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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문화&과학 > 문화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4월24일 제7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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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할아버지의 마음, 조선의 마음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쓴 김찬웅씨… “마흔에 얻은 아이 떠올리며 이문건의 <양화록> 재구성”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문건은 1494년 명문 사대부가의 막내로 태어났다. 기묘사화에 연루돼 둘째형이 사약을 받았다. 6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1545년엔 을사사화에 휘말렸다. 조카 이휘는 온몸이 찢긴 채로 들판에 뿌려졌고 그는 경북 성주로 귀양을 떠났다. 23년 동안 유배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죽음이 삶보다 가까운 인생이었다. 선비로서의 모든 가능성이 절멸된 그때, 손자를 얻었다. 아기는 세상이 그를 위해 남겨놓은 단 하나의 미련이었다. 이문건은 이와 벼룩이 아기를 물어뜯지 않고 자신에게 왔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4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죠. 애를 키운다는 건.”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김찬웅 지음, 글항아리 펴냄, 1만5천원)는 이문건이 손자를 키우면서 쓴 육아일기 <양화록>을 풀어쓴 책이다. 지은이 김찬웅(46)씨는 자신의 첫 책을 들고 ‘애를 키우는 마음’에 대해 말했다. 김씨는 나이 마흔에 어렵게 아들을 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부모는 한 가지 물음 앞에 알몸으로 서야 한다. 내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키워야 할까. “아줌마들이 유치원부터 선택을 하기 시작해요. 어떤 선생은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이 ‘닭싸움’은 부모들을 외롭게 만든다. 그 와중에 김씨는 조선 자료들을 뒤지다가 <양화록>을 만났다.

이문건의 아들은 어릴 때 열병에 걸린 뒤 머리가 둔해지고 엉뚱한 짓을 일삼했다. 그래서 손자가 더욱 소중했다. “태어난 지 이제 7개월, 아랫니 두 개가 났다.” “손자가 조금 놀라도 할아비는 많이 놀란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외출하면 자지 않고 기다리고, 돌아오면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잠을 잤다. 가부장에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자랄수록 공부 시간에 딴청을 부렸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술에 만취하는 등 엇나가기 일쑤였다. 매질이 시작됐다. 피울음같은 매질이었다. 지은이는 이문건을 “화를 자주 내지만 쉽게 후회하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라고 짐작했다. 손자를 때린 날 밤, 그 여린 마음은 이런 일기를 쓰게 만든다. “성급하게 가르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야 이문건은 자신의 난폭함을 경계하고 절대 매를 들지 않는다.

출판 기획자로 일해온 지은이는 조선 시대 사람들에 대한 책을 계속 쓸 예정이다. 두 번째 책은 불우한 시인과 화가들에 대한 책이 될 것 같다. 우리에게 조선은 무엇일까. 그는 “변하지 않는 마음”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일제와 근대화라는 장벽이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이어지는 것이라고.

이문건의 마음을 이어받은 손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싸웠고 나라가 상을 내리려 하자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며 거절했다. 할아버지의 육아일기는 가보로 전해지고 있다. “그럼 이문건의 육아는 성공한 거네요?” “그렇죠.”

헌법은 온갖 아름다운 말들로 가득한데 신문은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이 자란다. 말썽쟁이를 두고 온 지은이와 떼쟁이를 혼내고 출근한 기자는 함께 400여 년 전 어느 노인의 방을 엿보았다. 그는 낮에 아이를 때린 자신을 질책하며 호롱불 앞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할아버지처럼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거칠게 대하지 마라. …지금 사는 세상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날마다 깊이 살피며 한순간도 헛된 것에 힘쓰지 마라.” 머지않아 그는 떠나고 손자가 홀로 앉아 일기를 읽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