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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정치 > 정치2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3월13일 제7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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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승의 난, 국민의 난으로 이어질까

‘7인 외인부대’의 단합된 호흡이 이뤄낸 성과, 국민의 ‘참여’를 다양하게 복원하는 것이 과제

▣ 이태희 기자hermes@hani.co.kr

“이제 ‘3월5일’은 한국 정치에서 새로운 장이 열린 날로 기억될 수 있을 듯하다.” 통합민주당의 한 당직자의 평이다. 2008년의 이날은 박재승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이 주도한 ‘박재승의 난’이 봉기에 성공한 날이다. 박재승 위원장은 이날 ‘법원에 의해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원천적으로 공천을 배제한다’는 원칙을 관철했다. 한나라당이 먼저 마련한 원칙이기는 했지만, 통합민주당에서 더 빛이 났다. 이 원칙에 따라 제18대 총선의 공천에서 배제된 정치인 11명의 무게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김홍업 의원,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안희정씨), 정동영 전 대통령 후보(이용희 전 국회 부의장)뿐만 아니라 현직인 손학규 당대표(신계륜 사무총장, 설훈 전 의원)의 측근까지 ‘예외 없이’ 탈락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계파 배분의 구태’에서 탈출한 것이다.


△ 저 손가락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 박재승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맨 오른쪽)이 3월4일 영등포구 당산동 당사에서 열린 공천심사위원회에서 ‘부정·비리 전력자 전원 배제’라는 원칙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계파 배분의 구태에서 탈출하다

이번 ‘정변’은 표면적으로는 박재승이라는 뚝심 좋은 개인의 성취로 보인다. 실제로는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위촉된 ‘7인의 외인부대’의 단합된 호흡이 이뤄낸 성과다.

모든 쿠데타에선 반란군과 진압군이 방송사를 두고 전면전을 벌이듯, 통합민주당 내부에서도 일촉즉발의 순간은 있었다. 정점은 3월4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당사에서 열린 통합민주당 최고위원회였다. ‘정치도 모르는 공천심사위원들이 당을 망치고 있다’는 식으로 시작된 일부 최고위원들의 비난은 “당을 살리기 위해서는 공천심사위원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날은 손학규 당대표도 ‘박재승 공천위원장 교체’라는 카드까지 들고 고심하는 분위기였다. 손 대표가 통합민주당의 중량급 인사에게 박재승 위원장을 대신할 수 있는 인사들을 주변에서 물색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을 접한 유인태 의원은 박재승 위원장과 평소 교분이 많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세웅 신부를 찾아가 “파국은 막아야 하니 박 위원장을 좀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천심사위원들도 이런 분위기를 모를 수는 없었다. 외부 인사 출신의 한 공천심사위원은 “최고위원회에서 일부 공천심사위원들을 교체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며 “그러나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 외부 출신 공천심사위원들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말했다. 결과는 외부 출신 공천심사위원들의 승리였다.

통합민주당 지도부는 경악했다. 쇄신파에 속하는 통합민주당의 한 현역 의원은 “박재승 위원장이 주도한 공천 혁명 결과 수도권의 일부 의원들과 이른바 ‘386’ 출신들의 지지로 불안하게 유지돼왔던 손학규 체제의 근간이 무너져내렸다”고 평했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총선에서의 생존’을 목표로 다시 통합된 민주당은 이념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지향점이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잡탕’ 상태였던 것이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박재승의 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 손학규 대표를 비롯한 통합민주당 지도부의 총선 전략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던 점도 한몫을 했다. 통합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지도부에서 공천심사위원장을 발탁하기 전후에 다가올 선거의 성격을 명확하게 정의했어야 한다”며 “선거의 성격이 정해지면 공천심사위원회가 공천에서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데, 당 지도부는 성격 규정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박재승을 중심으로 한 외인부대들의 활약으로 통합민주당은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다. 경기 지역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한 통합민주당 의원은 “솔직히 이제는 힘이 난다”며 “어제(3월5일)부터 악수하는 유권자들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활짝 웃었다. 7일 당산동 통합민주당사에는 ‘박재승 위원장 화이팅’이라고 적힌 케이크 상자와 음료수 상자 등 ‘성품’이 답지하고 있다. 지지자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박재승의 난은 일단 대중 봉기에는 성공한 셈이다.


지도부 전략이 세워지지 않았기에…

외부의 압력으로 이뤄지는 정치권의 ‘물갈이식’ 공천은 장기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자생력을 떨어뜨리는 상황을 빚을 수 있다는 문제는 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이를 ‘박재승 딜레마’라고 표현했다. 정치혐오증에 빠졌던 유권자들이 다시 정치에 대해 관심과 희망을 가지도록 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치적 발전 과정에서는 후퇴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당원과 지지자들이 참여한 경선에서 정당의 후보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2004년 열린우리당의 주도로 총선까지 도입됐던 국민·당원 참여 경선은, 이번 총선에서는 상당수 사라졌다. 강원택 교수는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총선까지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공정한 경선을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해서 나온 결론이지만, 당원과 지자자들의 참여가 제한된다는 것은 분명하다”며 “또한 박재승 위원장과 같은 외부 인사가 모든 공천을 결정하는 것은, 당의 정체성을 위해서도 좋은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정당은 자신들의 이념과 지향을 구현할 수 있는 후보를 발탁할 ‘지명권’(노미네이션)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정당들은 지속적으로 이런 권리를 외부에 위임해왔다. 그 결과 당 스스로가 후보를 지명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손학규·박상천 두 공동 대표는 지난 1월25일 박재승 위원장에게 공천심사위원 위촉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이번 공천을 통해 3대 원칙(쇄신공천, 국민공천, 미래공천)과 5대 기준(정체성, 기여도, 의정활동 능력, 도덕성, 당선 가능성) 그리고 3무 공천(기득권 배제, 계파 안배 배제, 청탁 배제)을 실현해달라”고 요청했다. 박 위원장은 당시 “제가 순진하다”며 “대표가 말씀하신 철학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겠다”고 되받았다. 박 위원장은 이러한 요청을 100% 철저히 수행한 셈이다. 손학규·박상천 대표는 결국 이런 결과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구태’의 이미지만 연출했다.

손학규 당대표 체제에서 개혁이 후퇴하고 있다는 징후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비례대표 재선 금지’ 조항이 슬그머니 당헌·당규에서 사라진 것이다. 옛 대통합민주신당과 옛 민주당은 지난 1월 중순 통합 과정에서 당헌·당규를 손질하면서 이 조항을 뺐다. 통합민주당 관계자는 “이 조항은 열린우리당 시절부터 당헌에 있었는데, 당규로 옮겨졌다가 이번 당헌·당규 개정 과정에서 삭제됐다”며 “여기에는 당 지도부의 판단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통합민주당 내부에서는 당 지도부가 영남 지역 개척을 위해 영남 출신의 비례대표 일부에게 ‘재선’이라는 선물을 줄 것이란 소문이 돈다. 영남 출신의 17대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은 부산 출신의 윤원호 의원과 경북 출신의 박찬석 의원이 있다.

탄핵 저지로 무산됐던 누리꾼 추천제


△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의 결정으로 공천에서 탈락한 설훈 전의원이 3월6일 박재승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당사 심사위원장실에서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손학규 대표가 이런 오명을 씻을 수 있는 기회는 비례대표 공천이다. 통합민주당은 3월 하순까지 비례대표 공천을 마감할 예정이다. 박재승 위원장이 비례대표후보자추천심사위원장까지 겸하고 있어 이 영역에서도 공천 혁명은 이미 예고되고 있다. 최재천 통합민주당 의원(서울 성동갑)은 “1단계가 ‘비우는’ 혁명이었다면, 2단계는 ‘채우는’ 혁명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손 대표가 먼저 ‘개혁 공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인재영입위원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학규 대표는 당헌에 따라서 당선 가능한 비례대표 의원의 30% 범위 내에서 전략공천을 할 수 있다. 당 일부에서는 구체적으로 유종일 교수(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나 전성인(홍익대), 김상조(한성대) 교수 등 이른바 ‘정운찬 사단’을 영입대상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통합민주당의 한 현역 의원은 “유종일 교수와 전성인 교수를 접촉해본 결과 정치 참여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상태”라며 “당에서 먼저 공식적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 ‘참여’를 다양하게 복원하는 것도 과제다. 통합민주당 일부에서는 지난해 대통합민주신당 당시 도입돼 주목을 끌었던 모바일 투표 등을 통해 누리꾼 추천 비례대표를 뽑자는 말이 나온다. 손학규 당대표도 총선 경선에서 “모바일 경선을 도입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2002년 17대 총선 당시 옛 열린우리당과 옛 민주당은 비례대표 누리꾼 추천을 추진한 적이 있다. 옛 민주당에서는 여성 1명, 남성 1명을 누리꾼 추천으로 뽑는다는 방침을 정하고 누리꾼들의 공모를 받았다. 옛 열린우리당에서는 여성 2명, 남성 2명을 누리꾼 추천으로 뽑자는 원칙을 세우고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발생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사이버 공간의 모든 관심이 ‘탄핵 저지’로 쏠리면서 이 실험은 무산됐다. 2008년에 이를 되살리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