피폭자에서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0%고, 폭사자에서는 약 17.2%로 죽은 사람 6명 중 1명 이상이 조선인이다.


△ 1945년 원폭 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왼쪽)와 당시의 원폭 장면. 히로시마에서만 3만명의 동포가 죽었다.

히로시마에서만 우리 민족 3만명이 죽었다. 제주 4ㆍ3 사건의 전체 희생자 규모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뜬 것이다. 19세기 말 이래 우리 역사는 험난했지만, 1945년 8월6일 말고 언제 우리 역사에 하루 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날이 있었던가?

실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거친 추산치밖에 제시할 수 없지만, 아래 표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체 피폭자 중 사망자가 약 3분의 1 정도인 반면, 조선인의 경우 피폭자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는 점이다. 왜 조선인 사망자 비율이 이렇게 높았을까? 원자폭탄이 폭발한 폭심지 주변에 조선인 밀집지역이 있었던 탓도 있지만, 조선인들이 피폭 이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점, 그리고 가난하고 연고도 없었던 조선인들이 피폭지 주변을 떠날 수 없어 지속적으로 방사능에 노출된 점을 들 수 있다. 아니,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니?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게 그 당시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베트남전 당시 참전용사들에게 아무도 고엽제의 독성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것처럼,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 경고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핵전략 추진을 위해 원폭의 가공할 살상력과 파괴력이 공개되는 것을 극력 저지했다. 미국은 원폭 투하 뒤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은폐했다.


소련을 겨냥해 폭탄을 투하하다

미국은 왜 전쟁 막바지에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사용했을까? 지금 미국은 북의 핵개발 의혹을 놓고 김정일 정권과 같이 위험한 정권이 핵무기를 보유해서는 안 된다고 펄펄 뛰지만, 미국은 인류 역사에서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한 유일한 나라였다.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미국은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에 대해 요란하게 떠들어댔지만, 여태까지 인류가 발견한 최악의 대량살상무기는 핵무기고, 그것을 실제로 사용한 유일한 정부는 바로 미국 정부였다. 원자폭탄이 터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땅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전략무기’인 원자폭탄이 실제 겨냥한 것은 소련이었다. 이미 일본과 물밑에서 항복 협상을 진행 중이던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꼭 원폭을 사용해야 했을까? 많은 역사학자와 국제정치학자들은 미국이 조금 시간은 걸렸겠지만, 재래식 무기로도 얼마든지 일본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요컨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소련과 필연적으로 대립하게 될 것을 예상하면서 그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막 개발에 성공한 핵무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원폭을 전선이 아닌 민간인 거주지역에 사전 경고 없이 투하한 것은 그 피해를 극대화해 최대한의 정치적 효과를 보겠다는 뜻에서였다. 핵무기의 위력은 과학자들이 책상에 앉아서도 계산할 수 있다. 미국만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던 것은 아니다. 소련도, 나치 독일도, 일본도, 모두 핵무기를 갖고 싶어했다. 그 위력은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이다. 두번에 걸친 원폭 투하로 미국이 증명한 것은 단순히 미국이 이 강력한 무기를 처음으로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1945년 8월6일과 9일 미국이 인류에게 확실히 보여준 것은 미국이야말로 이 가공할 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조폭 세계에서 누가 바지 가랑이에 회칼 차고 다닌다는 것만으로는 별 효과가 없다. 실제로 수틀리면 진짜로 휘두르는 놈이다라고 공인되는 것이 힘이다.

원자폭탄이 미국의 은혜라고?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로 공격당한 일본에게 오랜 기간 지배를 받다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한 미국을 해방의 은인으로 맞아들인 결과는 한국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한 핵 불감증에 나라 전체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먹인 덕에 우리가 해방됐다고 배웠다. 그러니 고마운 원폭이다. 한국전쟁 때는 아쉽게도 맥아더 장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못하고 해임돼 통일이 될 수 없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북한 괴뢰집단은 미국이 한국에 배치한 핵무기 때문에 감히 남침할 생각을 못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런 인식 속에서 원자폭탄이 사실은 일본 한 나라가 아니라 전 인류를 강타했다는 점도, 피폭자의 10분의 1가량이 우리 동포라는 사실도 묻혀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1957년 6월21일 군사정전위원회 제75차 본회의에서 ‘외부에서 한반도로 무기 반입을 금지한다’라는 정전협정 13조 D항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주한미군의 핵무장과 현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미국이 이북에서는 중국군이 철수하는 마당에 갑자기 한반도에 핵무기를 끌어들인 것은 일본에서 이 무렵 반핵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군 점령하의 일본에서 패전국 일본은 승전국 미국에 원폭 투하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미국은 1954년 태평양 한복판의 비키니섬에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1천배 이상의 엄청난 위력을 가진 수소폭탄 실험을 거행했다. 이때 인근 주민 167명은 미리 대피해 피해가 없었지만, 미국이 위험지역 밖이라 생각하던 폭심에서 반경 190km 이상의 주변 섬에 살던 주민들이나 인근에서 다랑어 잡이를 하던 일본 외항선 제5후쿠류호(福龍號) 등 800여척에 탄 선원들이 피폭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통해 세계적으로 수소폭탄실험 반대 여론이 고조되자, 미국은 비키니섬 수소폭탄 실험 피폭자들에게 피해 배상을 해주었다. 미국은 그동안 원폭 피폭으로 인한 장애는 없다는 태도를 고수해왔지만, 생각지 못한 사고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일단 비키니섬 사건 피폭자들에게 배상이 주어지자 원폭 피해자들도 그럼 우린 뭐냐고 들고 일어나게 된 것이다.


△  6월3일 열린 한국인 원폭피해자 인권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순회 전시회. 정부는 미국이나 일본에 앞서 고통받는 원폭 2세들을 보듬어야 한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에서는 1957년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의료 등에 관한 법률’을 시발로 일련의 원폭 관련 법률이 제정됐고, 주일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에 대해서도 강력한 반대 여론이 형성됐다. 그러자 미국은 피폭 국가로서 원폭 알레르기를 보이는 일본에 핵무기를 두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주일미군이 보유한 핵무기를 주한미군에 넘겨주는 것을 계획하게 된다. 핵무기를 한반도로 옮긴다 해도 일본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더구나 이승만 정부가 열렬히 핵무기가 ‘이사’오는 것을 환영하는 판이니 미국이야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으로서는 참으로 기겁할 일이었다.

주한미군은 1958년부터 냉전이 끝난 뒤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철수한 1991년 사이에 약 600여발의 핵무기를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핵의 존재에 대해서는 확인도 부인도 않는다는 NC-ND 정책을 써왔는데, 가부간에 확인을 하지 않아야 ‘적’이 미국의 의도를 읽지 못함으로써 판단의 혼란을 일으켜 미국의 핵전략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 국방장관 슐레진저는 베트남전 패배의 분위기 속에서 1975년 한반도에 핵무기가 배치돼 있음을 이례적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1987년 미 공군이 미국 의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모두 8개국에 핵무기를 탑재한 전투기를 보유한 미군기지를 갖고 있는데, 유럽을 제외하고는 한국이 유일하게 미국에 핵기지를 제공하는 나라였다.

느닷없이 반핵운동가가된 우익들

1986년 대학가에서는 박치음 교수가 작사·작곡한 <반전반핵가>가 공전의 히트를 하였다. 너나 없이 서너명만 모여도 그 노래를 부르고 다녀 하루에도 스무번 이상 노래를 들은 것 같은데, 당시 학생들은 “반전! 반핵!”보다는 “양키 고 홈!”을 외치고 싶어 이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핵이 평화를 보장한다고 굳게 믿던 기득권층은 반전반핵은 ‘설익은 구호’로 북의 대남 모략적인 정치 선동 구호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면서 ‘철부지 소년’들의 ‘안보불감증’을 탓했다. 당시의 한 신문은 “미국의 핵 우위와 미국의 핵우산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존립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온 것”이라며 미국의 핵무기에 대해 완전히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수준의 헌사를 바쳤다. 리영희 선생의 글에 나오는 1970년대 풍경은 더 살벌하다. 소련이 쏘아올린 인공위성의 핵연료 추진장치가 고장을 일으켜 지구로 떨어지게 되어 전세계가 전전긍긍할 때 한국의 한 신문에는 “제발 평양에 떨어져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만화가 실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던 이들이 21세기 들어 때아닌 반핵운동가가 되었다. 요즘은 좀 뜸하지만, 북핵 문제가 불거진 뒤로 대규모 ‘반김반핵’ 집회가 열리곤 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핵은 반북핵일 뿐 미국의 핵은 여전히 숭배 대상이다. 이들은 북으로 하여금 핵을 갖고픈 유혹에 빠지게 하는 미국의 핵은 반대하지 않는다.

원자폭탄으로 4만명가량이 죽은 나라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같이 핵무장을 부추기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역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미국의 감시로 남은 핵무기를 가질 수 없으니 북이 핵을 가져야 통일 뒤에 우리가 핵무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북이 핵을 협상카드로 쓸 수밖에 없는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북이 핵을 갖게 되기를 제일 바라는 자들은 일본 극우파들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일본의 핵을 포함한 일본의 재무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한반도가 소련을 겨냥한 미국의 핵기지로 제공될 때,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다고 든든해하는 한국인들에게 어느 소련쪽 인사는 이렇게 경고했다고 한다. 미국에 소련을 겨냥하는 핵기지를 제공하는 나라들을 소련의 핵무기가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달라고.


△ 히로시마 원폭으로 숨진 이들의 유품들. 미국은 인류 역사에서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한 유일한 나라였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 국가라는 피해자 이미지를 들고 나와 자신들의 전쟁 책임을 가리고 있다. 물론 전쟁을 일으켰으니 원자폭탄 맞아도 싸다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히로시마에 가면 묘한 비석이 있다.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말,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쟁을 일으킨 것을 반성하는 말일까? 아니면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한 것을 비난하는 말일까? 아니면 전쟁에서 진 것이 잘못이니 다시는 지지 말자고 다짐하는 말일까?

미·일에 앞서 우리가 보듬어야 한다

한국인 피폭자들에게는 지금 처지에서는 그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었다는 사실이 잘못일 뿐이다. 불쌍하게 죽은 미선이, 효순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 그때 거기를 지나간 애들 잘못밖에는 남지 않는다. 미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외면했다. 그들은 끌려간 고통, 원폭 피폭의 고통, 그리고 피폭으로 인한 장애와 질병이 초래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에다 정부로부터 외면당한 고통으로 3중, 4중의 고통을 받아왔다. 한국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원폭 피해자들을 철저히 외면하더니, 다시 강제동원법에서도 원폭 문제는 빠져버렸다. 김형률의 활동에 힘입어 원폭 피해자와 원폭 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가인권위원회가 용역을 주어 2세들의 건강실태 조사를 간략히 했을 뿐이다. 그래서 김형률은 원폭 피해자 진상 규명과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목맸던 것이다.

2세 환우 문제는 일본이나 미국도 아직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면서 지원하지 않는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다. 의학적으로 입증 못하면 책임이 없다는 것인가? 그 입증 책임을 왜 김형률 같은 피해자가 ‘선 지원, 후 규명’을 처절하게 외치다가 국가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위로도 받지 못하고 한 줌의 재로 사라져야 하나? 원폭 후유증이 2세에게 대물림된다면 원폭을 사용한 미국이나 실제 피폭자들에 대한 원호 책임을 지는 일본의 법적·도덕적·재정적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들은 2세 책임 인정에 소극적이다. 그러나 한국은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 실제로 핵을 사용했던 미국 같은 나라를, 또는 끝 간 데 없는 재무장을 꿈꾸는 일본을 말로 잘 타일러 핵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까? 전쟁을, 핵을 막는 데에는 도덕을 고양시키는 것보다 전쟁을 일으키거나 핵을 휘둘러 얻을 것이 없게 만드는 것이 지름길이다. 조폭들이 ‘차카게 살자’고 다짐하는 게 꼭 마음잡아서는 아니다. 법이 지켜지고 정의가 세워지면 주먹 휘두르면 값이 비싸진다. 깍두기 같은 어깨들이 눈을 부라려도 비실비실한 사람이 “돈 많으면 때려봐” 하고 지나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박정희 시절의 보건사회부에서 만든 문건에서도 “조국에 돌아온 한국인 피폭자들은 대부분 불구 또는 폐질자로서 생활수단을 얻기 어려워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며 2세 문제에 대해서는 “또한 이 병은 유전성이 있어 피폭자들의 후손에 대한 건강관리도 크게 우려되고 있다”고 했다. 비록 그 당시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30여년 전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보사부가 도달한 인식을 민주화된 노무현 정권에서 김근태가 이끄는 보건복지부가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일까? 2세들의 고통을 정부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미국이나 일본에 앞서 고통받는 원폭 2세들을 보듬어야 한다.

김형률은 주위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낼 때 꼭 “삶은 계속돼야 한다”라는 말을 달았다. 그때는 그냥 무심하게 넘겨버렸다. 막상 그가 이렇게 떠나고 보니 왜 그가 “삶은 계속돼야 한다”라는 말을 되뇌었는지가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편히 쉬라 김형률, 그대의 삶은 우리 가슴속에 계속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