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표지이야기

특집

특집2

기획

이슈추적

성역깨기

마이너리티

기자가뛰어든세상

정치

통일로

경제

2%경제학

특별기고

특별대담

인터뷰

움직이는세계

아시아네트워크

사람이야기

사람과사회

학교!

문화

여행

패션

과학

건강

스포츠

캠페인

보도그뒤




[ 마이너리티 ] 2002년02월05일 제396호 

극장 간판에 그림은 없다

실크스크린 사진에 밀려난 간판화가들… 마지막 ‘장이’ 남기고 풍경화가로 전업


사진/ 40년 동안 서울시내 극장간판을 그려온 최광식시. 그는 그림간판이 밀려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여덟평 남짓한 공간. 한쪽 벽을 그득히 메운 베니어합판 위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얼굴이 손님을 맞는다. 그의 얼굴에서 폴폴 배어나오는 유성페인트 냄새가 방 안 가득히 진동한다. 웅크리고 앉아 큼지막한 붓으로 아직 생기다 만 슈워제네거의 턱부분에 갈색수염을 그리고 있던 최광식(59)씨가 일어났다. 허름한 점퍼와 바지, 구두에 유성페인트를 방울방울 드리운 최씨는 20년 동안 성남극장(서울시 용산구)의 간판을 그려온 간판화가다. 성남극장에 미술부장으로 오기 전에도 20년 가까이 서울극장, 대한극장, 단성사 등 서울 시내의 주요 극장을 대부분 섭렵했으니 올해로 그의 경력은 40년을 바라본다.

한때는 국전 화가가 부럽지 않았는데…

“화가는 뭔 화가요, 뺑끼칠쟁이지.” 기자가 일컫는 자신의 직함에 쑥스러워하면서도 그는 덧붙인다. “그래도 한창때는 국전에 나오는 화가들이 부럽지 않았지.” 80년대 초만 해도 그는 6∼7명의 문하생을 거느리며 여러 개 극장의 간판을 책임지던, 잘 나가는 간판화가였다. 아홉개 극장에 동시에 그렸던 <뽕>은, 나중에는 스틸사진 없이도 척척 그려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간판그림을 배우겠다고 극장에 찾아오던 젊은 사람들도 사라지고 그는 갓 빼온 자판기 커피가 10분이면 냉커피로 변하는 차가운 골방에서 혼자 간판을 그린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무척 좋아했거든. 대학 갈 형편은 안 되고 그림은 그리고 싶고. 그때 가난한 화가 지망생들은 모두 극장으로 갔어요. 그림도 그리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최씨는 ‘금방 기술’을 배우라는 부모의 바람을 뿌리치고 열여덟살 때 임화수가 경영하던 평화극장에 ‘시다’로 취직했다. 1년 넘게 깡통만 닦으면서 붓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고 어깨 너머로 선배의 붓놀림을 보며 그림을 배우다가 서울 마포의 경보극장에서 <숙영낭자전>으로 입봉했다. 영화가 온 국민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60년대엔 간판화가도 인기직업이라 주요 개봉관에 진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한극장은 공채 시험을 보기도 했다. 최씨는, 각처에서 온 수십명의 경쟁자들을 누르고 이 극장에 들어가 그린 <벤허>의 대형간판 아래서 꼬리를 잇고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며 간판을 올려보던 관객을 잊지 못한다.

“지금이야 사장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지만 그때는 누구도 그림에 대해서 밤 놔라, 대추 놔라 할 수 없었어요. 그림 좀 그리는 사람들은 다 자기 개성대로 그렸지. 경쟁심도 대단했고.” 스타급 화가들이 탄생하고, 실력있는 화가들이 서로 기량을 자랑할 때는 간판그림에도 유파가 있었다. 이른바 보카시파와 터치파가 그것. 보카시파는 사진과 흡사하게 포스터를 모사하는 방식이고 터치파는 붓터치가 드러나는 것으로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화가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이야 다들 사진을 좋아하지만 그때 보카시 그림은 별로 평가를 못 받았어. 얄팍하니까. 터치그림 잘하는 선배나 동료가 간판 새로 올리면 다들 극장 앞에 가서 한참 보고 와 따라하고 연구하고 그랬지.”

전봇대나 가게 벽에 붙이는 작은 포스터말고는 극장 간판에 영화홍보를 전적으로 의존하던 때라 인기배우들도 간판화가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제목은 까무룩한데 서영춘씨하고 트위스트 김이 나오는 영화를 그릴 때 였어요. 어느날 트위스트 김이 미술부에 찾아오더니 주머니에 봉투를 쓱 넣어주면서 얼굴 좀 크게 그려달라고 하더라고. 악역으로 인기있던 허장강씨는 극장에 들를 때마다 미술부 직원들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마시면서 친하게 지냈지.”

복합상영관 들어서면서 일자리 잃어


사진/ 서울시내 중심가의 복합관 가운데 유일하게 그림간판을 고집하고 있는 신촌 그랜드 시네마.


간판의 얼굴크기 경쟁은 가수들이 더 심했다. 60∼70년대는 마땅한 공연장이 없었기 때문에 극장에서 하는 가수들의 리사이틀이나 연합공연을 TV로 중계하는 일이 많았다. “신설동 시절이었는데 김세레나씨가 간판 얼굴이 작다고 공연을 안 하겠다는 거라, 그때 극장 전무가 김세레나씨 열성팬이었거든. 한겨울이었는데 공사중이던 극장 앞 고가도로 위에 그 큰 간판을 올려놓고 눈밭에서 다시 그렸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에는 100여명의 간판화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복합상영관이 들어서기 시작한 중반 이후 간판화가들의 숫자는 급속히 줄었다. 극장 수도 줄고 새로 짓는 극장들은 모두 실크스크린 사진으로 간판을 내다걸었기 때문이다. 서울극장, 명보극장, 대한극장 등 서울의 대표극장들이 줄줄이 복합관으로 전환되면서 오랜 동료들이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특히 마지막 보루였던 단성사마저 얼마 전 복합관 공사에 들어가면서 중심가의 극장에서 간판그림은 더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이제 개봉관의 간판화가들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고, 최씨는 간판화가 가운데 최고참이 됐다. “한참 젊었을 때 일했던 극장들을 지나가면서 실사프린트를 보면 착잡하지. 뭐 어쩌겠어, 그냥 잘 먹고 잘살아라 속으로 그러지.”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남는 섭섭함을 숨기지 않는다. “컴퓨터 시대가 됐으니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어려울 때는 밥 한끼 얻어먹으면서 간판 그려주고 같이 고생했는데 새로운 거 나왔다고 몇 십년 한솥밥 먹던 사람을 몰아내는 건 아닌 것같아.”

90년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간 간판화가들이 둥지를 튼 곳은 삼각지다. 삼각지에는 극장에서 밀려난 화가들이 차린 화실이 모여 있다. 이 화실들은 대학가 주변의 화실과는 성격이 다르다. 알래스카 같은 해외 이국 풍경의 사진을 유화에 담아 다시 해외로 수출하는 그림을 그리는 곳이다.

“그래도 그림간판이 사진보다 낫다”


사진/ "가까이서 보기엔 사진이 좋을지 모르지만 멀리서는 영화를 빛나게 하는 건 그림이지." 비록 밀려나는 업종이지만 최씨에게는 '간판장이'의 자부심이 있다.


서울 시내 복합관 가운데 유일하게 그림간판을 거는 극장으로 신촌 로터리에 위치한 그랜드시네마가 있다. 이곳의 간판을 그리는 이찬영(49)씨도 올해로 30년째 간판그림을 그려온 화가다. 그도 주위의 동료들이 하나둘 삼각지로 떠나는 걸 지켜봤지만 한번도 전직을 생각하지 않았다. “내 그림이 건물 벽에 걸릴 때 느끼는 뿌듯함”이 그를 쇠락해가는 간판그림에서 떼어놓지 못한다. “마지막 발악”이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여기마저 사진에 뺏기면 이제 간판은 완전히 끝나는 것”이라는 사명감을 느끼면서 일한다고 한다. 최씨와 마찬가지로 그도 이 직장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극장 주인의 마음이 변하면 언제라도 잃을 수 있는 일자리지만 붓놀림 하나하나에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진은 한번 보고 지나가지만 그림은 두번 세번 볼 수 있다.” 이씨는 마지막 ‘간판장이’로서의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림간판이 사진보다 낫다는 확신은 최씨도 변함이 없다. “가까이서 보면 사진이 좋을지 모르지만 멀리서 영화가 빛나게 하는 건 그래도 그림간판이에요. 사진은 금방 색이 바래지만 간판은 몇달이 가도 여전히 선명하고.” 그랜드시네마가 복합관의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것도 그림간판의 우월성을 인정해서다. “실사 프린트는 그림에 비해 밤에 잘 안보인다는 단점이 있다. 간판이 노출되는 거리가 다른 극장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림간판이 당연한 선택”이라고 말한 장근진 대표는 “사진으로로 바꿀 계획은 없다”고 덧붙였다.

내일모레 육십을 바라보는 최씨의 작업실을 나오면서 언제쯤 은퇴할 예정인가 물어봤다. “내년에 한번 다시 와봐요. 그때도 간판이 걸려 있으면 하고 있는 거고. 아니면 은퇴한 거고.” 낡은 철제 캐비닛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영화 포스터들, 여남은개의 페인트통 위에 꽂혀 있는 손때 전 갖가지 크기의 붓, 스펀지가 내장처럼 튀어나온 채 화가의 무거운 다리에 안식을 제공하는 낡은 객석용 의자가 오래된 정원처럼 쓸쓸한 풍경이 되어 한국영화사의 아주 작은 귀퉁이에 남을 스틸사진으로 인화되고 있었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









Back to the top  


Home| 표지이야기| 특집| 특집2| 이슈추적| 정치| 경제| 문화| 사람과사회| 움직이는세계|

copyright(c) 2003 The Hankyoreh Plus mail to 편집장,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