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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역깨기 ] 2003년09월25일 제477호 

총선은 후원회에서 시작됐다

불법 사전선거운동으로 변질된 의원 후원회… 향응 베풀고 노골적인 표 호소 서슴지 않아

“쩌그 청남대 갔다왔어. 여그 오문 구경도 시켜주고 밥도 먹여주고 그라지. 다 우리 세금으로 하는 것인디 많이 먹어야지라. 후원금? 당원들이야 5천원씩 낸다고 하는디, 우리 같은 사람은 안 내도 되아. 돈 내는 사람이 어디 있간디?”

지난 9월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 민주당 전갑길 의원 후원회에서 만난 70대 노인은 ‘광주에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는 의례적인 인사에 “덕분에 구경 잘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다.

초·재선 의원들이 더 열올려

총선을 7개월여 앞둔 요즘 의원들의 후원회는 사전선거운동이 벌어지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후원금을 내는 지지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원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자신의 세를 과시하거나 지역구민들을 동원해 향응을 베푸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사진/ “감사합니다.” 후원회는 말 그대로 의원들에게 후원금을 모아주는 자리지만, 후원금함 주변을 썰렁하기만 하다.


후원회는 보통 식사시간인 오전 11시나 오후 6시 전후에 열린다. 후원회로 오는 길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명 관광지를 들르는 것은 일반적이다.

16년 동안 전세버스 운전을 했다는 황아무개(47)씨는 “(서울까지) 서너 시간 걸리는 곳에서 출발하면 보통 관광지에서 놀다 서울로 오고, 지역구가 먼 곳이면 행사 끝나고 내려갈 때 온천 같은 곳에 들러 하룻밤 자고 간다”고 말했다.

이날 전 의원의 후원회에는 지역구인 광주광역시 광산구민 700여명이 전세버스 17대에 나눠타고 상경했다. 아침 8시30분에 출발해 청남대에 들러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후원금함을 줄지어 지나갔지만, 후원함에 봉투를 넣는 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1시간 넘게 축사가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발 디딜 틈 없던 대회의실은 빈자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회의실 밖을 서성이던 이아무개(67)씨는 “아파트 부녀회장이 ‘관광도 하고 맛난 것도 먹으러 가자’고 해 친구 5명과 함께 왔다”며 “청남대에 들러서 떡이랑 돼지고기랑 먹고 잘 놀았다”고 귀띔했다. 후원금을 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지역구민을 동원하는 후원회는 초·재선 의원들이 더욱 열을 올린다고 지구당 관계자들은 전한다. 공천을 받으려면 당 중진에게 지역구를 탄탄하게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다, 지역구민들에게도 자신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한 지구당 관계자는 “지역기반이 잡혀 있는 3선 이상의 의원보다는 정치적 기반이 약한 초·재선 의원이 지역구민을 대거 불러다가 ‘잔치’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대부분 지구당의 동책(각 동의 책임자) 또는 읍면책에 의해 동원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후원회가 열리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500석)이나 헌정기념관 대강당(300석), 국회도서관 강당(300석)은 이미 12월까지 매일 서너건의 후원회로 일정이 꽉 차 있다. 9월 35건, 10월 63건이 예정돼 있고, 11월과 12월에는 대회의실과 헌정기념관에서만 각각 25건, 8건의 후원회 행사가 열릴 계획이다.

후원회 축사가 “나 뽑아달라”

후원회에서 오가는 발언들은 노골적인 선거운동의 양상을 띤다.

정치자금법 6조는 ‘(후원회에서) 공직선거에 입후보하고자 한 자나 후보자를 지지·선전하거나 기타 선거운동에 이르는 행위’를 금지하며, 선거법도 선거운동 기간 전에 표를 호소하는 사전선거운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그야말로 ‘합법적인 공간에서’ 사전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 “이쪽입니다.” 후원회장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이 국회 안 차도 한쪽에 놓여 있다.


강운태 의원은 ‘전갑길 의원을 내년에 당선시켜야 할 3가지 이유’를 설명하며 “내년 4월15일이 총선입니다. 전 의원이 전국 최다득표로 여의도에 입성할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강 의원은 “제 지역구는 (광주) 남구인 거 아시죠? 부탁 말씀 드리고 갑니다”라며 애교(?) 섞인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이윤수 의원은 여러 후원회의 축사를 통해 아예 자신의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하고 나섰다. 이 의원은 전 의원의 후원회에서 “내가 국회의원 한번 더 하려고 합니다. 제 지역구인 성남은 호남분들이 40% 이상입니다. 여러분 덕에 제가 국회의원을 합니다. 친지나 아는 분 중에 성남분들 계시면 ‘이윤수 의원 사람 괜찮더라. 다음에 뽑아줘라’ 하고 선거운동 좀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18일 열린 김성순 의원의 후원회에서는 “성남은 송파구와 붙어 있습니다. 아는 분들 계시면 ‘이윤수 의원 괜찮더라. 뽑아줘라’ 하고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말했고, 19일 열린 배기운 의원의 후원회에서도 “성남에 호남분이 40% 이상이니 친지들 있으시면 선거운동 좀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9월19일 열린 배기운 의원의 후원회와 이윤수 의원의 후원회에서도 초청인사들이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균환 민주당 원내총무는 이 의원의 후원회에 참석해 “여러분이 키운 3선 이윤수 의원을 다시 4선으로 만들어 더 큰 정치를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고 호소했고, 이어 안동선·장재식 의원도 “이 의원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시켜 달라” “우리 사회를 위해서라도 이 의원을 꼭 당선시켜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정 총무는 배기운 의원의 후원회에서도 “나주 발전을 위해 다음에도 압도적으로 당선시키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초선의원의 보좌관은 “많은 의원들이 후원회 장소를 정치선전화하고, 제약 없는 사전선거운동의 장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어차피 승부는 일부 당원이 아닌 침묵하는 다수 유권자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총선을 앞두고 의원님을 지역구민에게 많이 알려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고 털어놨다.

노골적인 사전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단속의 손길은 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각 지역 선관위에서 후원회 감시활동을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선관위 직원이 조사를 나가더라도 이미 입을 맞춰놓기 때문에 결정적 증거를 잡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각 지역 선관위는 일손이 부족해 모든 후원회를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소연한다. 공정선거캠페인과 선거교육 등 일상업무는 여전한데 총선을 앞두고 부쩍 늘어난 후원회를 5명이 채 안 되는 인력으로 모두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속의 손길은 멀기만 하다

지방의 한 선관위 관계자는 “관내에서 하는 행사는 대부분 나가지만, 서울 같은 곳에서 하는 외부행사까지 따라가 감시활동을 벌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참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탐문조사를 하지만, ‘각자 경비를 대서 다녀온 것’이라며 말을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물증을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후원회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이더라도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1인당 1만5천원 이상의 뷔페와 관광경비 등을 대면서, 의원이 지역구민을 ‘후원’한다. 따라서 여전히 ‘대가성’ 또는 ‘보험성’ 자금이 후원회에서 걷히는 정치자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 전세버스에서 내려 후원회장인 의원회관 대회의실로 향하는 지역 구민들. 의원들의 후원회에는 지역구민 수백여명이 동원된다.


최근까지 한나라당 의원 보좌관을 지낸 ㄱ씨는 “후원회에 오는 순수한 지지자들한테서 받는 돈은 아무리 많아도 5천만원을 넘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의원들은 상임위원회 산하기관이나 단체, 유관업체에서 가져오는 ‘보험성’ 또는 ‘대가성’으로 들어온 자금으로 충당한다”며 “이런 자금은 아예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국정감사는 의원들에게 ‘대목’이다. 국정감사에서 증인 채택이나 자료 문제 등을 정치자금과 맞바꾸기 때문에, 후원회가 가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정치권에서는 ‘상식’이다.

최근까지 의원 보좌관을 지낸 ㄱ씨는 “국감 직전이나 국감 기간 중에 후원회를 통해 야당 의원은 1억원선, 여당 의원은 2억원선을 받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다”며 “현직인 ㅇ의원과 또 다른 ㅇ의원 등은 피감기관들에서 온 돈을 ‘가리지 않고 먹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고 귀띔했다. 그는 또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후원회가 가을에 몰려 있어 ‘원래 가을에 하나보다’ 하고 흔히 생각하지만, 국정감사가 가장 큰 이유”라며 “요즘처럼 선거를 앞둔 국정감사 기간에는 그야말로 정치자금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직접 지역구민들을 조직해 후원회 장소로 보낸 한 지구당 관계자도 “지금 정치현실은 유권자는 정치인에게 손을 벌리고 정치인은 유권자를 돈으로 매수하려 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며 “큰 틀에서 정치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지금의 후원회 모습도 바뀌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고계현 경실련 정책실장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활동자금을 지원해주는 합법적인 정치공간으로서 후원회가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며 “특히 총선을 앞두고 후원회에서 노골적인 사전선거운동이 벌어지는 만큼, 철저한 단속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글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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