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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01월28일 제49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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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수로 “울고 싶어라”

미국의 총성 없는 전쟁에 공사 재개 불투명… 화해의 상징물에서 대립의 희생물로 전락

2002년 8월7일. 함경남도 신포 금호지구 경수로 건설현장에는 사방에서 뚝딱거리는 망치 소리가 들리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축포가 터지고, 참석자들의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북한에 건네주기로 한 경수로 본체공사 착공식(콘크리트 타설식)이 열리는 때였다. 외신들은 “금호지구에서의 경수로 본체 공사의 시작은 북한을 위험스러운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그동안의 노력이 진전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타전하기에 바빴다. 장 피에르 랭 유럽연합(EU) 집행이사는 “이번 행사는 단지 경수로 본체공사를 위한 콘크리트 타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관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경수로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보였다.


△ 누가 경수로 건설을 막고 있는가. 지난 2002년 8월7일 북한 금호지구 경수로 착공식에서 본체에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타설식이 열렸다.(AP연합)

경수로 축포는 미국의 치욕이었다

하지만 이런 축제 장면을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보는 이들이 있었다. 워싱턴 부시 행정부 내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경수로 제공을 초강대국인 미국의 치욕으로 간주했다. 북한의 ‘핵 공갈’에 굴복한 상징물이 경수로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경수로가 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북한에 절대 건네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온 터였다. 따라서 이들의 눈에 경수로 몸체가 서서히 모양을 갖추면서 터지는 축포가 곱게 비칠 리 없었다. 낙담하던 터에 이들이 무릎을 칠 만한 반가운 소식이 착공식의 축제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전인 10월 초 평양에서 들려왔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 일행이 북한을 방문해 우라늄 비밀 핵프로그램의 시인을 받아냈다고 알려온 것이다. 이후 경수로 공사는 속도가 점차 떨어지더니, 마침내 2003년 12월1일 네오콘의 오랜 소망대로 완전히 멈췄다.

“금호지구 경수로 공사현장은 적막감이 감돌고, 쓸쓸해 보였다.” 설을 앞두고 남쪽 근로자를 위로하기 위해 현지를 다녀온 장선섭 경수로기획단장은 2차 핵 위기가 불거지지 직전 1500여명에 달하던 근로자가 지금은 대부분 철수하고 남쪽 근로자 250여명만 남아 있다고 전했다. 이들 가운데서도 현장 기자재 보존·관리 등에 필요한 100명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1월 말까지 남쪽으로 돌아온다. 한국은 이미 10억달러 넘게 돈을 쏟아부은 터다.

사실 북한 못지않게 한국 정부도 경수로에 애착을 보였다. 장 단장은 “경수로 사업은 남북 경제협력 사업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에게 이런 목소리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미국쪽 대표들은 비공식 간담회에서 “이 사업을 더는 끌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중단하는 게 돈을 절약하는 길”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경수로 공사현장의 망치 소리는 언제쯤 다시 듣게 될까. 일단 형식적으로 경수로 공사는 1년간 잠정 중단된 상태다. 올 11월 말 전에 북핵 문제에 진전이 있으면 다시 관련국들이 만나 재개 여부를 결정하게 돼 있다. 한국 정부는 북핵 문제 해결에 조금이라도 밝은 전망이 보이면 계속 추진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미국, 일본, 유럽연합 가운데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사업 재개는 불가능하다. 경수로 사업 재개와 같은 주요 사안은 이들 나라가 이사로 참여하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동의 있어야만 사업 재개 가능

한국이 ‘이만하면 북핵 해결이 진전되었다’고 평가해도, 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은 재개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네오콘들은 북한이 검증 가능하고 되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핵을 완전히 폐기할 때에만 이를 핵 문제의 진전으로 간주하겠다는 자세다. 이는 네오콘 스스로 인정한 대로 북한 지도부가 주권을 미국에 온전히 맡기면서 정권 연장을 구걸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흉물처럼 덩그러니 내버려진 경수로 공사현장은 북-미간 총성 없는 전쟁이 얼마나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