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목차 지난호보기 독자마당 기사의견

menu sitemap

e-Book
표지이야기 정치 사회 문화/과학 스포츠/건강 칼럼 독자마당
Home > 독자마당 > 노 땡큐! 목록 > 내용   2008년01월24일 제695호
통합검색  검색
태안 돌 닦기 유감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당한 느낌이다. 몇십만의 우리들이 태안으로 달려가서 하루 종일 기름에 전 돌을 닦았다. 그랬더니 돌도 안 닦은 이가 그 위를 밟고 마구 달리려 한다. 우리 이명박 당선자이다. 스스로 모여들어 땀을 흘려 일하고 있는 태안의 국민들을 보라고 한다. 그러니 “근로자들”은 이를 본받아 스스로를 던지는 마음으로 더 땀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리고 은연중에 자신에게 이견을 제기하며 맞서려는 모든 정치 세력들에게도 메시지를 던진다. 고개 숙이고 묵묵히 돌을 닦던 태안 사람들의 겸손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며 자숙해 단결을 이룩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한국인들은 착하다. 너무 착해서 짜증과 사랑스런 눈물이 한꺼번에 치밀어오를 때가 많다. 5년 전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이미 대기업들에서 가가호호 상당한 돈을 받아 쟁인 노무현 후보가 문성근씨를 앞세워 “희망의 노란 돼지 저금통” 운운할 적에도 착한 국민들은 뜨거운 호응으로 답했다. 그보다 다시 5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당시에는 국민들 스스로가 모여들어 무려 20억달러가 넘는 돌반지, 금비녀, 금배지 등을 모아 내기도 했다. 그보다 다시 십 몇 년 전에는 금강산댐 시뮬레이션이 나오는 TV 화면에 화들짝 놀란 이들이 ‘평화의 댐’을 쌓기 위해 거액의 돈을 모으기도 했다. 100년 전으로 가도 나랏빚을 대신 갚자고 모여든 백성들의 ‘국채 보상 운동’이 있었다.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고개 숙이고 묵묵히 무얼 하면 꼭 그 위를 밟고 가는 자들이 위정자다. 그들로서는 돈도 안 들고 폼도 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맞다. 고종 황제도, 전두환도, 김대중도, 노무현도 그 모델을 사용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명박 당선자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심히 불공평한 일이다.

좋다. 민초들의 곧고 맑은 심성과 헌신성을 사뿐히 즈려밟고 위정자들이 올라서는 것이야말로 전통적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이상으로 여기던 바이다. 그런데 그런 나라를 대포 몇 방으로 간단히 날려버렸던 서구 문명이 기반하고 있는 전혀 다른 원리도 있다. 바로 ‘책임성’(responsibility)의 원칙이다. 옛날에 신께서 아끼던 아벨이라는 사람이 땅 위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신은 형인 카인에게 물었다. “아벨은 어디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동생이 어디 있는지 내가 대답(respond)해야 할 사람이냐고.” 물론 대답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몸 성히 있는지, 아니라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준 사태들이 있다면 누군가 대답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사람들 사이의 신뢰도 점점 얇아지고 그 아름다운 백성들의 심성도 결국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백성들의 착한 심성이 황홀하게 빛날 때마다 휘광에 가려 시야에서 사라진 책임들이 있었다. IMF 사태를 만든 정부 관료, 은행 총재, 기업 총수들의 책임이다. ‘희망 돼지’로 사람들의 마음에 꿈만 잔뜩 부풀려놓고서 무슨 기업에 휘둘려 “국민 소득 2만달러” 운운하다가 ‘대연정’이니 ‘좌파 신자유주의’로 끝을 본 세력의 책임이다. 태안에서 지금 빠져나가려 하는 책임이 있다. 유조선 운송 중간에 이 대재난을 만든 석유 운송 회사의 책임이다. 돌 닦는 몇십만의 미담과 그 미담을 이리저리 활용하는 위정자 사이로 원인을 제공한 기업의 책임이 담론에서 사라지고 있다. 태안 사람들은 괴롭다. 엊그제 양식장을 망친 어느 어민이 음독자살을 했다. 대기업의 불찰로 벌어진 혐의가 짙은 이 사건에서 대기업도 숨고 그 뒤의 보험사도 숨는다. 이 책임을 따지려 했던 몇 언론사는 당장 광고가 사라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남은 것은 넋이 풀려 주저앉은 주민들과 그 옆에서 고개 숙이고 돌 닦는 국민들, 그리고 그 위에 서서 기회를 틈타 “멸사봉공”을 외치는 위정자의 모습뿐이다.

코끼리를 화나게 하지 말라

백성들은 여전히 코끼리처럼 착하고 순하다. 그런데 그들이 착한 심성으로 흘린 땀방울 뒤에서 위정자들과 기업들이 책임 소재를 흐리고 엉뚱한 아전인수만 일삼는 일은 없어야 한다. 코끼리는 유순하지만 복수심이 무척 강한 동물이라고 한다. 그들을 화나게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