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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문화&과학 > 과학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3월08일 제6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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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언제까지 가르치려 들까

과학과 대중의 일방적 소통 방식은 1980년대 중반부터 근본적 변화 겪어… 대중이 참여해 내용을 만들어가는 방식, 우리 사회의 성찰이 시급하다

▣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과학에서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특히 과학기술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회적 갈등이 끊이지 않고, 주요 기술의 사회적·윤리적 측면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요즈음 들어 과학문화, 과학윤리, 시민참여 등 여러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소통을 강조하는 주장이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과학자, 과학기술 정책 입안자 등을 중심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전파되는 일방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지식 생산자, 또는 과학정책 수립자들에서 그 소비자들에게 향하는 일방통행식 정보 전달이나 홍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 최근 화려하게 치장한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이 몰려오고 있다. 하지만 기술영향평가는 구색 맞추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사진/ 연합)

실험실과 대중 앞의 실연

이러한 경향은 역사적인 뿌리를 가진다. 근대과학이 처음 수립된 영국에서 실험주의 자연철학이 수립되던 당시부터 자연철학자(당시에는 아직 과학자라는 말이 생기기 전이었다)와 과학을 좋아하던 일부 계층 사이에서 이러한 소통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험실이라는 근대적 공간이 생겨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됐다.

실험실이 수립되는 과정은 근대과학에서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실험이라는 일련의 활동과 그 절차들을 통해서 확증된 지식, 즉 과학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지식 생산 방식이 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실험실은 지식 생산의 중심적인 자리가 되었다. 당시 대중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지식을 확인해주는 증인 구실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참여했던 대중도 실제로는 ‘젠틀맨’이라 불리던 당시 영국의 일부 지위높은 사회 계층으로 국한됐다. 그것은 실험의 증인이 되기 위해 일정한 소양과 자격 요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 당시 영국에는 부와 지위, 그리고 얼마간의 소양을 갖춘 약 3천∼4천 명의 젠틀맨 계층이 있었다고 한다. 과학 사가인 스티븐 셰이핀과 시몬 셰퍼는 유명한 저서 <리바이어던과 공기 펌프>에서 로버트 보일이 했던 공기펌프 실험을 통해 실험주의 자연철학이 다른 자연철학들과의 경합에서 승리를 거두고 과학 연구의 중심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 분석했다.

이후 실험실을 중심으로 한 과학지식의 생산,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가진 대중들이 증인으로 참여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실연, 그리고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같은 실험이 되풀이되는 재연이라는 방식이 과학활동의 표준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했던 유명한 낙하 실험도 이미 경사로에서 확인한 실험 결과를 많은 관중을 모아놓고 극적인 장소에서 확인받기 위한 일종의 실연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근대과학이 처음 그 꼴을 갖추기 시작한 시점에 과학자와 공중 사이의 소통은 일방적이었고, 이 소통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도 제한됐다.

원자폭탄, 환경 문제로 ‘신뢰의 위기’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과학이 제도화, 전문화를 거치면서 과학자들은 더 이상 실험의 증인으로 대중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연구 결과를 심사해줄 학술지나 학술대회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과학이 중요하고, 과학지식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과학자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지면 환호성을 올리고, 세금이나 후원금을 통해 과학활동을 지원하고, 자식들을 이공계로 보내 인적 자원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계몽주의 이래 이런 관계는 계속됐고, 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이 날로 거대화·복잡화되면서 과학자와 대중의 거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 시민참여 과학기술은 꿈이런가. 시민합의회의에서 전력정책 보고서를 발표해도 정책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과학자와 대중의 소통에 대해 처음 문제가 제기된 것은 대략 1980년대 중반이었다. 원자폭탄으로 상징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은 좋은 것’이라는 통념이 크게 흔들렸고, 1960년대 이후 환경운동을 중심으로 과학기술로 인한 문제점에 대한 대중들의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이른바 ‘신뢰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됐다.

오늘날 새롭게 요구되는 과학자와 공중, 또는 연구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당사자와 일반 대중 사이의 소통 양식은 과거의 생산자 중심에서 벗어나 수요자 중심으로 그 흐름을 바꾸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지식이나 정책을 생산하는 과학자나 정책 입안자들이 대중을 향해 일방적으로 ‘과학은 중요하다’ ‘과학기술은 위험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식이 아니라 쟁점이 되는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다양한 관점과 견해를 존중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과학기술의 정책에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들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지식은 17세기처럼 단순하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험실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외에도 연구비를 지원하고 연구 방향을 결정하는 국가나 자본, 언론, 다양한 이익단체들, 그리고 시민사회 등이 마찬가지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기술영향평가라는 제도를 도입하고, 시민공개 포럼이라는 형태로 시민들을 참여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해에 과기부 산하의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UCT)을 대상으로 시민패널을 참여시켜 기술영향평가를 한 것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시민사회의 평가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시도는 바람직했지만 여전히 전문가들이 시민패널들에게 가르치려드는 권위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일정이 촉박하고 내용이 충실치 못해서 구색 맞추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례로 든 기술영향평가뿐만 아니라 최근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 동안 과학을 둘러싼 급격한 인식의 변화를 수용하느라 많은 진통을 겪고 있다. 황우석 사태 이후 국가 생명윤리 자문위원회에서 줄기세포 연구 허용을 둘러싸고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제도들이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겉도는 중요한 이유는 과학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아직도 낡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전히 생산자를 중심에 놓은 채 과거보다 조금 더 유연하게 가르치는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오늘날 벌어지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의 본질을 해결하기는커녕 파악조차 온전히 할 수 없다. 이제 과학의 소통은 그 자체가 내용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고, 그것을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과학 주제에 대해 하나의 관점을 가진 과학자가 다른 관점을 가진 다양한 공중과 토론하고 숙의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무엇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느 쪽도 다른 쪽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강요해서는 안 되며, 다양한 가치와 관점을 인정해야 한다.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슨 위원회들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과학자와 공중, 그리고 정책 입안자와 공중 사이에서 소통이 이뤄질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그 속에서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규칙과 제도를 만드는 작업이다. 이는 외국에서 곧바로 수입할 수 없는 종류이고, 우리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정착시켜야 하는 무엇이다. 과학의 소통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라 우리의 과학을 만들어가는 노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동안의 과학자와 대중의 관계 자체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