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목차 지난호보기 독자마당 기사에대한의견

한겨레21 구독신청 sitemap

e-Book
표지이야기 특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과학 인터뷰 스포츠/건강 사진/만평 칼럼 독자마당
Home > 국제 > 아시아 네트워크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5년12월07일 제588호
통합검색  검색
타밀 호랑이, 동지를 엿먹이다

스리랑카 대통령 선거에서 극단적 민족주의자 라자팍세 현 총리가 뽑힌 사연
반군들이 보이콧만 안 했어도 유연한 좌파인 위크레마싱헤가 이길 수 있었는데…

▣ 콜롬보=수마두 위라와르네(Sumadhu Weerawarne) <아일랜드> 기자


스리랑카의 선거는 민주주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게 어찌됐든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최근 끝난 대선 결과는 선거의 이런 아이러니한 모습을 응축해 보여준다. 스리랑카에서 대통령은 한 전직 대통령의 말대로 남자를 여자로 혹은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 빼고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갖는다. 임기도 6년으로 긴 편이다.

11번의 선거에서 검증된 승리 공식

이번 선거는 싱할리 민족주의의 극단과 인종 문제에서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를 하는 좌파 사이에서 벌어졌다. 한쪽은 모순적인 문제에 대해 대충 말로 얼버무리는 게 특기인 현직 총리였고, 다른 쪽은 모순적인 문제를 그럴듯한 말로 통합하는 것을 거부한 대가로 11번의 선거에서 패배한 야당 지도자다. 야당 지도자는 강경한 자세로 스리랑카에서 인종·종교적으로 소수인 타밀족을 위해 싸우는 ‘타밀엘람해방호랑이반군’(th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이하 타밀 반군)과의 평화회담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라고 말했다.

마힌다 라자팍세 총리는 가난한 시골 마을인 위라케티야에서 태어났고, 수박 겉핥기식이긴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호소력 있게 말할 수 있는 친화력을 키워왔다. 그의 연합 세력은 야당 후보가 악마 같은 타밀 반군과 나라를 동강내는 협약을 맺었다고 주장하는 데 집중했다. 이는 지난 11번의 선거에서 효과를 발휘한 검증된 승리 공식이었다. 그들의 선거운동은 음모를 좋아하는 싱할리족에게 야당 후보가 타밀과 협약을 맺어 나라를 둘로 쪼개려 한다는 것을 알리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런 선거운동 방식은 그들이 실체적인 진실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선거운동원들에게 야단법석을 떨 수 있도록 만들었다. 라자팍세는 그의 선거 공약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의 충실한 추종자들이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야당 지도자 라닐 위크레마싱헤는 평화가 가져올 경제적인 번영에 대해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고용 창출과 발전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그의 선거운동에는 애국적인 열정과 흥청거림이 부족했다. 그는 다수를 차지하는 싱할리 주류의 ‘감성’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라자팍세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토론을 하도록 만드는 데 시간을 소비했다. 그러나 이는 실패했다. 라자파세 쪽이 관심을 가진 이슈는 나라가 쪼개질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11월18일 선거날은 충격 그 자체였다. 위크레마싱헤가 협약을 맺었다는 타밀 반군이 그를 엿먹였다. 그들은 타밀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섬의 북동부 지역 사람들이 선거를 보이콧하게 만들어 확실한 것으로 보였던 위크레마싱헤의 승리를 가로막았다. 이로써 라자팍세 쪽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났지만, 이미 선거는 시작된 뒤였다. 때는 너무 늦었다.


△ 승자와 패자를 가른 것은 동지의 배신이었다. 대통령 당선 뒤 기뻐하고 있는 라자팍세(왼쪽)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위크레마싱헤. (사진/ EPA)

18만 표차… 70만 타밀 투표율 1.5%

그래서 라자팍세는 나라가 인종·종교·지역적으로 둘로 나뉘었음이 확인된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인종·종교적으로 소수파가 많았던 지역에서는 대부분 위크레마싱헤가 승리했다. 둘의 표 차이는 겨우 18만 표에 불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70만 명의 타밀 유권자가 투표하지 않은 것이 싱할리 민족주의에 기대 선거를 한 라자팍세 쪽으로 선거를 유리하게 이끄는 역할을 했다. 북쪽 도시 자프나와 타밀 반군이 장악한 와니의 투표율은 각각 1.5%와 0%였다. 이에 견줘 대통령의 텃밭인 도시들에서는 타밀 반군과 그에 동조하는 사회단체들이 시작한 선거 보이콧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인종·종교적인 소수들의 지지를 조심스럽게 기대했던 위크레마싱헤는 승리를 빼앗기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이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북동부 지역의 타밀 유권자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었다. 상당한 수준의 위협과 폭력 탓에 유권자들은 자프나 반도와 타밀 반군이 통제하는 북동부 지역에서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

국제 감시기구 ‘자유롭고 올바른 선거를 위한 시민행동’(People’s Action for Free and Fair Elections)의 선거 보고서를 보면 “타밀과 가까운 단체들은 선거일이 아닌 ‘애도의 날’을 요구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들은 민주주의 절차가 작동되는 활력보다는 닫힌 사회의 불길한 평화를 얻었다”고 적었다. 보고서는 이어 “선거날 있었던 동부 지역에서의 광범위한 폭력은 ‘선거 보이콧은 없었다’는 타밀 반군의 주장이 잘못됐음을 보여줬다. 타밀 반군 점령 지역에서 유권자들을 태워오고자 떠난 버스와 페리호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억류됐다. 그리고 불타는 타이어와 다른 장애물들이 길을 가로막았다”고 증언했다.


△ 여당의 정치 공세는 거셌지만 개표 전만 해도 위크레마싱헤가 유리해 보였다. 라자팍세의 큰 사진이 걸린 거리. (사진/ EPA)

타밀 유권자들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분명 위크레마싱헤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그 지역에서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타밀 유권자들은 위크레마싱헤가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바란 것은 평화였다. 선거에 참여한 소수의 투표 성향도 그렇게 나타났다.

만약 위크레마싱헤가 선출됐다면, 그는 스리랑카의 모든 인종을 대표하는 진정한 민족 대통령이 됐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밀 반군이 그들의 웹사이트에 띄워놓은 성명에서 “국제사회가 싱할리 정부를 지지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두 배로 아이러니하다. 그들이 정권을 잡도록 도운 것은 타밀 반군 자신이다.

몇달 뒤 국회의원 선거를 기다릴 뿐

새로 뽑힌 라자팍세 대통령은 분명히 나라가 둘로 쪼개진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취임사에서 편견 없이 모든 스리랑카인을 위한 대통령으로 행동하겠다고 밝혔고, 타밀 반군을 포함해 모든 정당과 협상을 통해 평화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새 대통령의 앞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라자팍세 대통령은 그가 정책을 마음 놓고 시행하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 있는 두 개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첫째, 국회에서 안정적인 다수를 점하지 못했다. 그는 27개의 다양하고 서로 모순적인 정당들의 연립 위에 서 있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힘이 센 것은 싱할리 민족주의 단체다. 이는 그가 다른 군소정당과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싱할리 민족주의 연합세력들은 이런 선택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두 번째로 새 대통령은 타밀 반군이 장악한 북동부 지역을 놓고 다퉈야 한다. 지금까지 타밀 반군의 군사적인 장악은 휴전 협정이 정한 타밀 반군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으로 한정돼왔다. 이 협정으로 전쟁의 위협이 사라졌다. 그러나 총성이 멈춘 사이 타밀 반군은 북동부의 정부 장악 지역으로 들어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는 대선에서 타밀 반군의 보이콧 결정이 북동부 지역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지켜졌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타밀 반군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더 권위 있는 국제 감시로 평화를 진전시켜나가는 것뿐이다.

스리랑카가 민주주의 국가라면, 그것은 딱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이 나라에는 선거가 자주 있다. 지난 5년 동안 사람들은 세 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한 번의 대선을 겪었다. 선거가 자주 있다 보니 사람들이 선거에 권태로움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좋은 정당을 사랑한다. 새 대통령은 같은 당이 한 달 전에 내놓은 예산안을 버리고 새로운 예산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선거 운동 과정에서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몇 달 뒤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