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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국제 > 세계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1월10일 제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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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거대한 선거 후폭풍

지난해 12월27일 대선 이후 부족 간 유혈충돌… 키바키 대통령, 오딩가의 권력 분점은 성공할까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는 유엔환경계획(UNEP) 등 각종 국제기구와 다국적 기업 사무실이 몰려 있다. 지난 2007년 한 해만도 제너럴일렉트릭과 구글, 코카콜라 등이 아프리카 사업본부를 나이로비에 새로 문을 열었다. 케냐의 정치·경제 상황이 이웃한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란 판단 때문이다. 서구 주류언론도 그동안 케냐를 ‘아프리카의 모범생’쯤으로 그려온 터다.


△ 케냐의 부족 간 유혈충돌은 선거 때마다 반복돼왔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부족 간 비방전을 부추긴 것이다. 1월2일 나이로비 시민들이 폭동의 와중에 불타고 있는 집과 가게의 불을 끄고 있다. (사진/ REUTERS/ STR NEW)

지방선거·의회선거마다 연례행사처럼

2007년 12월27일 대통령 선거 이후 하루가 다르게 번지고 있는 유혈 사태는 이런 그간의 인식에 찬물을 끼얹은 모습이다. 일부에선 ‘코트디부아르’와 ‘르완다’를 입에 올린다. ‘실패한 국가’란 조어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하지만 케냐의 최근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런 상황은 기실 충분히 예견이 가능했다.

“백인(선교사)들이 성서를 들고 찾아왔을 때, 우리는 땅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눈을 감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우리 손에는 성서가 들려 있었고, 땅은 백인들이 차지한 뒤였다.” 케냐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1964~78년 집권)가 했던 말이다. 빼앗긴 ‘땅과 자유’를 찾기 위해 지난한 독립투쟁을 벌인 끝에 케냐는 1963년 마침내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대부분의 케냐인의 삶은 그리 달라질 게 없었다. 백인의 자리를 대체한 극소수 지배층에 부와 권력이 편중된 탓이다. 부패와 연고주의가 판을 쳤다.

1978년 8월 ‘건국의 아버지’ 케냐타가 갑작스레 숨지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대니얼 아랍 모이는 2002년 12월까지 옹근 24년을 집권하며 철권을 휘둘렀다. 냉전 시절 에티오피아와 탄자니아에 맞설 ‘반공의 교두보’가 필요했던 서방은 그런 모이 정권을 눈감고 지원했다. 이윽고 냉전은 막을 내렸고, 어느새 얼굴을 바꾼 서방의 원조 중단 압력에 밀려 모이 정권은 지난 1992년 다당제를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그해 12월 실시된 총선은 케냐 역사상 처음으로 복수의 정당이 참여한 선거였다. 당시 선거를 전후로 주로 농촌 지역에서 폭동이 잇따르면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치적 이득을 노린 부패한 정치인들이 부족 간 비방전을 부추긴 탓이다. 이후 1995년과 1997년, 그리고 2005년 등 지방선거와 의회선거가 있을 때마다 부족 간 유혈충돌이 관례로 굳어졌다. 케냐타 정권 시절엔 그의 출신 부족인 키쿠유가, 모이 정권 시절엔 그의 출신 부족인 칼렌진이 ‘공분’의 대상이었다. 2002년 모이의 뒤를 이어 집권한 므와이 키바키(76) 현 대통령도 키쿠유 출신이다.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난 직후부터 국제사회가 케냐에 쏟아부은 원조자금은 줄잡아 160억달러에 이른다. 화훼와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활황세를 이어가고 있는 케냐 경제는 최근 2년 동안 연평균 6%를 웃도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케냐인들의 가난은 끝이 없어 보인다. 유엔개발계획(UNDP) 등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1990년 케냐 인구 가운데 48%가 빈곤선 이하에서 허덕였지만, 2007년 말 현재 빈곤선 이하 인구는 55%로 되레 늘었다. 그 ‘절반의 분노’가 선거 때마다 폭력 사태로 번지고 있는 게다.


△ 키바키 대통령(왼쪽)이 근소한 차이로 오딩가 오렌지민주운동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 유혈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언론 등은 키바키 대통령과 오딩가 후보의 협상을 촉구하고 나섰다. (사진/REUTERS/ RADUSIGHETI·THOMAS MUKOYA/ 왼쪽부터)

키바키, 가까스로 재선 총선은 대패

“케냐 서부 리프트 벨리 지역 쿠르소이 일대는 소수파인 칼렌진 부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의 거점 도시인 뭉게소엔 다수파인 키쿠유족이 몰려 있다. 선거를 앞둔 지난 두 달여 동안 이 일대에서만 부족 간 유혈충돌로 27명이 숨지고, 1만여 명이 유혈사태를 피해 피난을 떠났다.”

2007년 대선을 불과 일주일여 앞둔 지난 12월21일 <알자지라>는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전했다. 키바키 대통령이 라일라 오딩가(62) 오렌지민주운동(ODM)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 폭발적으로 번지고 있는 유혈사태의 전조였던 게다. 비슷한 상황은 ‘아프리카 최대 슬럼가’로 불리는 수도 나이로비의 키베라 빈민촌에서도 벌어졌다. 다양한 부족 출신의 도시 빈민 약 100만 명이 몰려 있는 키베라에선 개표 결과 발표 직후부터 사실상 무법천지가 연출되고 있다.

키쿠유 주민들을 겨냥한 폭력사태는 이미 ‘인종청소’란 살풍경한 단어까지 등장시켰다. 키바키 대통령이 서둘러 취임식을 치른 지 이틀 만인 1월1일 리프트 벨리 지역의 엘도레트에선 오딩가 후보의 출신 부족인 루오족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유혈사태를 피해 키쿠유 주민들이 몸을 숨긴 교회 건물에 불을 질러 3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어린이와 여성이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케냐 적십자사 관계자의 말을 따 “리프트 벨리 지역에서만 유혈사태를 피해 피난길에 오른 난민이 7만 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아프리카 최대 난민 보호국 중 한 곳인 케냐가 난민 양산국으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퍼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재선에 ‘성공’한 키바키 대통령이 이번 사태를 해결할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002년 대선에서 야권 ‘무지개연합’을 이끌고 60%가 넘는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됐던 그는 이번 대선에서 은퇴한 독재자 모이의 지지까지 청해야 했다. 대선과 같은 날 치러진 총선에서도 키바키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통합당(PNU)은 의회 전체 210석 가운데 35석을 얻으며 참패했다. 여기에 새뮤얼 키부이투 케냐 선관위원장이 1월1일 현지 일간 <더스탠더드>와 한 인터뷰에서 “선거 결과를 조기에 발표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솔직히 키바키 대통령의 당선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증언을 했다.

정치범 출신으로 2002년 대선에서 야권의 ‘킹메이커’ 역할을 했던 오딩가 후보가 키바키 대통령과 권력 분점에 나설 가능성도 높지 않아 보인다. 키바키 대통령은 지난 5년의 집권 기간에 오딩가 후보 진영과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 대권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하는 그가 이끄는 오렌지민주운동은 이번 총선에서 100석을 확보했다. 과반에 육박하는 의석이다. 오딩가 후보는 키바키 대통령의 선거 패배 인정을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다.

일주일 만에 300여 명 목숨 잃어

“사랑하는 우리의 조국, 케냐 공화국이 불타고 있다.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다. 경제는 마비 상태고 파괴의 군홧발이 리프트 벨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재난을 부추긴 지도자들은 나이로비의 안락한 호텔방과 높다란 담벼락이 둘러쳐진 자신의 거처에서 마음에도 없는 평화 촉구 성명이나 내놓고 있다.”

케냐 언론들은 1월3일치 사설에서 일제히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자”며 키바키 대통령과 오딩가 후보의 협상을 촉구하고 나섰다. 유력 일간지 <더네이션>은 이날치 사설에서 “어떤 이유로도 무고한 케냐 어린이들의 피를 흘리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키바키 대통령과 오딩가 후보가 적절히 권력을 나누고 안정을 되찾기 위한 협상에 즉각 나서는 것만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두 사람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맞붙는 사이, 불과 일주일 만에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