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 죄의식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원호심사 거부한 참전군인 출신 시민운동가 김영만씨, 그가 용서를 비는 사연

“청룡 라이라이… 따이한 라이라이.”(‘라이라이’는 ‘오라’는 뜻)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적들의 괴성이 천지를 깨웠다. “와…와.” 그리고 “둥, 둥, 둥.” 북과 함께 징과 꽹과리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새벽 4시. 기습을 당한 것이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 우박처럼 떨어지는 포탄. 이미 포진지는 점령당했다. 그는 M1 소총을 성급히 찾아, 있는 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탄창에 있던 여덟발이 전부였다. 적군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엔 수류탄 네발을 뽑아 모두 던져버렸다. 그 다음은 육박전 차례. 그러나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포탄 파편에 얼굴을 맞은 것이다. “장가도 못 가고 죽는구나….” 그 와중에도 퍼뜩 그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쳤다. 한숨이 나왔다. 그와 함께 한 바가지의 피가 울컥 솟아올랐다. 그리곤 몇 시간 동안 그는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월맹정규군들은 그를 밟고 지나갔고, 일부는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짜빈동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살다

1967년 2월14일 짜빈동 기습방어전. 해병전투사는 ‘짜빈동전투’를 ‘베트남전 최고의 해병전투’로서 해병 6대작전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일개 중대규모인 200명의 병력으로 3천명이나 되는 월맹군 연대병력의 야간기습공격을 격퇴했기 때문이다. 이 역전의 전투로 인해 해병은 ‘신화를 남긴 해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월맹군 234명 사살, 아군 사망 15명, 아군 부상 31명. 중대원 전원 일계급 특진. 김영만(55)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 부상자 중의 한명이다.

‘사단법인 대한민국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가 한겨레신문사를 습격한 다음날인 6월28일. <한겨레21>엔 눈길을 끄는 한장의 팩스가 날아들었다. 바로 그 김영만씨였다. 그는 부상 뒤 아침에 헬기로 후송돼 다낭 미군병원에서 깨어났을 때의 괴로움을 적고 있었다. “병원에 누워 정신을 차려보니 매일 포탄과 비명소리를 들으며 피묻은 전투복을 입고 있었을 때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일들이 나 자신을 몹시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왜 남의 전쟁에 가서 그 숱한 피를 흘려야 했는가 하는 회의와 베트남전쟁에서 혹시 내가 죄없는 사람들(양민)을 죽인 것이 아닌가 하는 몇 가지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그 당시 내 젊은 영혼에 얼마나 큰 고통이었던지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군의관으로부터 당시 3개월에 한번씩 있었던 원호심사를 받고 제대하라는 간곡한 권유에도 만기제대를 고집하고 제대를 했습니다.”

그는 짜빈동전투 참가로 국가로부터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았지만,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 원호심사를 받았다면, 상해1급 판정을 받고(오른쪽 광대뼈를 뚫고 포탄파편이 콧속에 들어갔다) 각종 원호혜택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걸 거부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루라도 빨리 제대를 하는 것이었다. ‘군’이라는 말과 ‘전쟁’이라는 말은 듣기도 말하기도 싫었다. 왜 그랬을까.

그를 지난 7월26일 마산에서 만났다. 뜻밖에도 김영만씨는 마산지역 시민운동가였다. 그가 내민 명함엔 이런 직함이 적혀 있었다. ‘열린사회 희망연대 대표’. 지금은 대표가 아닌 고문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기자는 내심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좀더 평범한 사람이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그러나 그에겐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베트남전 경험을 말하기 전 한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에서 그는 피케팅 시위를 하고 있었다. “Make a through investigation into the Gokan-ri masscre”(곡안리 학살을 철저히 조사하라). 지난해 10월29일 미 육군 노근리조사반이 영동군청에 왔을 때 미군에 의한 마산지역 양민학살인 곡안리 사건내용을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 그를 포함한 시민단체 대표자들은 사건 경위를 영문으로 번역해 미군쪽에 전달했다고 한다. “50년 8월11일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마을 뒤편 재실에 피신해 있던 80명이 미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모두 숨졌습니다. 대부분 노인과 여성, 젖먹이들이었죠.” 영동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시민단체 동료들에게 베트남을 이야기했다. “곡안리 양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배상요구를 당당히 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베트남에서 저질렀던 일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죄가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더더욱 마음에 걸려요.”

아무런 느낌이 없는 총살행위

그는 <한겨레21>이 베트남 양민학살 문제를 보도할 때,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운동가라는 점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엽제전우회의 신문사 습격을 보며 침묵을 깼다. 그는 과연 무엇 때문에 아직도 괴로워하는 것일까. “제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 정신세계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건이 있습니다. 평생 죄의식에 묶여 살고… 짜빈동 마을을 언젠가는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짜빈동 기습방어전 이틀 전 일이었다. 그는 해병 중박격포중대 2소대(당시 소대장 이정국) 소속으로 해병11중대 짜빈동 진지에 배속나온 상태였다. 그의 말을 여과없이 들어보자.

쿠앙응아이성에 있는 짜빈동이라는 마을은 가구 수가 한 100여호 됐어요. 안전마을이었죠. 우리가 보호해주는 마을이었는데, 그곳을 뺀 모든 마을은 다 무조건 적으로 간주했지요.

종종 11중대원들이 수색정찰을 갔다오면 베트콩 용의자를 체포해와요. 그날도 베트콩 용의자를 체포해왔어요. 그런데 전투가 없으면 심심하니까 용의자를 데리고 장난을 많이 쳤어요. “가라”고 한 뒤 뒤에다 총을 쏜다든지, ‘꼴아박아’를 시킨다든지. 군대에서 포로든 용의자든 잡으면 포로수용소 같은 데로 이첩을 해주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 당시는 그런 게 없었어요. 베트콩 용의자를 잡으면 무조건 2∼3일 뒤에 그 부대현장에서 처치해버렸어요.

내가 그때 베트남에 있을 때 자그마한 수첩을 하나 받았어요. 베트남어 단어를 우리말로 바꾼 거였는데… 그걸 내가 외웠어요.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 만나면 베트남식 발음으로 배웠지요. 몇마디를 할 줄 아니까 부대에서 베트콩 용의자를 잡으면 내보고 와서 통역하라고 했다고. 니 이름 뭐야, 어디서 왔어, 베트콩 맞나 안 맞나 하는 정도였죠. 그런데 어느날 내 선임이 한명 쫓아오더니 그저께 잡아온 베트콩 용의자 한명을 우리가 처치하게 됐으니까 몇명 같이 가자, 하더라고. 그래서 네명이 한조가 돼서 갔죠. 베트콩이라고 무조건 확신을 한 거죠. 용의자인데… 그 마을에서 잡아온 청년이에요. 30대 초반쯤 됐나. 하여간 우리가 선발이 된 거예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저항감도 전혀 없었고… 그래서 갔지. 뒤에서 총으로 쿡쿡 쑤시면서 원형 철조망을 지나 진지 밖으로 100여m 나갔죠. 그 도중에 베트콩 용의자가 생똥을 싸더라고… 죽으러 가는 줄 아는지. 야전삽을 던져주면서 구덩이를 파라고 그랬어. 근데 누군가가 이 친구를 그냥 총으로 쏘아죽이기 아깝다는 거야. 삽으로 죽이자는 둥 옥신각신 하다가 그래도 빨리 죽도록 총으로 죽이자 했지. 네명이서 구덩이에 세워놓고 총으로 쏘았어요. 한 3m 앞이었나? 머리를 쏘니까 피보다 골이 많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 그래 대충 묻어놓고 왔어요.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드는지, 꼭 아편 먹은 것처럼 만들거든요. 총소리를 듣고 비명소리를 들으면 늘 뇌에서 무엇이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여튼 바로 그 직후가 점심시간이어서 밥을 먹고 있는데, 소대장인가가 와서 “야 너 옷이나 갈아입고 먹지…” 그래. 그래서 보니까 피가 묻어 있더라고.

그의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태연히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진지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11중대 중대원 한명이 그에게 달려왔다. 어떤 할머니가 와서 자꾸만 울면서 아무리 가라 해도 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해가 막 지기 시작했을 땐데, 날이 흐렸어요. 할머니를 딱 쳐다보니… 우리 고향 할머니처럼 키가 작고 얼굴이 동글동글했어요. 우리 할머니가 한국 사람치고 키가 굉장히 작았어요. 베트남 사람들이 키가 참 작거든요. 꼭 우리 할머니하고 형제라 해도 될 만큼 닮은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서 있더라고. 손짓발짓 해서 왜 그러느냐 물어보니… 내 아들이 이틀 전에 한국군에 잡혀왔다는 거예요. 그 순간에 “앗”하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 아 그러느냐고 하면서 내가 뭐라고 거짓말을 했냐면 “그 사람은 오늘 아침에 헬리콥터 타고 포로수용소로 갔습니다”했지. 그러니 할머니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오늘 비가 와서 헬기가 안 떴다”는 거예요. 사실 안 떴거든요. 그날 아침도 비가 부슬부슬 왔기 때문에. 내 거짓말이 금방 들통난 거예요. 그래서 당황했어요. 그럼 뭐라고 말을 해야지 하는데, 할머니가 꼭 약탕기 같은 그릇에 나뭇잎사귀로 뚜껑을 했고, 짚 같은 걸로 손잡이를 만든 걸 들고 있더라고. 그걸 손에 들고 울면서 나한테 뭐라 말을 하더라고. 아들한테 갖다주라는 소린 것 같아. 그걸 열어봤어. 고기 같은 것에다 죽을 쒔드라고. 그래서 내가 그걸 진지 내로 들고 왔어. 참 난감한 거야. 그래 고민하다가 땅바닥에 부어내버렸어요. 한 그릇이었으니까 그걸 몽땅 다 먹었다 그러면 거짓말 인 것 같아서. 20∼30분쯤 있었지. 사람이 먹는 것처럼 시간을 끈 거야. 죽을 조금 남겨갖고 나가니까… 부대 들어올 때만 해도 할머니 혼자 밖에 없었는데 그 옆에 7∼8살 되는 아이 둘이 울면서 할머니 양쪽 팔을 잡고 있더라고. 그때 비가 많이 오기 시작했는데 셋이서 울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도 못하고 빈 그릇을 보여주면서 가라고 했지. 할머니가 그걸 열어보더니 다 안 먹었으니까 통곡을 하더라고. 그러니까 애들도 할머니를 껴안고 울고. 말도 붙여볼 수가 없는 거지. 아무리 가라 해도 안 가고. 그렇게 우는 상태로 날이 캄캄해지기 시작했어. 더이상은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부대로 들어왔어요. 그리고 이틀 뒤 전투가 벌어진 거지.

그는 부상 직후 적군과 아군의 시체들이 널부러진 현장에서 헬기를 타면서 가장 친했던 전우의 싸늘히 식은 주검을 보았다. 그는 미친듯이, 헬기에서 내리겠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면서 이틀 전의 일이 머리를 때렸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천벌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고한 사람을 그렇게 죽였는데… 그 사람이 무기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재판을 한 것도 아니고… 양민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당연히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총으로 죽일까 삽으로 죽일까 의논을 해가면서… 그때부터 그것만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 자리를 가르쳐주고 싶다”

김영만씨는 67년 5월 제대 직후 미국으로 이민갈 준비를 하다 막노동판에서 허리를 다친다. 결국 하체마비로 30대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우울하게 보냈다고 했다. 원호대상자의 길을 포기한 뒤에도 적당한 직업 없이 전전한 그로 인해, 부인은 1남2녀를 키우기 위해 보따리행상에 오랫동안 나섰다. 재야운동에 뛰어든 것은 80년대 초반. 그는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회장, 민주주의민족통일경남연합 상임의장, 경남총선연대 대표 등을 역임했다. 오는 9월6일 창립예정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준비위원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런 길을 선택하기까지엔 ‘베트남에서의 죄갚음’을 위해 뭔가 의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큰몫을 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꼭 베트남에 갈 겁니다. 그때 그 할머니 옆에 있던 애들이 아들인지 조카인지는 모르지만 그 묻힌 자리를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내 죄를 반이라도 씻지 않을까.”

전우들이여, 이젠 합리적으로…

김영만씨는 해병 중박격포 중대 2소대 수평통제원이었다.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을 계산해 핀을 꽂아 포사격 부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을 맡은 것이다. 그는 그 핀으로서 한 마을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든 일도 함께 털어놓았다.

“언제 어느 마을이었는지는 전혀 기억 안 나요. 어느 중대로 배속됐을 때인지도 모르겠고. 하여간 보병중대가 마을 입구로 수색정찰을 나갔다가 부비트랩에 걸린 거예요. 한 사람은 날아가고,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나 그랬어요. 저녁식사 하려고 그릇을 들고 앉아 있는데 긴급하게 무전이 온 거라. 그 마을이 한 40호쯤 됐는데… 보병중대를 철수시키고 바로 그 마을에 무차별적으로 4.2인치 포사격을 했어요. 밤 내내.”

다음날 보병들이 마을로 진입했을 때 살아 있는 생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온 마을이 피바다고, 닭인지 돼지인지 소인지 사람인지 붉은 살점만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주민들이 피신하지 못했다면, 명백한 양민학살이었지요.”

그는 자신과 같이 베트남에 솔직하게 사죄하고 참회하는 참전군인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희망했다. 한국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지 적절한 배상과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참전군인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용서를 비는 분위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다른 생각을 가진 참전군인들의 저항은 예상되는 일. “이제는 좀 합리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목숨을 걸고 베트남에 갔다는 것과, 피아구분이 어려웠다거나 하는 베트남전의 특수성은 있었죠. 하지만 양민학살이라는 전쟁의 광기가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명예를 내세워 변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정하는 것이 개개인에게도 떳떳한 일이에요. 국가부흥에 앞장섰다는 것은 명예로 내세울 일이고 그걸 통해 국가에 배상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과 양민학살에 대해 사죄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분리했으면 합니다.”

그는 베트남에 사죄하고픈 참전군인들의 조직이 만들어진다면, 자신이 궂은 일을 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가령 ‘평화를 사랑하는 베트남 참전군인들의 모임’ 같은 것. 자신처럼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인 병을 앓았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확신 때문에, 누군가 모임을 주도한다면 참여할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해병의 자부심’에 대한 말도 빼놓지 않았다. 전쟁을 혐오하는 건 사실이지만,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할 사람으로서 국군 최정예 부대의 일원이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꼭 넣어달라고 했다.

마산=글·사진 고경태 기자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