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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등록 2002.10.23(수) 제431호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만주군관학교-광복군-남로당-숙군 협조, 양지만을 좇은 그의 끝없는 변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한 198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때 유행한 노래에 가수 이용씨가 부른 것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하는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어떤 악동이 먼저 시작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 노래를 “양주잔 기울이고 있다가 머리에 총 맞았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기억이 독재의 종말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하고 가사를 바꿔 불러댔다. 박정희의 정치적 양자인 전두환 시절에는 오히려 아버지의 그림자를 지우는 작업이 진행됐지만, 1997년 말의 외환위기 이후 박정희의 망령은 ‘잊혀진 계절’을 뒤로 하고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박정희의 관 뚜껑에 제대로 못질을 하지 못한 탓일까 박정희의 망령은 ‘근대화의 기수’, ‘고독한 혁명가’, ‘눈물 많은 초인’, ‘보릿고개를 없앤 강력한 지도자’, ‘속옷을 꿰매 입은 청렴한 대통령’ 등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휘감고 되살아나 강시 선생처럼 우리 사회를 콩콩 뛰어다닌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은 뒤 계속돼온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 속에서 그가 키워낸 ‘새끼 박정희들’의 난장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그럼에도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까닭은 그가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박정희의 삶에는 네번의 결정적 변신이 있었다. 첫 번째는 국민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해방 직후에 광복군에 가담한 것, 세 번째는 남로당에 가담한 것, 마지막으로는 여순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적인 변신을 해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에서 박정희만큼 변신을 자주한 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이 급히 변하다 보니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시류에 휩싸여 변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하는데 옛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이 미덕은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변신은 횟수도 그렇지만 남다른 데가 있었다. 앞의 세번의 변신은 불행한 기회주의자의 막차를 탄 변신이었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에 지식청년들의 사회적 진출의 길은 매우 좁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사가 되는 길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교사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또 당시의 사범학교는 학비가 무료였을 뿐 아니라 면서기가 20원의 월급을 받은 때 25원의 관비장학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가난한 집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일제로서는 황국신민화 교육의 첨병이 될 국민학교 교사들을 육성하기 위해 이런 특별대우를 한 것이지만, 사회적 진출의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식민지 청년들에게 사범학교는 매력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의 사범학교는 오늘날 대학에 해당하는 전문학교로 취급되는 경성사범학교를 제외하고는 대개 현재의 중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범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매우 어린 나이에 진로를 결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구사범 4학년 때의 박정희가 전체 73명 가운데 73등, 5학년 때는 70명 가운데 69등으로 꼴찌를 다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박정희가 대구사범 시절 꼴찌한 것을 “황민화가 목적인 학과교육을 충살히 해 모범생이 되는 길은 포기했다”고 미화하지만, 그런 그가 대구사범보다 황민화 교육을 철저히 시킨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각각 1등과 3등을 한 사실을 놓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그는 왜 만주로 갔는가

박정희를 미화하는 자들은 박정희가 일본인 교장과 싸운 뒤 교사직을 던지고 만주로 갔다고 하지만, 박정희 자신은 만주행의 동기를 “긴 칼 차고 싶어서”라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한마디로 군인으로 출세하고 싶었다는 얘기다. 박정희는 보통학교에 한살 늦게- 당시로는 늦은 것은 아니었다- 입학한데다 대구사범을 마치고 2년간 교사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이 제한에 걸려 일본육사에 진학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나이 제한이 일본육사보다는 덜 엄격한 만주의 중앙육군군관학교 진학을 모색했다. 이때 박정희는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이라는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보냈고, 이 혈서는 만주의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는 1940년 4월,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 흔히 신경(新京) 2기라고도 함- 에 입학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한 박정희는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일본인 졸업자돠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만주인 동기생들과 함께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해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했다.

대구사범의 열등생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의 우등생이 되어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8단에 소위로 부임했다. “긴 칼 차고 싶어”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포기한 박정희의 소망이 이뤄진 것이다. 사범학교 5년과 만주군관학교 2년, 일본육사 2년을 거쳐 누구보다 오랜 기간에 황국신민화 교육을 철저히 받은 황국청년 박정희 앞에는 출세의 사다리가 보장된 듯싶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지원한 시절의 일본과 이제 박정희가 ‘진충보국’해야 할 일본의 처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일본제국의 생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기쁜 일이었으나, 9년이라는 긴 세월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받고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기 시작한 박정희에게는 비극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를 미화하는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정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민족해방의 기쁨보다는 걱정을 안게 된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국민이 구차해진다는 이 실감, 해방이 몰고온 모순과 곤혹과 갈등의 이 체험은 박정희를 자주인(自主人)으로 빚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해방이라는 뜻밖의 소식이 만주의 서쪽 변방 열하성에 있는 박정희에게 전해진 것은 이틀이 지나서였다. 박정희는 같은 8단에 근무하던 만주군관학교 선배인 상위 신현준, 중위 이주일 등과 상의해 북경으로 가기로 했다. 조선으로 귀국하려면 봉천을 경유하는 것이 정상적 경로지만, 봉천에 소련군이 진주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북경을 거쳐 먼 길을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박정희 일행은 한달여 만인 1945년 9월21일께 북경에 도착했다. 박정희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북경에 일본군에 복무하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황군 장교, 광복군 장교가 되다

당시 중경 임시정부는 중국 주둔 일본군 내 있던 10만여명의 조선군 장병들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본진은 귀국하지만, 일부 성원을 남겨 중국국민당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군 내 조선인 청년들을 조직하는 사무를 관할하기 위해 1945년 11월1일 박찬익(朴贊翊)을 단장으로 하는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을 조직했다. 주화대표단은 산하에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설치해 교민들에 대한 사무를 보는 한편, 군무조를 두어 일본군 내 한적(韓籍) 사병들을 인수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해방 당시 3개 지대를 갖고 있던 광복군은 모두 7개의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설치해 모두 10개의 지대를 각 1만명씩 사단으로 육성해 귀국시켜 국군의 모체로 삼으려고 했다. 박정희가 도착한 북경에는 최용덕(崔用德)을 지대장으로, 이성가(李成佳) 등을 참모로 한 북평잠편지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일방적 바람이었을 뿐, 연합군이나 중국국민당 정부의 계획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중국은 자국 내에서 10만명의 외국군을 무장시킬 의사도 능력도 없었으며,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미국은 남한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이 같은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다.

황군 장교 박정희가 광복군이 된 것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부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마치 박정희가 일제 패망 이전에 광복군이나 비밀항일결사에 가담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완전히 허황된 것이다. 박정희와 같이 근무한 신현준은 광복군의 존재를 해방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의 광복군 신화가 만들어진 것은 한때 광복군을 따라다니던 박모라는 작가가 펴낸 광복군이라는 두권짜리 소설 때문인데, 첫 권은 광복군 3지대장을 지낸 백파 김학규(白波 金學奎)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고, 다른 한권은 박정희를 주인공으로 해서 박정희가 해방 전에 광복군과 내통하며 항일공작을 펼쳤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박정희 자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밑의 아첨꾼들이 만들어낸 것이겠지만, 일부 정신없는 작자들에 의해 마치 박정희가 항일투사라도 되는 듯 꾸미는 데 교과서 역할을 단단히 했다.

박정희가 소속된 광복군 부대는 아마도 북평잠편지대일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증언에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평진이란 북평과 천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신현준이고, 박정희는 1중대장 이주일에 이어 2중대장을 맡았다고 한다. 이 부대는 실제 광복군 부대라기보다 해방이라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라 광복군이 세불리기 차원에서 부대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사실상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다. 이들 부대를 관리한 중국쪽 기관이 부로관리처( 虜管理處)인 것도 이를 증명한다.

박정희가 해방 이후 광복군에 가담한 것은 광복군의 이념이나 정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의 보신책이었다. 국제 정세에 어두운 박정희로서는 광복군이 해방 이후 국내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보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북경에서 귀국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서 이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형 박상희의 죽음과 대구항쟁

그러나 기회주의자 박정희가 덥석 잡은 광복군이라는 동아줄은 미국의 방침 때문에 썩은 동아줄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중국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임시정부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경계해 임시정부를 지원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조차 ‘혼이 왔는지 육신이 왔는지 모르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하던 처지에 얼치기 광복군이야 오죽하겠는가 당시 화북구 한교선무단의 한 간부가 주화대표단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북경에 모인 한적 사병들의 처우가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돼 있었다. 박정희는 이런 광복군 생활을 몇달간 하다가 1946년 5월6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천진을 떠나 5월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육지를 밟은 것은 이틀이 더 지나서였다. 박정희보다 2~3일 뒤에 부산에는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들과 진짜 광복군을 태운 배가 도착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한 정정화(鄭靖和) 여사의 회고록 <장강일기>(長江日記)를 보면 가축수송선이나 진배없는 배에 돼지새끼 싣듯 마구잡이로 채워넣어 부산에 도착한 뒤 사흘을 부산 앞바다에서 대기해야 했다고 한다. 아무리 아우성쳐도 정작 배 문을 따주고 디딜 땅을 내줄 주인은 미군정이었기 때문이다. 사무치던 고국땅을 밟는 독립투사와 그 가족들에게 이 땅의 새로운 주인 미군들은 살충제 DDT 가루를 뿌려대고는 난민수용소에 집어넣었다. 새 정부 건설의 주역이 아닌 난민의 처지, 그리고 그 위에 뿌려진 DDT 가루는 임시정부의, 아니 우리 민족의 험난한 운명을 암시한다. 광복군이나 임시정부가 출세의 동아줄로 알고 모여든 모리배들은 DDT 세례에 그 흔적을 감추었다.

박정희가 귀국 뒤 임시정부나 광복군과 관계를 유지했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자인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박정희가 만주로 갈 때 그 행동을 몹시 못마땅해한 것처럼, 박정희가 낙후한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인 광복군에 가담한 것에 대해 그런 데는 뭐하러 갔느냐고 나무랐다. 다른 가족도 안정된 교사직을 버리고 출세한다고 만주로 갔다가 거지꼴로 돌아온 박정희에게 눈치를 주었다.

고향에서 눈칫밥을 먹던 박정희는 1946년 9월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박정희로서는 만주국, 일본에 이어 세 나라의 육군사관학교를 다니는 진기한 길에 들어선 것이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30살로 동기생 평균나이 22.3살보다 한참 위였다. 일본에서 바로 귀국해 조선경비대 초창기부터 참여한 일본육사 3년 후배인 오일균(吳一均)과 조병건(趙炳乾)은 나이도 박정희보다 8, 9살 아래였지만, 경비사관학교 생도대의 중대장으로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좌익으로 몰려 뒤에 숙군이 한창일 때 처형되었다. 박정희는 경비사관학교 2기를 1946년 12월14일 3등으로 졸업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2기생으로 입교한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 큰 사건이 일어났다. 대구를 중심으로 10월인민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구미지역에서의 봉기를 주도했다가 토벌대인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김종필의 장인이기도 한 박상희는 박정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것도 친일의 죄를 씻으라는 박상희의 권유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박정희가 박상희의 인도로 좌익에 가담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죽음이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이끈 것은 확실하다.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남로당 군사부 책임을 맡고 있던 이재복(李在福)은 박정희를 주목했다. 박정희도 형의 죽음을 듣고 고향에 가보니 이재복이 유족들을 돌봐주고 있었고, <공산당 선언> 등의 책자를 주며 남로당 입당을 권유했다고 체포된 뒤에 작성한 자술서에 썼다.

여순사건에서 검거됐다 살아난 이유

그러면 이재복 등 남로당 군사부 간부들은 왜 박정희를 주목했을까 당시 한국군의 주요 인맥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다. 그리고 비주류로 광복군 출신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만군과 일본군의 인맥에 두루 통할 뿐 아니라 광복군에도 한 자락 걸친 경력이 있었다. 동기생 가운데 나이가 많은 편인 박정희는 윗기수와 잘 연결됐으며, 동기생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고 개인적 능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재복과 같은 영남 출신이었다. 만주군 출신들이 대개 이북, 특히 함경도 출신인데 비해 경상도 출신의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부가 지역적인 연고가 없는 만주군 인맥에 파고들어가는 데 더없이 귀중한 존재였다. 박정희는 출신계급도 기본계급인 빈농이었을 뿐 아니라, 우익 경찰에게 가족을 잃은 ‘혁명열사 유가족’이 아닌가 이런 박정희에게 남로당 군사부가 주목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946년 10월이라면 비록 미군정의 탄압이 시작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좌익의 집권이 유력시되던 시점이었다. 만주군으로, 광복군으로 출세를 좇아가던 박정희에게 좌익의 손길은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남로당 군사부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남로당이 군부 안에 심어놓은 프락치의 총책이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군사부 총책 이재복과 직접 연결된 심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이 터지자 군부 안의 남로당 프락치 박정희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됐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서울로 복귀한 뒤인 1948년 11월11일에 체포되었다. 박정희를 체포한 사람은 한국 현대사에서 악명이 높은 김창룡(金昌龍)이었다.

박정희는 김창룡의 손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니, 김창룡은 백선엽 등과 함께 박정희의 신원 보증인이 돼주었다. 박정희가 살아남은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수사에 적극 협력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았다. 김창룡은 이미 이재복의 비서 김영식(金永植)을 체포해 군부 안 남로당 프락치의 명단을 상당히 확보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못 갖고 있는 차에 박정희의 증언으로 확증을 얻어 고구마 캐듯 좌익 세포를 줄줄이 캐낸 것이었다.

박정희는 일단 기소돼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이미 김창룡 등 숙군사업을 지휘한 사람들이나 원용덕·백선엽 등 박정희의 만군 선배들은 박정희를 살려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박정희가 좌익 명단을 죄다 불었고, 박정희를 데리고 다니며 각 부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했기 때문에 좌익들이 박정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 그 이유였다. 박정희의 육사 동기로 숙군에 직접 참여해 박정희를 수사한 김안일은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란 거세된 환관과 같아 풀어줘도 안심할 수 있다”고 회고했다.

좌익 콤플렉스와 악랄한 전향공작

박정희는 1949년 2월8일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과 파면 급료 몰수형을 선고받았는데, 죄목은 국방경비법 제16조 위반인 반란기도 혐의였다. 박정희가 처벌받은 실패한 반란기도는 12년 뒤인 1961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행해진 우익 군사반란으로 실현되었다. 불구속상태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박정희는 관할관 확인과정에서 10년으로 감형됨과 동시에 형 집행을 면제받는 파격적 대우를 받았고, 백선엽 등의 배려로 숙군을 지휘한 육군본부 정보국에 직제에도 없는 비공식문관으로 복직해 기밀비에서 월급을 받았으며, 한국전쟁이 터진 뒤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처럼 박정희는 우리 역사의 짧은 격동기에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박정희를 찬미하는 자들은 흔히 박정희를 용인술의 천재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왼팔·오른팔과 술을 마시다가 왼팔의 총에 맞아 오른팔과 함께 절명했다. 박정희를 변신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그의 변신은 양지를 추구하는 기회주의자가 열심히 양지에 들어서면 그곳이 바로 음지가 되어 또 다른 곳을 찾아가야 했던 것처럼 늘 막차를 탄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변신은 확실한 것이었지만, 좌익이란 꼬리표는 그를 괴롭혔다. 군사반란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박정희가 유독 좌익 사범을 혹독하게 대한 것이 그의 좌익 콤플렉스 때문이었다는 설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더구나 좌익의 입장에서 볼 때 악랄한 변절자인 그는 끝까지 공산주의 사상을 고집하는 비전향 장기수들에 대해서는 단순한 콤플렉스가 아니라 일제와 비교가 안 되는 잔악한 전향공작을 실시했다. 교사에서 황군으로, 황군에서 광복군으로, 광복군에서 남로당으로, 남로당에서 다시 우익으로 숨가쁘게 변신을 거듭해온 박정희는 늘 양지를 추구했다. 그 한 때문이었을까 실업팀 선수들을 가압적으로 차출한 준국가대표 축구팀마저 양지라고 이름 붙인 것은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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