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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특집 > 기획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3월29일 제6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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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일제도 해방도 남도 북도 가리지 않았네

일제시대~한국전쟁 ‘생존자’ 증언… 형기 마치고도 해방까지 갇혀지낸 장순옥씨와 한국군 최초의 거부자 박종일씨

<한겨레21>이 ‘양심에 따른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4회에 걸쳐 한국 병역거부의 역사와 현실을 소개합니다. 이번 653호에 실린 첫 번째 시리즈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당시의 거부자들’입니다. 이후에는 ‘1970~80년대에 의문사를 당한 사람들’‘끝없는 처벌을 당하는 예비군 거부자들’‘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편집자

기획연재 양심을 따른 사람들 ①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1939년 6월29일, 일본 경찰은 한국의 여호와의 증인 33명을 일제히 체포했다.

그들은 전쟁 반대 사상을 유포해 치안유지법을 위반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불경죄로 기소됐다. 1914년 여호와의 증인 선교사가 최초로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로, 1932년 서울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 대회에 참석한 인원이 45명이었다.


△ 일제하에서 감옥에 갇혔던 장순옥씨(왼쪽 사진), 한국전 당시 남북에 모두 병역을 거부한 박종일씨. 이제야 비로소 그 시절을 얘기하는 그들의 눈가에는 이따금 물기가 비쳤다.(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대부분의 증인이 구속된 것이다. 더구나 33명이 하루에 체포된 것으로 미루어 경찰은 그들의 신상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징조는 있었다. 일경은 1933년 6월 서울에서 5만 부, 9월 평양에서 3만여 부의 여호와의 증인 전도서를 압수했다. 경고도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 일본지부 감독자로 한국과 대만도 책임졌던 아카시 준소가 1938년 한국의 증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체포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전했다. 당시 아카시는 아들의 병역 문제로 일본 경시청에서 조사를 받던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피하지 않았다. 마침내 1939년 1월 아카시의 아들과 다른 일본인이 군사훈련을 거부하자 일본, 대만, 한국에서 잇따라 일제 검거 선풍이 불었다. 한국에서는 6월29일 체포된 33명을 포함해 일제시대에 수감된 증인이 38명에 이른다. 이른바 ‘등대사’(燈臺社) 사건이다(상자기사 참고).

어깨 결어 수갑 차고 엎드리는 ‘대포대죄’

일제의 감옥에 갇혔던 증인들 중에 생존자가 있다. 유일한 생존자인 장순옥(89) 할머니를 3월12일 경기도 성남에서 만났다. 그는 호흡기가 좋지 않아 숨을 고르면서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장씨는 일제 검거 선풍이 불었던 29일 서울 왕십리의 집에서 경찰에 잡혀갔다. 그는 “밥을 하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고 말했다. 장씨의 남편도 이날 잡혀서 2년을 갇혀 지냈다. 평양여고 출신으로 18살에 결혼한 장씨는 당시 21살이었다. 더구나 임신한 몸이었다. 장씨는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 1년, 검사 기소 1년, 예심 1년, 재판 1년이 걸렸다”고 돌이켰다. 차가운 바닥에 인분이 뒹구는 유치장에서 장씨는 유산했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 고문이 가장 힘들었다”고 돌이켰다. 증인들은 일왕이 있는 도쿄를 향해 절하는 동방요배를 아침마다 강요당했다. 거부하면 한 손은 뒤로, 다른 손은 어깨 너머로 넘겨서 수갑을 채우고, 엎드려 절하는 자세로 버티는 ‘대포대죄’를 당했다. 그는 “(대포대죄를) 한 시간 이상 하면 죽어”라고 고통을 전했다. 두 명의 수갑을 함께 채우는 쌍수갑, 두 명의 발에 고랑을 함께 묶는 겹고랑 고문도 당했다. 때때로 독방에 두 명을 동시에 가두고 손을 뒤로 하고 팔짱을 끼게 했다. 심지어 잘 때도 수갑을 차고 팔짱을 끼어야 했다. “독방에 들어가면 죽어 나온다는데, 밤에 자고 있으면 머리 푼 귀신들이 죽 둘러서서 이제 그만하겠다고 해라 그러는 거야. 나는 죽을 각오로 온 사람이야, 물러가라고 소리쳤지. 독방에 핏자국도 있고 무서웠어.” 그가 고통스럽게 돌이킨 악몽 같은 얘기다. 이렇게 7개월간 고문을 당했다.

무섭고 무서운 시절이었다. 일제시대 투옥된 증인 38명 중에 5명이 감옥에서 숨졌다. 장씨와 함께 수감됐던 여성 한순기씨도 옥에서 숨졌다. 당시에 이들을 감시하는 간수였다가 나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된 김종숙씨의 회고담에는 “그 어머니(한순기)는 죽어가면서도 (수감돼 있던) 아들에게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했다”고 돌이켰다. 1941년 9월에 숨진 남편 최성규씨의 죽음을 회상한 고 박옥희씨의 회고도 구슬프다. “남편이 형무소에서 석방될 것이므로 500원을 준비해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쓸쓸하고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남편은 홑이불에 덮여서 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살았다기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남편은 형무소를 나온 지 8시간 만에 42세로 사망하였습니다.”(<한국 여호와의 증인 연감>·1988) 남편처럼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박씨는 1942년 9월 네 번째로 체포돼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

본부와 연락 두절된 상황에서 신념 지켜


△ 형무소에서 ‘대포대죄’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재연한 그림.

잇따른 죽음도 장씨의 신념을 꺾지는 못했다. 일본인 검사의 회유도 허사였다. 결국 장씨는 5년 구형에 3년 선고를 받았다. 형기를 마쳐도 수감은 끝나지 않았다. 장씨 등 4명의 증인 여성은 교정불능자로 분류돼 청주 예방구금소에 갇혔다. 예방구금소는 형기를 마친 사람을 가둬두는 곳으로 ‘청송감호소’의 원조 격이다. ‘증인’ 남성들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지만, ‘증인’ 여성 4명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감옥에 갇혔다. 여성의 견고한 저항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장씨는 해방된 다음날인 8월16일 석방되기까지, 6년2개월을 일제의 감옥에 갇혔다. 끝까지 감옥에 남았던 이정상씨는 4년, 김봉녀씨는 6년 동안의 수감생활을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한 번도 그들을 찾아와 유공은커녕 고생도 묻지 않았다. 다만 후유증이 남았다. 장씨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누우면 일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수인복 한 벌로 차가운 감방을 버텼던 여성들은 석방되고도 한참 뒤에야 후손을 얻었다. 장씨는 “지금도 감옥 생활을 생각하면 감정이 복받쳐오른다. 말할 때마다 참 고통스러운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도쿄의 감옥에서도 한국인 증인이 숨졌다. 증인인 옥계성씨 후손들이 겪은 고통의 일부다. 일제하에서 끝까지 감옥에 있었던 이정상, 김봉녀씨는 동서지간으로 이씨는 옥계성씨의 장남인 옥례준, 김씨는 둘째인 옥지준의 부인이다. 옥씨 형제도 일제하에서 4년씩 수감됐다. 그들의 남동생인 옥응련씨는 도쿄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옥사했다(상자기사 참고). 옥응련씨는 일본에서 출판물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일본 이와나미 문고에서 출판된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에 나와 있다. 이 책에는 “당시 24살의 조선인 청년 옥응련은 여호와의 증인 일본 지부에서 검거돼 교도소에 복역하다 장기간에 걸친 가혹한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되어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고 적혀 있다.

또 다른 조선인 최용원씨도 5년의 중형을 받았다.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은 “그들(조선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동경에서의 박해보다 훨씬 심했다”고 기록했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한국의 증인들이 1939년 이후 미국의 여호와의 증인 본부와 연락두절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립된 상황에서 신념을 지켰다.

양심을 지키는 전통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어졌다. 한국전의 병역거부자 박종일(77)씨를 3월12일 경기도 안성에서 만났다. 백발이 성성한 박씨는 정정한 목소리로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종일씨의 고모는 일제하 감옥에 갇혔던 박옥희씨다. 고모부 최성규씨는 옥중에서 순교했다. 고모는 남편이 숨지자 남동생인 박종일씨의 아버지 집에서 생활했다. 박씨도 17살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두 번의 끌려갈 위기를 넘겼으나…

박씨는 “내가 1930년 10월22일생인데, 1949년 10월에 발효된 병역법의 징집 대상이 1930년 9월1일생부터예요. 병역법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지”라며 웃었다. 박씨는 한국전 당시에 국방군과 인민군 양쪽에서 병역을 거부했다. 1950년 한국전이 터졌을 때 그는 서울 신당동에 살았다. 며칠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그는 집에서 서대문으로 가던 중에 방산시장 근처에서 인민군 의용대에 잡혔다. 잡힌 사람들은 줄을 서서 심문을 받고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다. 박씨는 “2차 대전 당시에 증인들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병역을 거부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차례가 왔는데, 마침 “오늘은 끝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군대에 끌려갈 첫 번째 위기였다.


△ 일제의 감옥에 끝까지 수감됐던 4명의 여성이 나란히 서 있다. 오른쪽부터 김봉녀, 이정상, 장순옥, 김경희. 그 옆에 일제하 수감자 박옥희와 외국인 에머슨.

1950년 이른바 ‘9·28 수복’으로 서울에 국군이 돌아왔다. 경기도 광주의 고향에서 숨어 지내던 박씨는 전도를 하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12월24일 “징병 연령에 해당하는 남성들만 서울에 남고 나머지는 피난을 떠나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중공군’이 밀려온다는 것이었다. 징집 연령에 해당하는 그는 피난을 떠났다간 길목을 지켜선 군인에게 잡혀 징집될 가능성이 높았다. 박씨는 조영하씨와 함께 여호와의 증인이 소유한 서울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서울은 인민군 수중에 넘어간 터였다. 2주일이 지나자 사람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박씨는 “도리우치(납작모자)를 쓰고 바바리코트를 걸친 남자가 들어오더니 ‘아드님 계시오’ 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즉시 손을 올리라고 명령했다. 박씨는 “우리 손에 총 자국이 있는지 확인했다”고 말했다. 북한 쪽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보였던 그들은 박씨 일행이 잔류한 국방군이 아닌지 의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에는 여기저기 성경과 영문 출판물이 흩어져 있자 그들은 의심을 거두었다. 박씨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 없어서 피난을 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박씨의 말에 귀를 기울인 그는 “내일 종교를 잘 아는 사람과 오겠다”며 떠났다. 박씨는 “북으로 끌고 가거나, 남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시키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며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번 더 방문했지만, 박씨 일행을 연행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3개월 동안 그들의 은신처는 안전했다.

서울은 다시 국군 치하에 들어갔다. 1951년 3월 그는 전도를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화물차에서 내려 대구역을 나오자 국민방위군에 잡혔다. 전투 일선에서 지게로 포탄을 나르는 부대라고 했다. 그는 “권 대위라고 불렸던 책임장교가 심사를 했다”며 “이번에도 전투에 나설 수 없다고 말했다”고 돌이켰다. 창고로 끌려가 매질을 당했다. 3~4일을 기다려 사람이 모이면 일선으로 보내는데, 그는 다행히 ‘열외’였다. 권 대위의 호의 때문이었다. 그렇게 3주가 흘렀다. 이번에는 부대가 대구에서 철수해 일선으로 모두 나가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부대를 옮길 때, 슬쩍 빠지라는 권 대위의 배려로 전투를 피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인민군에 이어 국군에게 끌려갈 위기도 넘겼다.

그래도 징집을 피하지는 못했다. 1953년 6월, 당시 부산에 살았던 23살의 박씨는 영장을 받았다. 그는 포항의 보충대로 끌려갔다. 병역을 거부한다고 했지만, 알아듣는 군인조차 없었다. 돌아온 답변은 “영창 맛을 봐야지”였다. 사상을 의심받아 육군 특무대(CIC)로 옮겨졌다. 총으로 쏘겠다는 협박까지 당했지만, 총을 들 수는 없었다. 특무대에서 몽둥이로 엉덩이를 20대 맞았다. 항문이 파열돼 한동안 고생했다. 특무대에서 별다른 소득이 없자 그를 보충대로 돌려보냈다. 계속해서 병역을 거부한다고 의사를 밝혔지만, 당시에는 병역거부에 대한 ‘개념’도 절차도 없었다.

“거부자로 분류되니 구타당해도 편했다”

그는 “오히려 보충대에서 억지로 군번을 찍혔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주도 훈련소로 보내졌다. 그는 “제주에 도착해 (신병) 인수인계 절차가 여러 번 있었다”며 “그때마다 장교를 붙잡고 ‘못한다’고 했지만 한바탕 매만 맞았다”고 돌이켰다. 드디어 중대 편성까지 밀려갔다. 그는 “이젠 정말 군인이 되는구나 싶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단식을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무시하던 중대장도 단식 3일이 지나자 심각함을 깨달았다. 마침내 헌병들이 그를 영창으로 데려갔다. 그는 “비로소 병역거부자로 분류됐으니 구타를 당해도 마음이 편했다”며 웃었다. 군인들은 또다시 그에게 목욕을 시켜주고, 편한 잠자리도 주면서 회유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는 “군목들은 물론이고 훈련소장이었던 이응준 중장도 방청할 만큼 관심을 모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방경비법을 위반한 죄로 검사 구형 3년, 고등군법회의 선고 3년, 설치부대장의 확정 3년을 받았다. 그래도 뜻밖에 형량이 높지는 않았다. 그는 “재판이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 끝났기 때문에 형량이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천 군교도소 등에서 3년을 보냈다. 아마도 박종일씨는 한국군 창설 이래 최초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일 것이다. 이렇게 남북으로 이어진 파란만장한 병역거부가 끝났다.

노병일(89)씨도 인민군 의용대에 끌려갈 위기를 넘겼다. 노씨는 1950년 8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관악산에 숨었다. 하지만 밥을 짓다 피어오른 연기가 발각돼 인민군에 붙잡혔다. 당시의 봉천국민학교에서 심문을 당했다. 그는 “나는 하나님의 왕국만을 섬길 뿐이며, 어느 쪽에서도 속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징집에 응하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됐고, 군인들은 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다행히 공포탄이었다. 그렇게 살아난 노씨는 현재 미국에 생존해 있다. 박종일씨와 가깝게 지냈던 최용원씨는 한국전 중에 행방불명됐다. 최씨는 일본에서 옥고를 치렀던 조선인 두 명 중의 한 명. “최용원 형제는 어찌되었을까…”라고 말하는 박종일씨의 눈가에 물기가 비쳤다. 이렇게 그들의 양심에 따른 거부는 시대를 가리지 않았다. 일제하에서, 해방 뒤에도 그들은 일관되게 거부했다. 정부도 가리지 않았다. 남이든, 북이든 병역을 거부했다. 오직 하나, 양심상의 이유였다.


옥씨 가족 수난사

병역거부로 인한 투옥 3대째 이어져, 4대째 비극 없도록 대체복무 도입돼야

옥씨 가족사는 한국 여호와의 증인의 수난사를 상징한다. 일제시대 황해도 사리원에 살았던 아버지 옥계성, 어머니 나용성씨는 슬하에 6형제를 두었다. 원래는 제7일 안식일 교인이었던 그들은 1930년대 후반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장남인 옥례준씨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그땐(일제시대) 안식교가 신사참배를 해버렸다. 실망했다. 여호와의 증인이 진짜구나. 증인은 신사참배를 안 했다”고 증언했다. 그들의 개종에 신사참배가 중요한 계기였던 것이다.


옥씨 집안은 3대에 걸쳐서 병역거부로 옥고를 치렀다. 장남 부부와 둘째 부부는 일제시대에 모두 구속돼 총 18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셋째인 옥응련씨는 도쿄에서 순교했다. 그들은 사리원에서 공장을 하며 넉넉한 생활을 했지만, 형제 부부의 구속으로 공장도 문을 닫아야 했다. 가족은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월남했다. 북쪽의 정부가 일제시대에 투옥된 집안이라 재산을 몰수하지 않는 대우를 해주었지만, 옥씨 형제는 공산정권하에서 종교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 대한의 품도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진 않았다.

대를 이은 수난이 이어졌다. 넷째 옥응두씨의 아들인 옥태중씨가 1988년 병역거부로 투옥돼 2년을 살았다. 병역거부로 인한 투옥은 3대째 이어졌다. 둘째 옥지준씨의 외손자인 백영훈씨는 98년 항명죄로 구속돼 3년형을 선고 받았다. 백씨는 대체복무 도입을 호소하는 글에서 “저의 가족은 일본 제국주의하에서도, 군사정권 치하에서도 그리고 소위 민주주의 정권 아래서도 동일한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는 “3대째 병역거부 가족이라는 타이틀이 더 이상 다른 어떤 가족에게도 붙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제가 앞으로 결혼해 아들을 낳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신념을 근거로 병역거부를 하게 된다면 저의 가족은 4대째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게 된다”고 썼다. 대체복무가 도입되지 않은 오늘, 수난사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원수라도 인간인 이상…”

한국 등대사 사건에서 문태순의 반전 발언 뚜렷

국사편찬위원회가 1991~1993년 펴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9>에는 당시에 투옥된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상기록 카드가 들어 있다. 또 1989년에 나온 <한민족독립운동사 5: 일제의 식민통치>에는 민경배 당시 연세대 신학과 교수가 집필한 ‘일본 기독자에 대한 박해와 저항’편이 있는데, 여기에 일본의 ‘등대사’ 사건이 수록돼 있다. 책은 일본 여호와의 증인의 법정진술을 서술한 뒤 “당당히 진술한 모습은 일본 기독자의 양심으로 별처럼 빛났다.”(653쪽)고 적고 있다. 책에는 “한국·대만에서도 39명이 동시 검거됐다”(653쪽)는 부분도 나온다. 하지만 한국의 등대사 사건은 아주 짧게 처리돼 있고, 일본의 등대사 사건은 비교적 상세히 나온다.

일본인 구라타 마사히코가 한국에서 발간한 <일제의 한국 기독교 탄압사>(기독교문사 발행)에는 한국의 등대사 사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나온다. 이 책은 “뚜렷한 반전 발언은 한국 등대사의 지도자인 문태순의 증언 속에 보인다”며 문태순의 경찰 심문조서를 이렇게 인용한다. “우리는 전쟁에 반대한다. 만약에 우리가 전쟁에 나가서 적병을 사살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것은 여호와의 증자(여호와의 증인의 옛 표현)로서는 못한다. 원수라도 인간인 이상 죽이면 안 된다.”(84쪽) 그리고 책은 “이 어려운 시대에 유일신 신앙이나 재림신앙, 혹은 평화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천황제와 대결하게 된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파를 넘어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