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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문화&과학 > 문화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7월03일 제7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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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비틀거리는 시대의 전위

100여 년 전 구한말과 일제 시대 청년들에 대한 연구서 <부랑청년 전성시대>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부랑청년 전성시대>(소영현 지음, 푸른역사 펴냄, 1만5천원)는 20세기 초 청년에 대한 연구서다. 이 책을 통해 구한말과 일제시대 청년들의 모습을 그려보자. 미리 말하자면, 이것은 일면적인 독해다. 당시 ‘청년’이란 기호는 근대라는 문맥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책은 현재 우리의 삶을 규율하고 있는 근대의 기원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전에 일단, 100여 년 전 젊은이들의 삶에만 집중해보자.


당시 청년은 조선반도에 출현한 최초의 ‘문화적 인간’이다. 시작은 패션이었다. 남자라면 ‘세비로’ 양복을 갖춰입고 ‘맥고모’를 쓰고 단장을 들어야 했다. 외국산 궐련인 ‘칼포’ 정도는 피워줘야 했다. 여자라면 긴 드레스나 양장 투피스 한 벌쯤은 마련해두어야 했다. 이들은 활동사진관을 구경하고 시내를 산보하고 강연회, 음악회, 문예전람회에도 들러야 했다. ‘명월관’ 같은 요릿집에 출입하는 청년들은 처음 나타난 소비문화적 주체였다.

시대가 이들을 반기기만 했을 리 없다. 1910년대부터 조선 사회는 ‘부랑청년’을 분류해내기 시작한다. 1920년 <학지광>에 실린 고영환의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부랑청년들은 미친 개 토벌하듯이 있는 대로, 다 처없애버려야 하겠다고, 나는 단언하오.” 가장 문제적인 집단은 ‘고등 부랑청년’들이었다. 지은이는 이들이 “3·1운동 전후로 변혁의 기운이 가져다준 양가적 감정, 희망과 좌절감을 가슴에 품고” “의식과 생활의 간극 앞에서 살아 있는 시체처럼 참담한 포로생활을” 이어갔다고 분석한다.

청년 담론의 핵심은 ‘민족의 중추’이자 ‘근대국가 건설의 주춧돌’이다. 이것은 ‘입신출세’로 구체화됐는데, 철저히 학력을 취득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유학생들은 출세의 압박을 받으며 스스로 미래와 대결했다. 그중에서도 가난한 고학생들이 겪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끔찍했다. 도쿄와 경성에서, 이들은 거지나 도둑으로 오해받으며 목숨을 끊기도 했다. <아리랑>에서 김산은 “부유한 ‘달걀껍질’들은 우리를 두려워했으며 비적이라고 불렀다”고 회상한다.

연애는 근대 청년들이 저지른 놀라운 사건이었다. 가족제도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이들은 “전차에서 맞닿은 몸의 열기, 보송보송한 어깨의 감촉”을 발견하게 된다. 인습 때문에 사랑의 본능이 억압됐다는 인식이 생겨났고, 가문이 정해놓은 정혼자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총인구 비례로 따지면 경성의 이혼율이 도쿄 이혼율의 10배 이상이었다는 1931년의 기록도 있다. 이혼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패륜이었으나, 청년 편에서 보면 내적 감정을 지닌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였다.

그러나 청년으로 호명되는 존재는 남성뿐이었다. 이들은 ‘신여성’을 이상적인 연애 상대로 느끼면서도, 허영덩어리로 치부하기도 했다. 정작 열망과 공포의 대상이 된 매혹적 여성들에게 자유연애는 금기였다. ‘연극장’은 “화증 김에 서방질한다고 음란한 행실만 점점 늘어가는”(최찬식의 <안의성>, 1914) 부녀자들의 온상으로 규정된다. 교육받은 여성은 이상적 가정을 꾸리는 데 복무해야 했다.

1880년 일본의 기독교인 고자키 히로미치가 ‘Young-men’을 청년으로 번역했다. 이 용어는 1897년 조선에 상륙했다. 근대는 청년을 시대의 전위이자 민족 번영의 핵심으로 배치했다. 이들은 계몽의 주체이자 계몽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새로 부여된 어마어마한 임무와 새롭게 발견된 욕망의 충돌을 경험했다. 이들은 미래의 희망이자 절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