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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역깨기 ] 2002년07월03일 제416호 

공무 중에는 죽여도 좋다?

주한미군의 궤도차량 사고 오리발 작전… 주둔군협정 내세워 ‘불평등 관행’ 강요


사진/ 주한미군은 여중생 사망사건의 책임을 회피하고 잇다. 지난 6월29일 시민과 사회단체 회원들은 의정부시 미2사단 레드클라우드 캠프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용호 기자)


지난 6월13일 오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려고 갓길을 걷던 여중생 2명이 미군 2사단 44공병대 소속 가교운반용 궤도차량(운전사 워커 마크 병장·36)에 치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느닷없는 어린 생명의 죽음 앞에 유족들은 한맺힌 오열을 쏟아냈지만, 온 나라를 휩쓴 월드컵 열기 속에 묻혀버렸다. 교복차림에 국화꽃 한 송이씩을 손에 든 여중생들은 피눈물로 친구를 떠나보냈고, 이들의 빈자리와 슬프게 마주한 교실에서 울음은 바다를 이뤘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비극적 사고

사고 직후 미군 쪽은 이례적으로 발빠른 모습을 보이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주한미군사령관을 비롯해 미 2사단장 등이 잇따라 유가족에 대한 공식 사과와 유감을 표했다. 사고를 낸 공병대대는 추모행사까지 열었다. 그리고 사고 발생 6일 만인 6월19일 오후 ‘한-미 합동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대한민국 경찰, 대한민국 범죄수사대 및 미 육군 안전부서와 더불어 우리는 본 사고를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본 조사를 통해 수집된 모든 증거에 근거해 우리는 이번 사고가 고의적이거나 악의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본 사건이 비극적인 사고라고 확신합니다.”

꽃다운 여중생 2명이 무참히 생을 마감했다. 궤도차량에 짓이겨진 주검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그러나 사고가 난 지 보름을 넘긴 현재, ‘충격이 커 외부인과 접촉이 곤란하다’던 워커 마크 병장은 ‘정상적인 병영생활’을 하고 있다. 사고발생의 원인과 과정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 역시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고가 났으면 진상을 밝혀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람이 2명이나 죽었는데 어떻게 아무도 책임이 없다는 건지.” 뙤약볕이 살갗을 파고들던 6월29일 오전 11시30분께. 고 신효순(15)·심미선(15)양이 스러져간 사고현장에서 이들의 죽음에 얽힌 의문을 풀기 위해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현장조사에 나섰다. “아이들의 주검은 두개골이 으깨어진 채 겹쳐져 있었어요. 아직 채 피가 배어나오기도 전이었죠. 뉘집 아이인지 확인하기 위해 우선 마을 이장들에게 전화부터 했습니다.” 사고현장을 처음으로 목격한 홍기식(54)씨가 현장조사에 참여한 이석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에게 사고 직후의 참상을 전했다.

마을 주민들은 사고지점이 평소 미군은 물론 한국군 장갑차와 탱크 등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고 전한다. 인근에 무근리 포병·기갑훈련장이 있기 때문이다. 사고 당일에도 미 2사단의 대대전투력측정(ATT)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한국군은 대규모 훈련을 벌이면 사전에 마을에 통보하는데, 미군은 한번도 미리 알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 주민은 “한국군은 훈련할 때 위험표시를 하고 교차로 등에는 헌병을 배치하는가 하면 수신호를 해가며 운행하는 등 사고위험을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다”며 “그러나 미군은 선두차만 배치하면 그만일 뿐 다른 안전조치가 없어 아찔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사전고지 없이 훈련… 안전규정 무시

6월19일 ‘한-미 합동조사’ 결과 밝혀진 사고상황에 대해 미군 당국은 이렇게 발표했다. “사고를 낸 궤도차량이 커브길을 돌아 언덕을 오르던 중이었다. 이때 맞은편에서는 브래들리 장갑차가 내려오고 있었다. 사고차량 선임 탑승자는 30m 앞에서 걷고 있던 피해 소녀들을 발견해 운전병에게 경고하려 했다. (그러나) 제때 경고할 수 없었다. 사고 운전병은 선임 탑승자가 멈추라고 하는 고함소리를 들은 순간 즉각 차량을 정지시켰다. 맞은편에서 오던 브래들리 장갑차의 선임 탑승자도 길을 걷고 있던 피해 소녀들을 보았고, 사고차량에 경고하려고 했으나 기회를 놓쳤다. 사고차량이 피해 소녀들을 친 뒤, 브래들리 장갑차량과 사고 장갑차량은 교차 통행하지 않은 채 1m 떨어진 상태에서 멈췄다.”

그러나 미군 쪽의 일방적인 조사결과에 대한 유가족과 마을 주민들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사고차량의 선임 탑승자가 아이들을 발견한 게 30m 전방이었다. 과속을 하지 않았다면 오르막길에서 충분히 차량을 멈출 수 있는 거리다. 미군 차량은 도로 폭보다 크기 때문에 평소에도 중앙선을 침범한 채 운행했다.” 숨진 미선양의 아버지 심수보(48)씨는 “사고 당일에도 맞은편에서 갑자기 전차가 튀어나오자 이를 피하기 위해 갓길 쪽으로 운행해 사고가 났을 수도 있다”며 “전차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들을 쳤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전국 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 김종일 공동위원장도 “미군의 발표내용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전혀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김 위원장은 “우선 사고차량이 도로 폭보다 크고, 훈련차량 통제를 위한 안전요원도 배치되지 않았다”며 “게다가 미군이 만들어놓은 훈련교본을 보면 마주 오던 브래들리 장갑차가 교차통행시 우선 통행차량이라고 되어 있어 소녀들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장갑차 통행을 위해 사고차량은 멈춰서야 했다”고 강조했다.

‘한-미 합동조사’라고는 하지만 실제 조사를 주도하고, 이에 따른 결론을 내린 것이 미군이라는 점도 조사결과에 대한 불신감을 높이고 있다. 현행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제22조 3항은 공무집행 중 벌어진 사고에 대해서는 1차적 형사재판권을 미국 당국이 갖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합동조사에 참여했던 우리 쪽 관계자는 “사고 운전자에 대한 접근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조사를 할 수 있겠느냐”며 “합동조사 현장에서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거나 재량권을 가지고 조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명색은 합동조사, 미군의 일방적 결론


사진/ 미군 주둔지에서 사고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미군 궤도차량 사고현장에서 민변 변호사들이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 (이용호 기자)


사고 원인에 대한 미군 쪽의 말 바꾸기도 유가족들의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애초 미 2사단 쪽은 사고 직후 “현장조사에 유족들도 참여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군은 6월16일 오후 유족들을 부르지 않은 채 현장재연에 나섰다가, 뒤늦게 이를 알고 달려온 유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조사결과에 대해서도 미군 쪽의 설명은 일관성이 없다. 6월19일 조사결과 발표장에서 사고의 책임을 묻는 유족들의 질문에 미 2사단 참모장은 “1차적인 책임은 사고 운전자에게 있으며, 부대 지휘체계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군 쪽의 과실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미군은 어느샌가 이 같은 입장을 뒤바꿨다. “사고 자체는 비극적이나 미군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미 2사단 공보 관계자는 <한겨레21>과의 전화통화에서 “한-미 합동조사 결과 신양과 심양의 죽음을 몰고온 비극적 사건과 관련해 누구에게도 과실이 없다고 결정됐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리 경찰의 자체조사 결과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경찰 관계자는 “사고 당시 궤도차량은 마주 오던 장갑차와 교차통행을 하게 됐으며, 이 때문에 정상 차로에서 약간 우측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며 “선임 탑승자가 운전자에게 사람이 있다고 고함을 쳤으나, 무선통신을 하던 운전자가 이를 알아듣지 못해 사고가 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관할 의정부경찰서는 “운전자의 안전운전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도로교통법 제44조에 따라 전방주시를 태만하게 한 운전자의 과실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미 검찰에 사건을 넘겼다.

왕복 2차선의 비좁은 도로에 갓길마저 풀섶에 가려져 있는 사고현장 인근 주민들은 “아이들 학교 보내기가 두렵다”고 입을 모은다. 우려했던 사고가 참혹하게 현실화한 지 보름이 지났지만, 마을 주민들의 호소에도 아직까지 별다른 예방대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숨진 효순양의 아버지 신현수(45)씨는 “안전대책도 완비했고, 과실도 없는데 어떻게 사고가 날 수 있느냐”고 탄식했다.

정부 유명무실… 재판권 포기 요청하라


사진/ 주한미군을 규탄하는 시위대들이 부대 철망을 잘라냈다. 시위대들이 돌멩이를 던지자 미군은 물대포로 반격했다. (오마이뉴스)


하지만 미군은 “평소 안전대책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며 요지부동이다. “미 2사단은 지방도로에서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속도제한을 강력히 시행하고 있다. 궤도차량 운행시에는 항상 호송차량을 운행하고 있다. 위험한 상태에서는 선도 호송차량을 정지시키는 것을 포함해 호송 이동에 적합한 훈련 및 표준예규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미 과속방지턱의 설치, 어린이들의 보행을 경고하는 도로표지 설치를 (지방자치단체에) 건의했다. 또 도로폭 확장과 등하굣길 어린이 보호를 위한 보도 설치도 건의했다.”(미 2사단 공보관계자)

비극적인 사고는 났으나 ‘과실’은 없고, 생떼 같은 목숨을 앗아간 건 유감이나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미군한테서 재발 방지책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이 때문인지 주민들은 이미 분노의 대상을 옮기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한 주민은 “백주에 사람을 죽이고 오리발을 내미는 미군보다 사고에 대한 진상조사조차 못하는 우리 정부의 무능함에 더 분통이 터진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이소희 사무국장은 “오랫동안 주한미군의 공무집행 중 범죄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검찰이 수사를 벌이는 것부터 금기시돼왔다”며 “미군 쪽에 1차적 재판권 포기를 요청한 일도 없었고, 공무집행 중 범죄에 관해서는 대체로 주한미군 내에서 가벼운 징계에 머물러왔다”고 말한다.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기소율이 이웃 일본의 약 10분의 1에 불과한 3% 남짓에 머무는 것도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기생한 ‘몹쓸 관행’이 유지되는 탓이다.

그러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91년 2월1일 개정된 협정의 합의의사록 양해사항을 보면 “일방 당사국이 타방 당사국의 일차적 관할권 포기를 요청코자 할 경우, 해당 범죄발생을 통보받거나 달리 알게 된 뒤 21일을 넘지 않는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이를 서면으로 요청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우리 법무부가 사건이 발생한 뒤 21일째가 되는 7월5일까지 주한미군사령부에 1차적 재판권 포기를 서면으로 요청할 경우, 미군 쪽은 이에 대해 ‘호의적’으로 응해야 한다. 이에 따라 공대위는 이미 6월27일 사고 당사자인 미군과 부대장 등에 대한 형사고소장과 함께 미군에 대한 1차적 재판권포기 요청 신청서를 법무부에 제출했다.

주한미군은 정녕 반미를 바라는가

6월26일 오후 의정부 미 2사단 앞에서는 400여 시위대의 분노에 찬 함성이 다시 울려퍼졌다. 성난 시위대는 1600여명의 경찰에 둘러싸인 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목놓아 외쳤다. 며칠 전 성난 시위대가 뚫어놓았던 철조망은 어느새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채 견고히 버티고 있었다.

교복차림으로 집회에 참가한 이아무개(18·의정부고 3년)군이 말한다. “미국 땅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졌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올라 견딜 수 없다.” 이군은 “제2, 제3의 효순이와 미선이가 나오지 않기 위해선 사고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께 나온 친구 5명과 함께 오른손을 치켜들며 반미구호를 외치는 이군의 모습 뒤로 버티고 선 철조망이 위태로워 보였다.

미군 당국과 우리 정부는 들불처럼 번져가는 ‘자발적’ 반미감정을 도대체 언제까지 철조망 바깥에 막아둘 수 있을 것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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