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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너리티 ] 2002년06월20일 제414호 

"연금통장을 찢어버렸다"

소송 끝에 국가유공자 인정받은 베트남전 상이군인 김정야·최종무씨가 열패감에 빠진 이유


사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어렵게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은 김정야(왼쪽). 최종우씨. 그러나 이들의 소외감은 그 뒤로도 계속되고 있다.


국가유공자인 김정야(59·광주시 남구 월산4동)씨에게도 6월은 보훈의 달이다. 그의 저축예금통장에는 다달이 국가보훈처에서 지급하는 돈이 입금돼 쌓인다. 하지만 그는 아직 한번도 그 통장에서 돈을 찾아본 적이 없다.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상이군인이다. 그런 그가 지난해 가을 ‘참전용사증서’를 청와대에 반납했다. 참전용사증서는 청와대에서 국가보훈처를 거쳐 그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지금 그가 참전용사증서를 다시 손에 쥔 것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지나지 않는다.

통하지 않은 ‘인우보증’

김씨는 1965년 9월 청룡부대 소속 해병대원 소총수로 베트남전에 투입됐다. 베트남에 파견된 지 채 한달이 지나지 않은 같은 해 10월13일 캄란지역에서 기지보호 작전을 벌이다 오른쪽 목과 어깨 사이로 총알이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다. 기지를 구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부대에는 중상환자를 치료할 마땅한 시설이 없었다. 의무대에서 응급조치를 받은 김씨는 곧바로 미 육군 8야전병원으로 후송됐다. 그곳에서 45일 동안 치료를 받은 뒤 원대복귀해 이듬해 8월까지 근무한 뒤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젊어서 군대에 불려가 낯선 타국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까지 치렀지만, 김씨는 국가에 뭐라 내세울 만한 대단한 공을 세웠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생계에 매달려 살아가던 그에게 8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른쪽 어깨를 돌릴 수 없었고, 팔에 힘이 빠지는 증세도 생겼다. 병치레는 길었으나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지금은 다리마비 증세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통이 국가와의 어떤 관계에서 생겨났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김씨는 2000년 5월 광주지방보훈청에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냈다. 그러나 신청만 하면 바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국가유공자 자격은 뜻밖에도 거부되었다. 그의 부상이 전투 도중에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병상일지 따위가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전우들이 인우보증을 섰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해병 소장으로 전역한 당시 중대장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별이 달린 계급장도 병상일지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었다. 총알 자국은 선명했으나, 그의 부상 부위가 총알이 관통해 생긴 것이라는 전문의의 진단서조차 결정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김씨는 2000년 10월 국가를 상대로 행정심판을 냈다. 하지만 상급기관인 국가보훈처도 그의 청구를 기각했다. 그는 다시 2001년 3월 광주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냈다. 변호사의 도움 없이 어렵게 소송을 이끌어갔다. 그의 재판은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아내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발견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병원에서 치료받은 한국 해병대원의 진료기록이 한국군에 인계되지 않았고, 1968년 해병대 기록보관소에 불이 나 해병대원들의 베트남 파견기록 가운데 상당수가 소실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객관적 자료 없음’이라는 전가의 보도


사진/ 서울보훈병원에서 상이등급 판정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상이군인의 예우는 인권과 정의의 문제다.


국가보훈처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웠던 ‘객관적 자료 없음’의 실체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음’이 아니라 ‘현재 남아 있지 않음’이었다. 그 책임은 김씨가 아닌 국가 자신이 마땅히 져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국가는 한사코 그에게 입증을 요구했다. 국가는 처음부터 입증이 불가능한 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했고, 입증자료가 사라진 사실조차 알리지 않음으로써, 그가 입증할 수 없는 까닭을 입증할 수 없게 했다. 2001년 7월 재판은 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가까스로 그는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김씨와 비슷한 시기 또 한 사람의 참전군인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최종무(54)씨는 1968년 해병대 하사관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다낭 부근 주둔부대에서 본부중대 보급반 소속으로 일하던 그는 이듬해 9월 보급창고에서 포탄 공격을 받았다. 함께 있던 사병 한 사람이 현장에서 숨졌고, 그는 왼쪽 이마에 관통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입원한 지 2주 만에 의식을 되찾았지만, 폭발음에 의한 고막파열로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석달 넘게 입원치료를 받은 뒤에야 그는 퇴원할 수 있었다.

최씨의 청각기능은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그해 12월 귀국한 그는 심한 청각장애에 시달리면서도 군복무를 계속하다 1971년 만기전역했다. “귀가 잘 안 들린다는 사실을 감추고 직장생활을 했다.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직장생활은 외롭고 고달팠다.” 한방치료와 민간요법 치료를 계속 받았지만, 최씨의 청각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나빠졌다. 그리고 2000년 5월 청각장애 3급 장애인으로 등록한 뒤, 그해 9월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다.

그가 길고도 힘든 병치레를 해오면서도 늘그막에야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한 사연은 이 사회에서 상이군인들이 겪어야 하는 마음고생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사실 상이군인은 손에 갈고리 달고 다니며 앵벌이나 하는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 않은가. 젊어서 몸에 힘이 있을 때는 아픈 것 감추고 사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상이군인에 대한 이 사회의 냉대는 그에게 전쟁에서 온전히 몸을 보전하지 못한 책임을 두고두고 추궁하는 것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국가에 대한 개인의 희생은 망각된 채.

어렵게 낸 국가유공자 인정 신청이었지만, 국가는 김씨와 똑같은 이유로 최씨에게도 기각 결정을 내렸다. 최씨는 한국군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는데도,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는 비싼 무기도 모두 불태워버리고 올 때였다. 관련 기록이 지금 제대로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는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급히 철군하면서 관련 기록을 챙겨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최씨는 추정했다. 보급창고 안에 같이 있었던 사병이 현장에서 숨진 사실과 현장을 목격한 부대원들의 인우보증도 ‘객관적 자료 없음’이라는 국가의 ‘주관적’ 편의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최씨도 행정소송을 제기해서야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상이등급 7급의 설움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김씨와 최씨는 이제 국가유공자다. 그러나 국가유공자가 된 뒤 그들은 오히려 전보다 심한 소외감과 열패감에 빠져 있다. 김씨는 신체검사를 거쳐 상이등급 7급 판정을 받았다. 한달에 그의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은 기본연금과 전상수당 등을 모두 합쳐봐야 18만원이다. 김대중 정부는 6급까지만 있던 상이등급에서 새로 7급을 추가해 국가유공자 해당범위를 크게 넓혔지만, 1∼6급이 기본연금을 53만5천원씩 똑같이 받는 것에 비해 7급은 겨우 16만1천원을 받는다. 그나마 올해 전상수당이 1천원 올랐다.

“전상수당 1천원을 올려주겠다고 대통령이 국무위원 수십명을 앞에 앉혀두고 망치를 두르렸을 것을 생각하면 쓴 웃음밖에 안 나온다. 국가유공자랍시고 그 돈을 받는다면 내 손이 너무 부끄러울 것 같다.” 김씨가 연금통장을 아예 없애버리고 참전용사증을 청와대에 반납했던 이유다. 그는 병원에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겪은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우울해진다. “6·25 때 팔다리를 잃고 유공자 인정을 받으려는 나이 많은 상이군인들이 의자도 없는 대기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최씨도 신체검사를 받으러 간 자리에서 어이없는 일을 당했다. “의사가 ‘기준에 못 미치니 2년 뒤에 다시 받으라’고 하더라. 기가 막혔다. 종합병원에서 받은 정밀검사에서 6급에 해당하는 판정을 받았는데 기준 미달이라니. 심하게 따지자 의사가 내 무릎을 잡고 ‘잘해주겠다’며 6급 판정을 내렸다. 국가유공자 등급이 무슨 흥정의 대상인가.” 그는 즉각 불복신청을 냈다. “내 상태로 봐서 다시 정밀검사를 하면 청각기능이 더 나쁘게 나올 것 같아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병원의 태도를 참아 넘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 2월부터 다시 국가와 싸움을 시작했다. 1∼6급은 동일한 연금 급여를 7급에게만 달리 적용하고 있고, 다른 등급에서는 2개항 이상에서 각각 받은 판정을 합산하는데 7급만 유독 합산해주지 않고 있다는 이유 등으로 헌법소원을 내 현재 심리가 진행 중이다. 얼마 전에는 국가보훈처에 공상 유공자 자료 정보공개청구를 요청했다. 상이등급 7급이 생기면서 6급 이상 판정을 받아야 할 유공자 상당수가 7급 판정을 받고 있다는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오랜 세월 군부독재를 거치며 상무정신을 떠받들어온 나라에서 상이군인들이 푸대접을 받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힘있는 자들은 군대에 가지 않는 희한한 전국민 징병제가 낳은 왜곡된 현상이 아닐까? “지금도 종종 우리의 어린 아들들이 군대에 불려가 숨지거나 다친다. 손가락 두개가 잘리면 7급 판정을 받지만, 그 상태로는 결혼도 할 수 없고 사회생활도 할 수 없다.” 박씨는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에게 상이군인 문제는 더 이상 예우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것은 인권의 문제이자 사회정의의 문제고, 최소한 사회복지의 문제였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싸웠고, 충분히 고통받았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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