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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시vs비비 ] 2000년12월26일 제340호 

끔찍한 상상력 경악스럽다

피해자의 ‘정상적 심리상태’ 의심 앞서 발뺌하려는 가해자의 심리부터 걱정해야


사진/이지은씨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 의 성폭력 가해자 명단이 공개되었다. 꽤 알려진 재야인사, 노동운동가, 총학생회장 등이 성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활동가들에게 새삼스럽거나 놀라울 것이 없다. 운동사회 역시 일반사회와 다름없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성과 빈번한 성폭력이 존재해왔고, 오히려 운동의 대의와 조직 보위의 논리로 성폭력 사실 자체가 더욱 은폐, 축소돼왔기 때문이다. 그런 전사(前史)를 기억하는 한, 실명 공개는 결코 ‘충격요법’이 아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기본원칙

100인위의 성폭력 사례공개 이후 가장 놀라웠던 것은 사례의 진위를 추궁하며 벌어진 피해자 진술에 대한 끔찍한 상상력이었다. 피해자의 정신적 건강상태를 의심하거나 배반당한 애인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로 매도하면서, 피해자가 진술을 왜곡하거나 과장하고 있다는 의혹과 주장이 그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강간을 당하고도 피해자가 온갖 비난을 받게 되는 현실에서 성폭력 피해자라는 치명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해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오히려 피해자들은 일반적으로 성폭력 사실을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더구나 사회 진보를 위해 함께 싸워왔던 동지를 성폭력 가해자로 직면하는 과정이 피해자에게는 자신의 운동과 동지적 관계에 대한 부정, 심지어 격심한 자기모멸로 이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끔찍한 상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피해자의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의심하기 앞서, 사건이 공개되면 발뺌하고 축소하고 싶어하는 가해자의 심리를 먼저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고도 그 사실이 다수에게 공개되면 발뺌부터 하는 성폭력 가해자들을 우리는 숱하게 목격해왔다.

피해자의 사실 왜곡, 과장에 대한 가정과 상상의 출발은 ‘피해자의 진술과 정황근거만으로 성폭력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가해자의 반론권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나 ‘객관적인 근거와 공정한 입장이 아닌 주관적이고 경솔한 행동’이라는 점잖은 충고들과 맞닿아 있다.

이에 대해 100인위는 성폭력 사건 해결의 ‘피해자 중심’ 원칙을 주장한다. 피해자 중심에 입각한 성폭력 개념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되는 모든 종류의 성적 자율권의 침해’라고 할 수 있다. 성폭력은 목격자가 거의 없는 은밀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특수성으로 인해 가해자는 사실 은폐, 축소뿐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래서 성폭력이 행해지는 당시의 상황과 조건에서 피해자의 심리상태와 고통을 근거로 한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사건 해결의 기본원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운동사회 내부의 성폭력은 사건 자체가 교묘히 은폐되고, 가해자가 보호되면서 상습 가해자에 의한 2차, 3차 피해자들이 속출하게 된다. 따라서 가해자 실명 공개는 재발 방지와 잠재적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미 실명공개 원칙은 90년대 후반 숱한 대학사회의 성폭력 사건 해결과정을 거치면서 일반적인 전제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단죄’가 아니라 오히려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명공개는 처벌이 아니라 사건 해결의 첫 걸음인 것이다. 더구나 100인위가 가해자 처벌에 관해 운운한 적 있는가? 100인위는 심판자가 아니다.

이미 해결된(?) 사건에 대한 재공개도 마찬가지다. 우선 누구에게 무엇이 ‘해결’된 것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충분히 해결된 사건을 다시 들추어서 성폭력을 당한 아픔을 곱씹고 싶어할 피해자는 없다. 가해자도 재공개 사실을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반성의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이미 해결과정을 거친 수원대 사건의 가해 당사자는 “내 이름이 재공개돼도 전혀 이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100인위가 객관적이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100인위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은 성폭력을 바라보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서 나온다. 이미 여성에게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무시한 채, 형식적으로 공정한 게임의 룰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부당한 처사다.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공정성과 합리성의 외피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건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도구가 될 뿐이다. 그래서 거듭 피해자 중심원칙이 강조된다.

운동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사진/“100인위가 불공정하다는 주장은 성폭력을 바라보는 정치적 입장 차이에서 나온다.” 성폭력 대책 수립을 요구하는 여성민우회 회원들.(한겨레)


며칠 전 참세상 게시판에서 우연히 피해자 모임의 글을 보게 되었다. 바로 100인위의 공개 사례 중 ‘성폭력 사례로서 근거가 부족하다’, ‘성폭력과는 다른 문제다’라고 지목되는 사건의 피해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폭력=강간의 등식을 벗어나는 순간, 성폭력의 성립은 저항이 아닌 동의의 문제로 바뀌게 되었다. 거절하지 않았다면 성폭력이 아니다. 따라서, 여성은 스스로 강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구절도 몇몇 성폭력 예방 지침서에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동의 여부를 묻는다면 우리는 할말이 없다. 어쨌거나 동의‘당했다’. 그러나, 그 동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심리적인 압박을 느껴야만 했으며 그 상황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끝까지 거절하지 않은 것은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고민의 시작은 이것이었다. 합의란 무엇인가?”

피해자들은 심리적 압박에 의한 강요된 합의를 했고, 결국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왔다. 강간은 성폭력이고 ‘강요된’ 합의하에 이루어진 성추행은 성폭력이 아닌가? 제3자가 성폭력의 경중을 나누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계량화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방치된 성희롱은 강간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100인위의 성폭력 사례 공개는 단지 개별 사례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성폭력의 개념의 확장이자, 성폭력에 대한 여성주의적 해석을 통해 외면돼왔던 피해자들의 고통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더이상 방관자적 관점에서 피해의 정도를 재단하고, 100인위를 비판하는 것은 운동사회 내 성폭력 근절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성폭력 근절을 위한 활동의 적극적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100인위의 실명공개는 운동사회에 뿌리내리고 싶어하는 자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운동에 대한 들끓는 애정이 없다면 왜 이토록 수고를 감수하며 성폭력 사례를 공개하고, 비난의 화살에 맞서 번거로운 짐을 지겠는가? 100인위에 “왜 이런 점은 고려하지 않았냐?” “왜 가해자의 인권을 침해했느냐”고 따지기 전에, 지금 필요한 것은 피해자의 고통에 귀기울이는 일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뿐 아니라 진정으로 공정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보편적 인권’의 새로운 지평도 열리지 않는다.

이지은/ 운동사회 내 가부장성과 권위주의 철폐를 위한 여성활동가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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