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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문화&과학 > 문화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8월21일 제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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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도피의 딴 이름

재능도 열정도 가능성도 없는 스물여섯 수연의 ‘유학 소망기’ <여기보다 어딘가에>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그의 당면 과제는 어떻게든 이 나라를 ‘뜨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넘게 ‘백조’로 살아온 스물여섯 살 수연(차수연)은 “직업이 뭐냐” “취직 안 하냐”는 말이 지긋지긋하기만 하다. 물론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범답안처럼 내놓는 말이 있다. “영국으로 유학 가서 뮤지션이 될 거야.” 그러나 그는 유학을 준비하거나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냥 영국으로 유학을 가면 뮤지션이 될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있을 뿐이다.


△ 감독은 ‘꿈’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진입한 불안한 청춘들을 통해 어느 때보다 꿈을 꾸는 것이 어려워진 시대를 꼬집는다.

아무런 준비 없이 꾸는 꿈

영화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유학을 보내달라고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부리는 수연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는 유럽여행을 다녀온 친구 이야기를 꺼내면서 “부모면 부모답게 돈 좀 줘야 되는 것 아냐”라고 말하는 철딱서니 없는 딸이다. 그렇지만 이 정신 없는 딸이 펼쳐대는 ‘생떼 신공’에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자식들의 숙적인 ‘엄친아’를 기어이 끄집어내 딸의 입을 틀어막는다. “엄마 친구 아들은 부모님 유럽여행 보내줬대.”

수연은 유학 비용을 벌어보겠다고 보란 듯이 가출하고, 막 군대에서 제대한 친구 동호(유하준)의 자취방에 무작정 눌러앉는다. 오늘날 ‘88만원 세대’로 대변되는 이들에게 십대의 꿈은 까마득하고 스무 살의 로맨스는 시들하다. 오직 절박한 것이 있다면 ‘먹고사는 문제’뿐. 그렇게 영화는 ‘꿈’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진입한 불안한 청춘들을 카메라 앞에 불러세운다.

올해로 스물아홉 살인 이승영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 하릴없는 동시대 청춘들을 ‘찌질’하게 담아낸다. 그들은 늘 멍하고, 게으르고, 뭔가를 위해 준비하는 법이 없다. 노력과 열정, ‘싸가지’와 책임감 따위는 밥 말아먹은 지 오래다. 꿈이 있다고는 하나 그 꿈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꿈을 이루느라 힘들다고 말한다. 사실은 꿈이 아니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하면서도 말이다. 무조건 유학만을 부르짖는 수연에게 ‘꿈’은 도피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시대는 점점 더 치열한 삶을 요구하고 경쟁을 부추기지만 그에게는 열정도 의욕도 없다. 자신에게 닥치는 현실이 마냥 버겁고 힘들 뿐이다. 그곳에서 달아나고 싶은데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재능도 없고, 열정도 없다. 그리고 이 ‘쥐뿔’도 없는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더욱이 수연은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고, 무대 위에서 악기에 손을 올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무대공포증을 갖고 있다. 뮤지션이 되기 위한 조건보다는 되기 어려운 조건을 죄다 갖췄다. 그래서 변명처럼 내세우는 것이 바로 ‘꿈’이다.

그래도 꿈을 꾸라

그렇지만 영화는 이 비루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청춘에게 “그래도 꿈을 꾸라”고 너그럽게 이야기한다. 감독은 원더우먼이 되기엔 너무 많이 살았고 대학생활이 끝난 뒤에는 웃음을 잃어버린 20대를 통해 어느 때보다 꿈을 꾸는 것이 어려워진 시대를 꼬집는다. 그리하여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취업도 고민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스러운 우리 시대 청춘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단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시종일관 ‘멍 때리는’ 표정으로 입을 ‘헤’ 벌린 채 어색한 연기를 이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영화의 빛을 흐리게 한다는 점. 8월21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