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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뿌리통신 ] 2000년10월11일 제329호 

[풀뿌리통신] ‘화염의 상처’를 떨치고 살리라!

80년대 광주지역 시위 현장에서 전신 중화상 입었던 도미선씨의 새로운 시작


(사진/“더이상 시대의 아픔이라 말하지 말라.”화염병에 맞아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약국에서 일하는 도미선씨)


여중 3학년 때 화염병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긴 도미선(26)씨가 지난 10월4일 첫 출근을 했다. 천신만고 끝에 내디딘 첫발. 일그러진 얼굴과 뭉개진 손을 안고 ‘소망하고 소망하던’ 직장을 얻게 되었다. 광주시 남구 방림동 어느 약국에서 약을 정리하는 일. 미선씨에게 직장은 여느 사람들이 갖는 직장의 의미, 그 이상이다.

화염에 휩싸인 여중생…전신마취만 19번

1989년 11월22일, 그해 가을은 미선씨에게 잔인했다. 아침 7시20분, 학교에 가기 위해 광주시 북구 중흥동 민정당 광주전남지구당사 앞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미선씨의 머리 위로 갑자기 뜨거운 불덩이가 흘러내렸다. 화염병이었다. 전투경찰과 학생들이 대치한 가운데 우연히 서 있던 14살 소녀의 온몸에 불길이 휩싸였다. 백담사에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울로 귀환한다는 소식에 전대협 대학생들이 민정당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던 중 화염병이 잘못 날아든 것이다. 전신 중화상. 머리카락은 물론, 옷과 얼굴까지 다 타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손가락은 뭉개져 잘려나가고 남아 있는 손톱마저 빠진 상태였다. 3일을 넘기기 힘들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도 미선씨는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3일, 한달, 두달, 3개월을 버티며 살아남았다.

미선씨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남아 있는 손가락도 모두 잘라버려라’, ‘팔도 다리도 잘라버려라’, ‘제발 죽여달라’고 통곡하며 3년 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어머니 진복순(49)씨는 딸이 마음 상할까봐 병실과 집에 거울 한장 걸지 않았다. 미선씨가 기억하는 전신마취만도 19번. 허벅지살을 도려내 얼굴과 손에 이식하는 대수술을 서른번이나 했다.

그러던 92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앞두고 있던 딸을 보겠다고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아버지마저 사고 원인을 밝히지 못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미선씨의 투병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 회사도 날아가고 집도 넘어갔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모금도 끊긴 상태였다.

갑자기 집안을 덮친 화염이 원망스러울 법도 하다. 그러나 미선씨는 외려 담담했다. “어머님이 그러셨어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미워하지 마라. 화염병 던진 사람을 찾으면 뭐하냐, 학생 하나 인생 망친다. 모두 용서하고 밝게 살자.”

끝없는 고통의 세월,아버지마저 사고사


(사진/1989년 전신 중화상을 입고 병원에 있던 당시의 도미선씨.그는 자신을 고통에 빠뜨린 이들을 모두 용서했다)


미선씨는 투병생활할 때부터 당시 광주지역 대학총학생회 학생들을 지금까지 만나오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은 죄책감에 마음 아파했고 미선씨는 그런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또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당시 시대적 상황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선씨에게 ‘이 시대의 아픔’이라고 위로해왔다.

“시대의 아픔이라는 말 젤 싫어요. 어른들이 늘 저에게 하던 말이지만 중학교 3학년생이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 ‘시대’가 저를 수술해 준 것도 아니고 일으켜 세워준 것도 아닌데, 내 길은 내가 가야 하잖아요. 앞만 보고 왔어요.”

이 대목을 이야기하며 차분하던 미선씨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동안 무관심하다가 취직했다고 찾아온 기자도 반갑지 않다는 투다. ‘제발 약국으로 전화하거나 찾아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간신히 구한 직장인데 취재 때문에 직장에 피해를 주면 어떻게 하냐는 얘기다. ‘정말 일하고 싶다’며 다시 한번 얼굴이 굳어졌다.

사실 미선씨에게 직장은 화상으로 죽었던 세포들이 돋아나는 것과 같은 생명줄이다. “저에게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손을 쓰는 것도 아니잖아요. 실직 안 하고 오랫동안 일하고 싶어요.”

지난 2월 목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취업 문을 여러 차례 두드려보았지만 매번 거절을 당했다. 공무원시험도 떨어지고 사회복지사 시험도 떨어졌다. 워드프로세스 2급과 사무자동화산업기사 자격증이 있지만, 영업직이나 큰 기업에서는 얼굴 흉터 때문에 안 되고 생산직 일터에서는 손이 문제가 되었다. 화상은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없는 실정이어서 손 지체장애 4급 판정을 받았지만 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11년 지나도록 보상 없어… “일자리 지키고 싶다”


(사진/“어린 딸이 무슨 죄가 있어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합니까”도씨의 어머니 진복순씨는 딸이 평생직장을 갖게 되길 바란다)


딸과 함께 앞만 보고 살아온 어머니 진씨는 요즘 더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다. “오로지 그 생각으로 살았어요. 어떻게든 아이들 거두고 가르쳐야 한다는….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고 불안해요. 대학까지 가르치고 보니까 내가 죽은 뒤 미선이가 어떻게 될까. 답답해요. 안정된 직장도 없는데 스스로 건사할 수 있을까.” 어머니 진씨는 파출부는 물론이고 ‘안 해 본 일이 없다’며 눈자위를 붉혔다. 진씨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에게 “어린 딸이 무엇을 알아 무슨 죄가 있어 정치적 희생물이 돼야 하며 또 지금까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까. 평생을 다닐 수 있는 직장을 마련해 주십시오.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말입니다”고 피를 토하듯 진정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두번 모두 ‘도와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진씨는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를 원망했다고 한다. “돈으로 보상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여태껏 살아온 것보다 더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최루탄과 화염병 피해가, 뭐가 다릅니까? 둘 다 국가의 권위주의 통치 때문에 빚어진 일 아닙니까?” 그날 밤 진씨 모녀는 서로를 붙들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미선씨가 약국에 일자리를 구하게 된 것은 광주 인력은행을 통해서다. 인력은행 최일재(34)씨의 정성스런 도움으로 공공근로의 일종인 구직세일즈와 성취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 1주일만에 폐쇄적이고 우울하던 미선씨는 점차 말문을 열었고 미선씨의 사정을 알게 된 광주 인력은행 직원들이 자신의 일처럼 나서 미선씨의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인력은행 최일재씨는 “도미선씨가 오래오래 일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이것은 다만 최씨의 바람만이 아닐 것이다. 미선씨는 물론 미선씨 어머니가 지난 11년 세월을 이겨온 불씨 같은 것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남은 세월. 이제 더이상 미선씨가 ‘시대의 아픔’이라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되길 바란다.

광주=글·정금자/ 프리랜서그룹 엔터닷컴 실장

사진·형민우/ 프리랜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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