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목차 지난호보기 독자마당 기사에대한의견

한겨레21 구독신청 sitemap

e-Book
표지이야기 특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과학 인터뷰 스포츠/건강 사진/만평 칼럼 독자마당
Home > 국제 > 움직이는 세계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11월23일 제636호
통합검색  검색
체 게바라, 남미의 예수

순례자의 마음으로 찾은 혁명가가 숨을 거둔 산골마을 라이게라…광장에는 거대한 상이 서 있고 사람들은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네

▣ 라이게라(볼리비아)=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하영식의 남미기행 ③

남미에선 예수 그리스도가 체 게바라의 이미지로 서서히 대체되고 있다. 게바라가 그토록 혁명을 원했던 뉴욕에서도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흔히 볼 수 있고, 그의 책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해 전세계 젊은이들의 열광을 받았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던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처럼 혁명가가 마지막 숨을 거뒀던 작은 마을 ‘라이게라’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이들로 ‘혁명의 성지’로 변해가고 있는 모양새다. 혁명가의 발자취를 좇는 순례자의 마음가짐으로 그 길에 동참했다.

비포장 산길 따라,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라이게라로 가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버스로 40시간을 달려 볼리비아의 세 번째 도시인 산타크루스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한 뒤, 이른 아침부터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지붕 위에다 짐을 가득 실은 만원버스는 ‘발레그란데’(대계곡)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당신의 자취가 새 새벽을 밝힌다.’ 라이게라 마을 광장에는 체 게바라 흉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가 태어난 아르헨타나의 로사리오보다 그가 숨진 이곳을 더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도시를 벗어나 산악지역의 비포장길로 들어선 버스는 게릴라들의 행군처럼 과격한 질주를 7시간이나 지속했다. 발레그란데에 도착해 다시 하룻밤을 보냈다. 게바라와 몇 명의 게릴라들의 주검이 이곳에 묻혀 있다.

진짜 볼리비아 여행은 발레그란데에서 라이게라로 가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행선지가 같은 볼리비아 인디오들이 시장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놓고서 트럭이 떠나는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이 떠날 시간이 되자 우리는 물건들과 함께 뒤엉킨 짐칸에 모여앉았다. 모두들 다리를 쪼그린 상태로 3시간여를 보내야 했다.

3천m가 넘는 산허리를 깎아지른 비포장 산길을 따라 달리는 트럭의 아래로는 수천 길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였다. 고산지역이어서 기후의 변화도 급격했다. 갑자기 나타난 해가 차가운 공기를 무덥게 만들었다간 이내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갑작스럽게 가는 비까지 뿌려대기 시작했다. 산 정상에 들어서자 비는 멈췄지만 공기는 더욱 싸늘해졌고, 모두들 두꺼운 외투를 걸쳐입든지 담요를 뒤집어써야 했다.

라이게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은 ‘부카라’이다. 마을 광장을 중심으로 지어진 집들의 벽에는 게바라의 초상이 군데군데 그려져 있었다. 외지에서 온 방문객들을 환영한다는 표시였다. 게바라는 외지인들과 마을 사람들을 잇는 유일한 끈이었다. 반시간쯤 더 산길을 달려가자, 다시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광장에 게바라의 얼굴이 조각된 거대한 상이 정면에 보였다. 그 아래에는 큼직한 스페인어로 새겨진 ‘당신의 자취가 새 새벽을 밝힌다’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라이게라는 스무 채 정도의 집들이 전부인 작은 마을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보다는 그가 죽었던 이곳이 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인간에게는 어떻게 태어나느냐보다는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다시 게릴라가 되어서 온 볼리비아

라이게라에는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에서 온 2명의 젊은이들이 머물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젊은이는 게바라가 공부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의사 후보생’이었다. 그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소개했다. 스페인에서 온 젊은이는 안달루시아 지역의 코카콜라 공장에서 병박스를 나르는 노동자였다. 노동운동에 열심인 노조원이라며 팔을 들어보이기도 한 그는 “국적을 떠나 전 대륙을 상대로 혁명운동을 벌였던 게바라의 정신은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다.

게바라는 1967년 10월9일 이 마을의 작은 학교에서 처형됐다. 교실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작은 학교는 몇 년 전부터 게바라의 사진들로 가득 찬 박물관으로 개조돼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바라의 일기에는 “라이게라로 들어왔을 때 단지 서너 명의 나이 든 부녀자들만 남아 있었다”고 적혀 있다. 마을의 남자들은 볼리비아군의 명령에 따라 모두 인근 지역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주민 일마(60)는 게바라가 당시 90살이던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한 마을의 부녀자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 ‘살아 있는 신화.’ 라이게라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열고 있는 일마는 자기 어머니가 체 게바라와 찍었던 사진을 자랑스레 꺼내 보였다.

혁명가가 사살된 학교 바로 옆에 살고 있는 주민 코르테즈(64)를 만났다. 그는 이곳을 방문한 언론에 뉴스거리를 제공하는 인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는 “일이 잘 되지 않고 병이 들면 체 게바라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면 모든 게 잘 풀린다”고 말했다. 죽은 혁명가는 살아 있는 코르테즈에게 신앙이 돼 있었다.

게바라가 볼리비아를 택한 이유는 남미에서 볼리비아가 차지하는 지리상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페루 등 남미의 중심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볼리비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면 남미 대륙 전체가 혁명의 물결로 뒤덮일 것이라는 전략적인 판단에서였다. 그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미국의 목전에 위치한 쿠바에서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혁명 뒤에는 쿠바 정부의 장관직을 맡아 일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게릴라가 됐다.

당시 미국의 눈에 비친 게바라는 지금의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인물이었을 게다. 그러니 게바라가 볼리비아로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정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즉각 볼리비아 군인들을 훈련시키고 현대적인 무기와 장비, 자금을 제공하면서 게바라 ‘사냥’에 나섰다.

남미를 뒤덮은 선거를 통한 혁명

1966년 말부터 1년 가까이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운동을 했던 게바라 그룹은 산악지역에 사는 볼리비아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볼리비아 공산당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배신이 가장 큰 약점이었고, 산악지역의 농민들을 지지세력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볼리비아 농민들은 당시 게바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게릴라들을 “쿠바인들”이라고 빈정대며 부르기도 했다.

볼리비아군에 쫓겨 산악지역을 방황하다 지친 몸으로 라이게라에 왔던 17명의 게릴라들은 마을 사람들로부터도 배신을 당했다. 게릴라들이 들어오자 마을 사람들은 사전에 이들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인근에 포진하고 있던 볼리비아군 부대로 “쿠바인들”이 왔음을 전화로 통지했다. 혁명을 지원하리라 믿었던 가난한 농민들이 혁명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2주 정도 라이게라 부근에 머물던 게바라의 게릴라 그룹은 그곳을 둘러싼 볼리비아군과 전투를 벌이다 몇 명은 전사했고, 부상당한 게바라와 나머지는 생포돼 처형당했다. 처형 당시 게바라는 39살에 불과했다.

남미 대륙에서 제국주의의 착취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가의 꿈은 40년 전 라이게라에서 좌절됐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칠레·볼리비아·니카라과에서 선거를 통한 새로운 혁명이 꿈틀대고 있다. 볼리비아의 작은 마을에서 흘린 젊은 혁명가의 피가 헛되지 않았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