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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로 ] 2003년07월30일 제470호 

최후의 카드, 체제보장

북한이 불가침협정만 조건으로 내걸자 미국도 긍정적 검토…북핵 협상의 새로운 돌파구 열리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불가침만 보장해달라.”

핵문제와 관련해 북한 입장이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최근 평양을 다녀온 한 정보 소식통은 북한 지도부의 달라진 대미 협상 자세를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정권교체하겠다느니, 핵 선제공격하겠다느니 위협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놓아달라. 가만히 놔두면 우리도 (미국에) 어떤 위협도, 피해도 안 끼치겠다.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다. 경수로를 안 지어줘도 괜찮고, 중유를 제공 안 해도 상관없다. 신뢰할 만한 체제보장만 해주면 된다. 하지만 미국이 성의를 보이지 않을 때는 우리도 그냥 무작정 앉아서 기다리진 않겠다.”

“북한은 더는 고립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7월14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방문한 다이빙궈 외교부 부부장과 회담하고 있다.(AFP)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북한이 이제 체제보장만을 북핵 포기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식통의 말에 따르면 북한은 경수로와 중유 제공 등을 포함한 제네바 기본합의 체제로의 복귀와 전면적 경제제재 해제라는 기존 요구를 철회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소식통은 또 북한의 체제보장 요구를 달리 표현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체면을 살려주면 핵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얘기라고 해석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망 뒤 김 위원장의 최대 치적으로 클린턴 행정부와의 벼랑 끝 대치를 통해 체제안정과 경제적 실리를 확보한 점을 꼽아왔다. 이는 김 위원장의 리더십을 상징하는 ‘선군정치’의 최대 업적으로 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됐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가 등장해 기존 합의들을 뿌리째 흔들어놓고, 김 위원장을 대화 상대로조차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김 위원장의 체면은 적지 않게 구겨졌다. 따라서 북한 지도부로서는 대미 관계 개선이 대외적 위협뿐 아니라 국내 정치적 불안정 요인을 제거하는 데도 유용하다.

“북한은 더는 자신들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기를 원치 않으며, 더구나 국제사회의 천덕꾸러기로 눈총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미국으로부터 군사·안보적 위협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국제사회와 경제교류협력을 펼치며, 정상적 거래를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고 인민들을 잘 먹여살리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 미국이 ‘악의 축’이니 ‘테러지원국가 혹은 불량국가’라는 오명을 벗겨준다면 핵을 굳이 만들 필요도 없으며, 오직 경제 재건에만 모든 힘을 쏟겠다.” 앞의 정보 소식통이 귀띔해준 북한 지도부의 요즘 생각이다. 또 미국과의 적대관계만 해소되면 남한을 비롯한 다른 서방 국가들로부터 투자나 각종 차관이 유입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게 소식통의 전언이다.

물론 북한의 이런 태도 변화의 배경에는 이유가 있다. 북한 지도부는 부시 행정부가 양자회담을 거부하고 다자회담을 끝까지 고수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다자간 공조체제를 통한 대북 고립·봉쇄 전략의 추진과 더불어 북한 핵 개발 포기에 따른 보상의 다자간 분담을 겨냥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 핵심 인사들은 과거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협상 때마다 유인책을 제공해 문제를 해결한 방식에 큰 반감을 품어왔다. 그래서 이들은 북한에 합의 혹은 의무 이행의 조건으로 어떤 유인책도 제공하지 않겠다는 걸 공개적으로 천명해왔다.

대북 협상파의 손을 들어준 부시


사진/ 7월18일 미국을 방문한 중국 다이빙궈 외교부 부부장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악수하고 있다.(AFP)


사실 북한은 클린턴 행정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핵과 미사일 등을 수단으로 내세워 대북 경제제재 완화조처를 비롯해 수십만t에 이르는 식량지원을 제공받는 등 톡톡한 재미를 봤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 인사들과의 비공식 접촉에서도 체제안전의 보루로 여기는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상당한 규모의 경제적 보상을 요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지도부로서는 오랜 세월 적지 않은 비용을 투자한 핵개발 프로그램을 일방적으로 거저 버릴 수는 없었을 터이다. 또 일방적 양보는 군부 등 강경파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랬던 북한 지도부가 몇 발짝이나 물러서 이제 체제안전을 위한 불가침 보장이라는 선에서 최종 협상안을 미국에 던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미국에 대한 경제적 보상 요구가 북한 정권교체를 최종 목표로 삼으면서 어떤 유인책도 대가로 제공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여온 부시 행정부의 신보수주의자들에게 먹혀들 리 없다는 현실적 판단도 한몫한 듯하다.

북한 지도부의 입장은 7월1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중국의 다이빙궈 외교부 부부장을 통해 7월18일 부시 행정부에 전달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도 북한 지도부의 좀더 유연해진 입장을 환영하고, 적어도 국무부 차원에서는 북한이 줄곧 요구해온 대북 불가침 약속을 다자회담을 통해 구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외교부 등 관련 당국자들의 말을 모아보면 북한이 핵 포기를 선언할 경우 부시 행정부의 책임 있는 고위 당국자가 양자회담에서 구두 형식으로 불가침 약속을 하고, 곧바로 이어질 다자회담에서 북한이 요구해온 문서 형태로 다국간 체제안전 보장을 제공할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인다. 이는 그간 북-미 화해의 최대 걸림돌로 존재해온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해주면서 북한 지도부도 설득할 수 있는 절묘한 중재안으로 관련 당사국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미국 내 일부 강경파들은 여전히 북한이 먼저 핵개발 프로그램을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형태로든 대북 체제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나 부시 대통령은 국무부 등 대북 협상파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7월24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다자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한 데서도 확인된다. 노 대통령도 7월27일 미국 과의 특별회견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과의 불가침협정과 관련해 “우리가 이런 특정한 형태의 불가침 보장을 해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일단 우리가 다자간 틀에서 포괄적인 대화를 시작하면 북한은 안전보장을 얻을 다른 방안들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한-미간 대북 체제안전 보장 방식에 대해 이미 합의가 이뤄졌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일각에서는 다자회담에서 남북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보장하는 방식으로 대북 불가침과 체제안전 보장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하지만 이는 남북한간 특히 군사 분야에서의 군축 등 신뢰구축이 선행되어야 하는 만큼 설익은 기대라는 견해들도 적지 않다.

체제보장과 핵 포기 동시선언 가능하나


사진/ 7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고문회의 오찬. 노 대통령은 미국 과의 회견에서 한-미간 대북 체제안전 보장 방식에 대해 이미 합의가 이뤄졌음을 강하게 시사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은 다자회담 이전에 미국과의 양자회담 혹은 중국이 참여한 3자회담에서 미국의 대북 불가침 의도만 확인되면 다자회담에 나가 미국의 안보 우려를 해소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는 부시 행정부도 잘 알고 있다. 얼핏 보면 북-미간 대타협의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걸림돌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다. 즉, 북한과 미국이 체제보장과 핵 포기를 ‘동시에’ 선언하고 실천할 수 있느냐가 대타협 성사의 관건이다. 미국과 북한 내 강경파들은 서로 상대방이 먼저 신뢰할 수 있게끔 행동으로 보여달라며 한치도 양보 없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북한은) 작은 나라로서 먼저 안전을 담보받는 게 중요하다. 그 다음 미국의 안보상 문제를 해결하겠다. 먼저 무장해제하지는 않겠다”는 게 최근 뉴욕의 외교 소식통이 전한 북한 입장이다. 하지만 북한은 적어도 핵문제는 동시이행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7월21일 미국은 불가침을 약속하고, 북한은 미국의 핵 우려를 해소하는 ‘동시행동 조처’로 핵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공은 북한이 아닌 부시 행정부에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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