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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국제 > 세계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6월26일 제7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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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합중국’ 구멍낸 0.175%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리스본 조약 ‘반대’ 결과… 합중국을 향한 ‘플랜 B’는 나올까

▣ 브뤼셀(벨기에)=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리스본 조약’(옛 유럽헌법)이 위기에 처했다. 지난 6월12일 아일랜드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리스본 조약 비준을 거부했다. 이는 곧 2009년 1월 출범 예정이던 ‘유럽합중국’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작은거인 지난 6월13일 치러진 리스본 조약 비준안 동의투표가 부결되자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에서 유권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있다. (사진/ REUTERS/ NADREW WINNING)

유일한 국민 ‘직접’ 투표 국가

6월13일(현지 시각) 발표된 투표 결과를 보면, 조약 비준 찬성이 75만2451표(46.6%), 반대가 86만2415표(53.04%)다. 27개 회원국이 모두 비준해야 조약이 발효되므로 아일랜드의 반대는 곧 리스본 조약이 발효될 수 없음을 뜻한다. 리스본 조약이 발효되지 못하면 당장 2009년 1월부터 공식 일정에 들어가기로 돼 있는 유럽연합(EU) 대통령, 외무장관 등의 설치 근거가 없어진다. 이로써 유럽연합을 넘어 유럽합중국이 되겠다는 유럽의 야심찬 계획은 일단 중단됐다. 유럽연합의 존재 자체가 다시 한 번 위기에 선 게다.

투표 결과 발표 이후 유럽의 주요 신문과 방송은 매일이다시피 아일랜드의 리스본 조약 부결을 크게 다루고 있다. 일부 신문과 인터넷 블로거들은 “유럽 인구의 0.175%가 4억9500만 유럽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더 큰 ‘재앙’은 아일랜드의 비준 거부가 다른 나라에 연쇄반응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독일·프랑스 등 18개국이 비준을 마쳤다고 하지만, 영국 등 8개국은 아직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브뤼셀 자유대학의 마리오 텔로 교수는 “아일랜드의 리스본 조약 부결은 아직 비준하지 않은 영국의 반유럽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라며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압박도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2005년 유럽헌법안 비준이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뒤, 유럽 정치인들은 리스본 조약 체결 과정에서 부결 위험이 큰 국민투표 대신 의회의 비준 동의를 거치는 쪽으로 발효 절차를 간소화했다. 그러나 아일랜드만은 유일하게 국민투표로 조약 비준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이유가 있다. 지난 1987년 아일랜드 최고법원이 내린 판결 때문이다. 당시 최고 법원은 “유럽연합과 관련된 조약은 아일랜드 헌법을 개정하는 효과를 가지므로 국민투표를 통해 비준해야 한다”고 결정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는 지난 2001년 ‘니스 조약’(유럽연합 회원국 확대 및 내부 기구 개혁 등에 대한 조약) 비준 때도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당시에도 아일랜드 국민들은 비준안을 부결시켰다. 한동안 표류하던 니스 조약은 결국 1년여 뒤 2차 투표까지 가는 진통 끝에 간신히 통과됐다. 지난 2005년 유럽헌법안 비준 때도 비준 거부 우려가 있었지만,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먼저 비준이 실패하는 바람에 아일랜드는 아예 비준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유럽 언론과 전문가들은 아일랜드가 유럽연합 통합에 부정적이라는 점은 ‘지독한 역설’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1973년 유럽연합에 처음 가입할 때만 해도, 아일랜드는 회원국 중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다. 1987년 (유럽 전역의 시장을 하나로 묶어낸) 단일 의정서가 체결될 때만 해도 아일랜드의 국내총생산(GDP)은 회원국 평균의 69%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아일랜드는 유럽연합 평균의 146%에 달한다. 유럽 최고 부자라는 룩셈부르크에 이어 2위다. 아일랜드는 유럽연합에 가입해 경제발전을 이뤄낸 전형적인 사례인 게다.

‘지독한 역설’, EU 가입 뒤 가파른 경제성장

그렇다면 아일랜드 국민은 왜 리스본 조약을 거부했을까? 최근 아일랜드 경제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조세제도 개혁이다. 아일랜드인들은 리스본 조약이 발효되면 유럽 최저 수준인 현재의 법인세율 12.5%(유럽연합 평균 25.04%)가 유럽연합의 조세정책에 맞춰 대폭 높아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법인세율이 낮다는 것은 지금까지 아일랜드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최대 장점이었다. 이번에 비준 반대 운동을 주도한 ‘리베르타스’가 기업 친화 정책을 지지하는 이익 단체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 리스본 조약을 살리기 위해 각국 정상들이 고심하고 있는 사이 유럽 통합에 회의적인 일부 유럽의회 의원들이 ‘아일랜드의 결정을 존중하라’고 쓰인 깃발을 펼쳐 보이고 있다. (사진/연합/ AP PHOTO/ CHRISTIAN LUTZ)

아일랜드인들은 또 리스본 조약으로 자신들이 유럽연합의 방위 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꺼리고 있다. 아일랜드는 1922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줄곧 외교·국방 분야에서 중립 정책을 고수해왔다. 서유럽 국가 대부분이 가입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도 가입하지 않을 정도로 아일랜드인들의 중립정책에 대한 기대는 높다. 리스본 조약이 유럽연합의 권한을 안보와 국방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일랜드 국민이 선선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얘기다. 게다가 오는 7월부터 유럽이사회 의장국이 되는 프랑스가 비밀리에 작성한 백서에 ‘유럽연합 GDP의 6%까지 방위비 증강’ ‘유럽연합 대통령의 임무 중 방위 정책 포함’ 등이 실려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아일랜드 국민의 불안감을 더욱 키웠다.

정치인들의 신뢰성 상실도 비준 거부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기업인들에게 돈을 받은 혐의로 물러난 버티 아헌 전 총리가 리스본 조약 찬성을 외치고 다닌 것은 여론에 오히려 독이 됐다. 게다가 리스본 조약 시스템은 국민에게 설명을 하기엔 너무 지루하고 어려웠다. 심지어 브라이언 코언 현 총리나 아일랜드 출신의 찰리 매크리비 유럽연합 집행위원조차 “조약을 모두 읽어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국민이 리스본 조약을 신뢰하기 힘든 이유가 됐다. 얀피터 본드 유럽의회 의원(덴마크)이 “아일랜드의 리스본 조약 부결은 조약이 만들어진 과정 자체가 투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27개 회원국이 모두 한날한시에 똑같이 국민투표로 리스본 조약의 정당성을 심판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일랜드가 조약 비준을 거부함으로써 원칙적으로 리스본 조약은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유럽의 정치인들은 여전히 리스본 조약에 희망을 걸고 있다. 프랑스의 장 피에르 주예 유럽담당 장관은 2001년 니스 조약 비준 때를 거론하며 “아일랜드에서 2차 투표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유럽헌법을 부결시켜 헌법 논의가 전면 중단됐던 사례를 되돌아본다면, 이번에도 역시 같은 결과가 나와야 맞다. 이 점을 의식한 듯 주제 마누엘 바로수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투표에 앞서 “(설령 부결되더라도) 플랜 B(차선책)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투표 결과가 나온 뒤에 한 인터뷰에서도 바로수 위원장은 “아일랜드 국민의 선택은 2005년 프랑스나 네덜란드 국민의 선택보다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일랜드의 코노 레니한 유럽통합 장관도 “2차 투표까지 부결되면 그 충격이 훨씬 크기 때문에 2차 투표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거들었다.

“아일랜드를 배제해야 한다” 주장도

이런 사정 때문에 일부에선 “아일랜드를 유럽연합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반면 독일·프랑스·영국 등 주요 국가들은 “아일랜드의 비준 반대에도, 나머지 나라에서는 비준 절차가 계속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2차 투표를 염두에 둔 게다.

아일랜드의 비준 거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유럽 인구 중 0.175%의 반대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반대는 유럽연합 27개국 중 유일하게 직접투표에 참여한 이들이 일군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비준에 성공한 18개국보다 아일랜드의 힘이 더 커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