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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시vs비비 ] 2000년12월26일 제340호 

그 경솔함! 그 멍청함!

‘100인위’는 한국 여성운동 발전에 크나큰 굴레를 씌우는 ‘해당행위’


사진/송경아씨.(정진환 기자)


<말> 12월호에 ‘안티성폭력’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운동권’ 구성원들은 자신의 사상이 비주류에 속하고 탄압받기 때문에, 즉 만인에게 인정받는 ‘편한 길’을 가지 않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정상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상과 활동을 나누는 같은 조직과 그 안에서의 인간관계는 더욱 소중하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특성 때문에 사회의 타조직과 달리 인간관계의 거리 조정이 힘들다. 이때 이성간의 문제가 생기면 그 피해는 조직 안에서도 약자인 여성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진보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그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사회의 가치관을 일정 정도 수용하고 반영해야 하는 운동권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고, 수많은 그 ‘한계’ 중에서 하필이면 가부장적인 것을 반영하도록 만드는 우리 사회 내부의 모순이기도 하다.

피해자 진술만으로 ‘가해사실’이 성립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 모순을 체현하고 있는 활동가 개개인의 책임이 조금이라도 덜어지는 것은 아니며,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면에 항거하면서 자신 안의 가부장제에는 눈감고 있는 활동가들이라면 ‘실명공개’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인 이슈이고 큰 범죄인지 깨닫게 만드는 충격요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기사를 읽으면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고, 이른바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에서 성폭력 사례를 실명공개한다는 말에 진보진영 내부의 가부장제 문화를 일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2월11일 ‘100인위’에서 발표한 15개의 사례는 이러한 기대감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그 16개의 사례들 중에서는 물론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성폭력과 성희롱이 있었다. 그러나 황당하리만큼 사소한 사건에 대한 비상식적인 제소와 ‘피해자의 주관적 판단’이라는 성희롱의 판단기준을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가진 피해자의 주관적 판단’이라고 수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사례들, 피해자의 동의도 얻지 않은 사례, 기초적인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사례, 이미 당사자들과 지역사회 내부에서 종결된 사건을 다시 끄집어낸 것들 등 성폭력으로 ‘단죄’하기에는 무리한 사례들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에 대해 지난 15일 ‘100인위’가 ‘보도자료’를 통해 반박한 내용은 그들이 자신들이 한 행위의 의미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가해사실이 성립한다”는 말로 기본적인 사실 확인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가해의혹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성폭력에 대한 기본 상식 중 하나인 것은 맞다. 그리고 그 가해의혹을 벗는 것은 가해의혹을 받고 있는 자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러나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가해 ‘사실’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0인위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확대재생산하는 확성기가 아니라 ‘운동권 내부의 성폭력을 뿌리뽑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운동단체인 만큼, 예상되는 반론을 봉쇄하고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도 기본적인 사실 확인은 필요했다.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과 그 사실을 여성적인 시각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리고 왜 ‘해결된’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해결된 사건이라면 더더욱 못 밝힐 이유가 없고 가해자의 인권을 말하려면 피해자의 인권보장도 못했던 현실부터 쳐다보아라’는 이들의 답변은 가히 엽기적이다. 가해자의 인권을 고려하지 못하고 피해자의 인권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인권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가해자의 인권도 피해자의 인권도 똑같은 ‘인권’이라는 지평에서 사고되어야 한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면 운동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운동이 아니라 기관총이 아닌가. 사례 중에는 만취한 상태에서 성추행을 저질렀으나 잘못에 대한 후회가 가득한 사과문을 발표하고, 맡고 있던 직책을 그만두고 성폭력 가해자 프로그램을 이수하겠다고 다짐하는 등 피해자의 모든 요구를 성실하게 받아들인 가해자도 있다. 이 가해자가 동의했던 피해자의 요구에 ‘사례가 필요할 때마다 두번 세번 실명으로 발표되어 남의 입에서 무참히 짓밟히기’도 있었을까.

‘페미나치’‘페미파쇼’ 정당화하려나


사진/“정확히 피해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과 그 사실을 여성적인 시각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운동사회 내 가부장성 철폐를 위해 활동하는 여성 활동가들.(박승화 기자)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은 무척 착잡하다. 나도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성폭력과 성희롱을 당해본 적이 있고, 그것이 당하는 자에게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가를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런 일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증오심은 과격한 페미니스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다. 여성의 인권은 약자의 인권이기 때문에 더욱 침해되기 쉽고 그래서 더욱 보호돼야 하지만, 여성 인권을 ‘인권’이라는 더 넓은 지평 안에서 사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여성 이기주의’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그래서 ‘100인위’가 밉다. 사실 확인도 안 해보고 실명 공개를 당할 사람들의 인권을 생각지 않는, ‘인권’이라는 자기 발 밑의 땅을 파서 ‘여성 인권’이라는 탑을 쌓겠다는 그 근시안이 밉다. 충분히 의의가 있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런 잘못을 저질러서 앞으로 그 문제를 다루어 나갈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낳아버린 그 경솔함이 밉다. ‘페미나치’니 ‘페미파쇼’니 하는 한국 남성들의 언어폭력을 자기 손으로 정당화하는 그 멍청함이 밉다. 나는 ‘100인위’가 한국의 여성운동 발전에 크나큰 굴레를 씌우는 ‘해당행위’를 했다고 생각한다. 100인위여, 나의 생각은 가부장제에 세뇌된 남성적 시각의 소산인가?

송경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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