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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페인 ] 2000년08월29일 제324호 

[캠페인] 하필 경찰관 부인을 살려보내…

베트남 양민살해 혐의로 11∼16년 감옥생활했던 맹호부대원들의 사연

“베트남전 민간인 사살 군인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난 7월14일치 <동아일보>를 통해 처음 보도된 바 있다. <한겨레21>은 그 직후 대법원 판결을 받은 이들 중 아직도 미사면·미복권된 40명의 명단과 신상명세를 입수했다. 그 자료엔 이름과 계급, 본적, 죄명, 생년월일, 형량 등이 자세히 기입돼 있었다. <한겨레21>은 이 자료를 토대로 한 가지 사건을 추적했다. 40명 중 맹호사단 1연대 2대대 8중대 1소대 1분대원 6명이 살인 및 전지강간 등의 혐의로 연루된 사건이었다. 그들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군 지휘관확정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뒤 11∼16년간 수형생활을 하다 특별가석방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들 중 세명을 직접 만났다.

미사면·미복권자의 한 사람인 김종수(59·충남 공주시 만천교회 목사) 목사는 <동아일보>에 “자신이 죽인 것은 베트콩”이라며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한겨레21>의 취재에 응한 이들 중엔 자신의 행위에 대한 후회를 느끼는 이들이 더 많았다. 물론 ‘죄의 대가’를 다 치른 그들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30년도 지난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폭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군 당국이 아직도 베트남전 양민학살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상황에서, 엄연히 실재하는 ‘공식 기록’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 취재는 이뤄졌다. 취재원의 요청에 따라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으며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편집자







(사진/ 사건의 주인공들. 위쪽부터 전남 완도의 이아무개(병장)과 대전의 이아무개(상병), 전남 장성의 박아무개(병장)씨. 완도 이씨의 손과 손톱은 고엽제 때문인지 썩어가고 있다.)

거짓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한국에 가면 곧 풀려날 것이다.” 상관들의 공언은 거짓말이었다. “사형 선고를 받아도 고국에 가면 집행유예로 다 나온다. 고국에서 너희를 벌 주겠느냐.” 그럴듯했다.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은 베트남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풍문도 돌았다. “전에도 선배들이 강간하고 죽이고 해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고국에서 다 풀려났다.”

그러나 거짓이었다. 그들이 믿었던 고국의 법정은 냉담했다. 상고 기각.

오작교 작전 뒤 방첩대의 호출

법무부에 따르면 베트남전 참전 동안 군법회의를 거쳐 구속된 참전군인은 66년 90명, 67년 136명, 68년 71명, 69년 82명, 70년 70명, 71년 50명, 72년 84명, 73년 18명 모두 601명이다. 전투가 치열했던 참전 초기에 구속된 군인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구속자 가운데는 상관살해나 상관살해 미수, 살인, 살인교사, 전지(戰地)강간(전투지역 또는 점령지역에서 부녀자 강간) 등 중범죄를 지은 이들도 있다. 법무부 자료는 98년 2월 현재 중범죄로 구속된 참전군인들 가운데 미사면자 4명, 미복권자 36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 가운데 수도사단(맹호부대) 1연대 소속 사병 6명이 1968년 4월29일, 모두 무기징역형을 확정받았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이들한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67년 4월, 맹호부대 1연대 2대대 8중대 1소대 1분대원들이 휴양지에서 쉬다 부대로 복귀한 어느 날이었다. 분대원들끼리 모여 쉬고 있는데 갑자기 중대본부에서 분대장을 호출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분대원 서너명이 중대본부로 가 밖에서 살펴보았다. 방첩대(CID). 분대장을 부른 이들은 분명 방첩대 소속이었다. 아, 그 사건이다. 이아무개(54·당시 상병)씨는 “직감적으로 ‘오작교 작전’ 때 있었던 그 일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한다(‘오작교 작전’은 주월한국군이 67년 3월8일∼5월31일까지 맹호사단과 백마사단을 함께 투입해 파월 이후 최대 규모로 벌인 작전이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듯 베트콩을 수색·소탕하면서 맹호는 남진하고 백마는 북진해 푸옌성의 1번국도를 연결·확보하는 작전이었다).

맹호부대 1연대 8중대는 당시 푸옌성 뚜이안(Tuy An)현에서 전투를 했다. 이아무개(56·당시 병장)씨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 매복할 때 베트콩이 기어올라와 2명을 사살했다”며 “다음날 오전 핏자국을 따라 베트콩을 추적했다”고 말했다. 8중대 1소대 1분대원들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파월한국군전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11일에는 112고지와 84고지 수색을 마치고 19:00부터 야간매복에 들어갔는데 제1소대가 20:35경 Phuoc Luong(△84남단)에서 수미상의 VC가 접근하는 것을 포척하고 지근거리까지 유인하여 수류탄과 총격전을 벌여 2명을 사살하고 소총 2정을 노획하였다.”

<파월한국군전사>에는 다음날의 1소대 작전 상황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씨는 “사건이 일어난 마을이 ‘탄롱’마을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푸옌성 기자협회가 조사한 자료에는 “67년 3∼4월에 떤롱(Tan Long)마을에서 13명의 민간인이 살해됐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한국군 전투도를 보면 모두 6곳의 떤롱마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전투도 참조. 분대원들은 취재진이 전사의 기록과 전투도를 보여주자 사건 개요와 장소가 맞다고 확인했다).

교전은 있었는가… 엇갈린 증언


(사진/당시 오작교 작전 전투도. 사건 전날 밤 교전지점(X표시)과 떤롱 마을이 나타나 있다.)


4월12일 아침, 전날 밤 매복지역을 수색하라는 명령이 1분대에 떨어졌다. 교전지에 가보니 2명의 주검이 있었고,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1분대는 핏자국을 따라 베트콩 수색에 나섰다. 핏자국은 해변가에서 뚝 끊겨 있었다. 당시 1분대장 박아무개(59)씨는 “해안을 보니 건너편에 배가 3척이 있었다. 정찰기가 정찰을 하고 있어 우리는 그냥 돌아오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군의 포사격이 시작됐다. 1분대는 퇴각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봤다. 미심쩍었다. 포탄이 배 건너편에 떨어져 물결에 일었다. 빈 배라면 배가 분대가 있는 해안쪽으로 흘러와야 했다. 그런데 배는 해안가를 따라 쭉 흘러내려갔다. 박씨는 “둥그런 호수처럼 생긴 곳으로 들어가는 폭이 좁아지는 지점이 있었다”며 “사정거리에 들어 사격하자 그때야 배 위로 사람들이 올라왔다”고 말했다. 붙잡힌 베트남인들은 12∼13명 정도였다. 노인이나 어린아이는 없었다. 모두 20∼40대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로 무기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여기까지는 당시 분대원들의 증언이 일치한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분대장과 나머지 분대원들 사이에 증언이 엇갈린다.

먼저 분대장 박아무개씨의 증언.

“한 여자를 심문하려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모른다’고 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시까지 철수하라고 해 줄로 묶어서 후송했다. 후송 도중 갑자기 베트콩들이 숲 속에서 공격했다. 초가집이 군데군데 있는 30∼40m 높이의 야산이었다. 엎드려 교전을 하는데 포로들이 줄을 풀고 도망가려고 했다. 그래서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분대원들이 3∼4명씩 데리고 가 사살했다. 부녀자를 강간한 사실은 나중에 재판받을 때 알았다. 나도 남자 4명을 M2로 쏴버렸다. 부대에 돌아가서도 모두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분대원들의 증언은 다르다.

“줄로 묶지 않고 후송했다. 야트막한 산에서 분대장이 여자 한명을 따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 분대장 혼자 돌아왔다. 분대장이 당시 1분대 지원을 나온 3분대장(곽아무개씨)과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사살명령을 내렸다. 교전은 없었다. 명령을 받고 붙잡은 사람들을 3∼4명씩 나눠 초가집으로 끌고 갔다. 여자를 끌고 간 분대원들이 강간하고 모두 총으로 사살했다. 강간만 한 사람도 있다. 주검은 그대로 두고 나왔고, 집도 태우지 않았다.”

당시 분대원들은 모두 “베트콩과 교전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아무개(당시 상병)씨는 “작전이 마무리 단계였고 데리고 가는 게 귀찮기도 했겠지”라며 “무슨 마음으로 분대장이 사살하라고 명령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검의 수를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1분대원들은 붙잡은 이들을 모두 사살한 것으로 알고 철수했다.

옥중에서 북파부대를 지원하다

그러면 방첩대는 어떻게 이 사건을 알았을까? 당시 분대장 박아무개씨는 “포로를 후송할 때 교전했던 베트콩들이 무기도 없는 양민들을 사살했다고 고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분대원들의 증언은 다르다. 홍아무개(56·당시 일병)씨는 “분대장이 임신했던 여자를 살려줬고, 그 여자가 신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기억했다. 방첩대 조사과정에서 이아무개(당시 상병)씨가 들었던 얘기는 더 구체적이다. “분대장이 따로 데려갔던 여자를 임신했다고 해서 살려준 겁니다. 그 여자가 가지 않고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지켜봤다고 했죠. 월남 경찰관 부인이었고, 죽은 사람들은 경찰관의 가족들과 동네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먹을 게 없어 고기를 잡으러 왔다가 걸린 겁니다. 그 여자가 고발해 월남 정부가 발칵 뒤집혔고, 우리를 처벌하라고 데모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조사를 받을 때 현장 검증도 했죠.”

사건에 연루된 1분대원은 모두 8명. 살인 및 살인교사, 전지강간 등의 혐의였다. 이들은 베트남 현지의 군법회의에서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상관들은 “귀국하면 곧 풀려난다”고 위로했다. 이아무개(당시 상병)씨는 “입을 맞출 시간도 없었고, 한국에 가면 바로 나간다고 해 있는 그대로 다 얘기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의 고등군법회의는 항소를 기각했다.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했다. 박아무개 당시 분대장은 “나는 베트콩이라고 확신하고 억울하다고 주장했다”며 “법원은 베트남사람들 얘기만 100%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은 1분대원들이 민간인을 사살했다고 인정했다. 또다른 이아무개(당시 병장)씨는 “‘끌고 간 여자를 왜 살려보내 사건이 터지게 했냐’고 처음에는 분대장 원망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당시의 절망감을 이아무개(당시 상병)씨는 육군교도소에서 있었던 일화로 설명했다. “교도소 안에서 특수부대 지원병을 뽑는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옛날 HID(북파부대)처럼…. 그때 전부 다 거기 가자고 했죠. 어차피 여기서 최소 20년을 썩을 바에야 죽으면 죽고 살면 살자는 식으로…. 그런데 우리는 안 받아 줬습니다. 그때 교도소에서 특수부대에 간 사람도 있고, 아마 우리도 받아줬으면 거기에 갔을 겁니다.”

대법원의 기각 결정 뒤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은 군지휘관 확정 과정에서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됐다. 11∼16년의 징역살이를 하다 특별가석방 등으로 풀려났다. 취재진을 만난 이들은 “왜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내느냐”고 물었다. 전쟁, 민간인 사살, 징역…. 과거를 잊고 이들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33년 전 그때도 이들은 여느 사람처럼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한국의 젊은이들이었다.

“같은 인간인데 후회가 되지…”

“장사 밑천 잡아보려고 월남에 지원해서 갔지.” 이아무개(당시 상병)씨는 베트남에서 받은 월급을 꼬박꼬박 집에 부쳤다고 한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중학교를 중퇴하고 벽돌 찍는 노동일을 하다 군에 입대했다.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오면 구멍가게를 내는 게 그의 소박한 꿈이었다. 이씨는 현재 환경미화원으로 12년째 일하고 있다. 감옥살이를 할 때 인쇄기술을 익혔으나 밖에 나오니 쓸모가 없었다. “감옥에서 나와 2년 정도는 소리를 질러가며 악몽을 꾸었지.

“같은 인간인데, 후회가 되지….”

분대원들은 당시 이아무개 병장을 “한밤중에 작전하는데 찬송가를 불러 따돌림을 받았던” 기독교 신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지난 83년 출소하고 불교로 개종했다. 광주와 전북 부안 등지의 노가다판을 전전하다 지난해 고향인 전남 완도로 돌아왔다. 논·밭도 없이 남의 갯일을 거들며 생계를 꾸려간다. “입대할 때는 군대에 말뚝 박을 생각을 했지.” 출소하고 나서 수기를 써보려고 했으나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 몇 차례나 찢어버렸다고 한다. 손가락의 손톱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썩어가고 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도 바닷가 마을이었지.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던, 그때 내가 그 작전에 투입이 안 됐더라면 어땠을까….”

대전·장성·완도= 글·사진 황상철 기자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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