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목차 지난호보기 독자마당 기사에대한의견

한겨레21 구독신청 sitemap

e-Book
표지이야기 특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과학 인터뷰 스포츠/건강 사진/만평 칼럼 독자마당
Home > 국제 > 아시아 네트워크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5년09월07일 제576호
통합검색  검색
물고문 훈련에 확 뒤집어지다

[병영대륙 아시아- 싱가포르]

싱가포르 젊은이들에게 충성을 맹세케 하고 강력한 정체성 키워줘온 징병제
군 당국, 충격적 사건 뒤 ‘군복무=감옥’이라는 정서 없애려 노골적 구애 중

▣ 싱가포르=유니스 라오(Eunice Lau) / 전 <스트레이츠타임스> 기자


징병제에 묶인 모든 싱가포르 젊은이들처럼,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던 칭나이윤(21)에게도 8월9일, 마침내 ‘그날’이 왔다.
“병영생활에 대해 온갖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사실은 대다수 싱가포르 남자들의 일생에 가장 극적인 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도 군인티를 물씬 풍기는 나이윤은 “싱가포르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이 공통적인 체험을 나눈 것”이라고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군 최고통수권자를 기쁘게 해줄 만한 이 ‘기특한’ 말은 싱가포르 젊은이들이 2년 동안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가상 동력’일 뿐 아니라, 싱가포르군(SAF)의 ‘비교적’ 성공적인 사회 접목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자, 싱가포르 거리를 한번 보자. 젊은이들이 군복을 입고 지하철을 타거나 음식점을 드나드는 광경이 싱가포르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색함이 없는 일상이 아니던가. 적어도 겉보기에는 군과 사회가 잘 어울린다.

입대자 둔 부모들에게 60쪽짜리 편지

오늘날 고도로 군사화된 싱가포르의 뿌리는 이른바 ‘포위의식’에서 비롯했다. 어느 날 갑자기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쫓겨나 나라를 세우게 된 싱가포르는 둘러보니 온통 ‘적’뿐이었던 모양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군국주의 군대에 쓴맛을 본데다, 말레이시아와 영국 식민군대가 으르렁거리는 틈새에서 다시 말레이공산당 분쟁과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충돌까지 겪으면서 ‘아기 나라’ 싱가포르는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싱가포르는 사방에서 포위당한 느낌을 받자 누구도 얕잡아볼 수 없는 강력한 군대를 꿈꾸며 모든 남자들을 군대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이어진 냉전기를 통해 지역 안보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싱가포르 정부 금고에 돈이 쌓여가자 당국은 국방을 더욱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싱가포르 군대는 최고 정치가들을 키워내는 ‘부화장’과 하이테크 무기 수출로 경제를 꾸려가는 ‘공장’ 노릇을 하면서 국가의 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장구한 역사를 지닌 단일민족- 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한국과 달리 ‘잡종 신생국’인 싱가포르 시민들은 정체성이 헷갈렸고, 따라서 애국심이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싱가포르의 노장 정치가들은 ‘만약 싱가포르가 다른 나라로부터 공격당한다면, 배고픔을 겪어보지 못한 세계화 세대 젊은이들이 모두 달아나버리지나 않을까?’ 깊은 고민을 해왔다.


△ 싱가포르 군인들의 작전훈련. 싱가포르는 지리적으로 포위당한 느낌을 받자 누구도 얕잡아볼 수 없는 강력한 군대를 꿈꾸며 결국 모든 남자들을 군대로 불러들였다. (사진/ 스트레이츠타임스)

그 결과, 징병제는 싱가포르 젊은이들에게 충성을 맹세토록 하면서 강력한 정체성을 키우고 사회를 통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요즘 싱가포르군은 정보화와 여행에 익숙한 신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독재정권 징병제의 유산인 ‘군복무=감옥’이라는 정서를 없애려 노력하고 있다. 이름하여 ‘시민의 군대’라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면서 사회의 신용과 지원을 얻고자 갖은 애를 쓰고 있다. 특히 군은 입대자를 둔 부모들에게 60쪽짜리 편지를 보내 “당신들 자녀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군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식으로 애정을 과시하는 모양이다.

실제로 군대가 신병훈련소로 가족을 초대하는 ‘부모방문일’에 나이윤을 면회 갔던 90년대 중반 군번인 그의 형은 신세대 병영의 변화를 믿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 형의 말에 따르면, 밝은 색깔을 칠한 신병훈련소는 휴가용 별장 같았고, 신병들은 개인 휴대전화를 들고 다녔고, 모퉁이마다 컴퓨터, 텔레비전, 오락기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조교는 신병들과 조화를 위해 협동경영 과정 수업을 듣는다고 전한다.

전우의 메신저로 사건의 전모 밝혀지다

돌이켜보면, 2003년 한 신병이 죽으면서 나라 전체가 충격을 받았을 때 군에 입대한 나이윤은 복받은 신병이었던 셈이다. 그 충격으로 ‘나이윤 세대’ 신병들은 대접받으며 병영생활을 했다고 하니. 그 충격이란, 당시 근위병 부대 신병이었던 후엔후아란 젊은이가 10일짜리 전투생존 훈련에서 가상 전쟁포로로 잡혀 물고문(물에 집어넣는)을 받은 끝에 죽은 사건이었다. 애초 국방부는 “후엔후아가 훈련 중 쓰러진 뒤 사망했다”고만 밝혔으나, 후엔후아와 함께 군복무를 한 친구가 메신저를 통해 온라인에 진실을 올려 싱가포르가 발칵 뒤집혔다. 국방부 조사 결과, 안전한 훈련을 위해 조교의 훈련병 신체접촉 금지를 무시한 그런 ‘물고문’이 1998년부터 이어져온 사실이 밝혀졌고, 테오치히언 국방장관은 의회에서 ‘비정상적 훈련’으로 신병이 사망했음을 인정했다. 놀란 시민들은 물고문 훈련을 즉각 중단하고 훈련병의 안전을 위한 모든 조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국방장관은 ‘싱가포르군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관련 조교 4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한 뒤 영창으로 보냈다.


△ 싱가포르 군인들의 모습은 한국의 군인들과 다를 게 없다. (사진/ 스트레이츠타임스)

그동안 싱가포르 병영에서 벌어진 이런 참사는 별로 새로운 일이 아니다. 경험 많은 고참 병장이 일상적인 구보에서 죽었고, 신참 훈련병은 탄약을 잘못 다뤄 죽어나갔다. 그런 일들은 ‘사고’였는지 ‘사건’이었는지 알 수도 없었지만, 아무튼 군대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증명해왔다. 군대도 그런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고, 병영에 아들을 보낸 부모들은 아들이 제대하는 날까지 그 위험을 받아들이며 가슴앓이해왔다.

그런 가운데 후엔후아의 죽음은 절대성만 강조해온 군복무 체계를 바꾸는 분수령이 되었다. 화난 시민사회는 싱가포르군에게 따져물었다. “당신들은 얼마나 철저하고 효과적인 사고 예방 대책을 마련했는가?” “당신들은 만약 다시 사고가 발생하면 얼마나 투명하게 조사하고 책임을 질 것인가?” “당신들은 어떤 개혁을 통해 불신감이 팽배한 우리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가?”

이에 국방장관은 “군이 그동안 저지른 실수를 비판적으로 점검한 뒤 시민들이 놀랄 만한 대안을 내놓겠다”고 나섰다. 물론 시민사회의 절대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군대의 절박성이 드러난 일이었지만, 사병 8명이 사망해 사회적 논란을 빚었던 1991년 사건들에 비하면 분명 싱가포르군이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본질적으로 해결됐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날 지역안보 문제나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크게 향상됐지만, 싱가포르는 여전히 지역에서 가장 ‘군사화’한 나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해 정부 예산의 25%를 웃도는 군사비를 지출하는 나라, 기껏 인구 400만명 남짓한 도시에 2만명이나 되는 프로페셔널 군인과 징병제로 끌어모은 5만5천명 사병에다 22만5천명의 예비군을 가진 나라가 군사대국 싱가포르의 정체다. 전체 인구에서 볼 때, 현역과 예비군을 포함하면 어림잡아 10%가 군인이라는 뜻이다. 놀랍지 않은가?


△ 빌딩숲 사이의 탱크 훈련이 이색적이기는 하다.

고비용 군사예산 계속 써야 하는가

어느 누구도 국방의 의무가 싱가포르의 존립을 훼손했다고 의문을 달지 않았지만, 만약 명백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국가가 고비용 군사예산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며 군사주의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을 달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위험한’ 의문에까지 이르게 된다. ‘애국심에 대한 충성 서약이 과연 징병제밖에는 달리 길이 없는가?’ ‘그렇다면 그 애국심 고양에서 싱가포르의 반인 여성은 왜 열외인가?’ 이제 정치가들과 ‘시민의 군대’는 그 의문들에 답해야 한다.

싱가포르 시민들은 국방의 의무 선상에서 숨져간 이들의 희생을 통해 오늘날 싱가포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바친 세금이 남을 공격하는 무기로 변하는 현실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어이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군대에 계속해서 아들을 바칠 부모는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