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과학 라이프&트렌드 이번호목차 지난호보기 독자마당 기사에대한의견

한겨레21 구독신청 sitemap

e-Book
표지이야기 특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과학 인터뷰 스포츠/건강 사진/만평 칼럼 독자마당
Home > 문화&과학 > 문화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8월09일 제622호
통합검색  검색
그들의 투명한 이혼에 울고 웃네

미워할 수 없는 네 남녀를 감싸안는 페이소스의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강력반 형사와 장애아 엄마의 갈등 속에서 아버지의 빈 자리를 발견하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국방송 수·목 드라마(저녁 9시50분) <투명인간 최장수>(<최장수>)는 부인에게 이혼당한 중년 남성이 조발성 알츠하이머(치매)에 걸려 죽어가는 이야기다. 누구는 <최장수>를 보면서 아내가 암에 걸려 숨지는 이야기였던 <장밋빛 인생>의 ‘남편판’이라고, 또 누군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아저씨 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설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장수>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다.


△ 유전성 알츠하이머에 외상성 알츠하이머까지 겹친 최장수는 급격하게 기억을 잃어간다.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간다.(사진/ 한국방송)

<최장수>는 이혼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근래에 보기 드물게 투명한 드라마다. 우선 <최장수>에는 지독한 악역이 없다. 국가대표 유도선수 출신의 강력반 형사 최장수(유오성)는 가족을 위해 주야 근무 가리지 않고 한 몸 바쳐 일하다 이혼을 당한 억울한 사연이 있고, 최장수의 아내 오소영(채시라)에게도 격무를 이유로 밖으로만 도는 남편에게 질리고 질려서 이혼한다는 정당한 사유가 있다. 대개는 악역으로 그려질 부부 화해의 방해꾼들에게도 저마다의 매력이 있고, 사랑받을 이유가 있다. 오소영의 첫사랑이었던 하준호는 여전히 첫사랑 같은 애절한 마음으로 오소영을 사랑한다. 하준호는 멋진 외모와 빼어난 재력을 지녔지만, 외모와 재력을 무기로 오소영에게 무조건 ‘들이대지도’ 않는다. 오소영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오소영이 원하는 거리를 적절히 지켜준다. 최장수를 사랑하는 조현수(최여진)에게도 최장수를 사랑할 이유가 있다. 천애고아 같은 처지의 소매치기 현수에게 장수는 “빵에 있을 때 유일하게 사식 넣어주고, 영치금 넣어준 사람”이었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적개심도 비극도 없다, 지독하지 않다

<최장수>에는 <장밋빛 인생>의 초반부에 바람난 남편이 보였던 악행이 없고, <하늘이시여> 같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지독한 악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최장수>는 적개심의 공동체를 만드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한없이 선한 주인공과 끝없이 악한 인물을 대립시켜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 ‘독한 방법’도 쓰지 않는다. 처절하도록 비극적인 주인공에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어서 시청자들의 눈물을 짜내지도 않는다. 그저 큰 잘못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저마다 사랑받을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서로 지독하게 미워하지 않으면서 이혼을 하는 부부가 등장하고, 이혼한 아내가 남편을 보면서 “당신도 잘 살아야 돼”라고 말하는 드라마다.

<최장수>는 결국 역할 모델에 대한 이야기다. <최장수>의 주인공들에게는 아버지가 부재했다. 최장수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재혼을 해서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최장수>의 박계옥 작가는 “어렵게 결혼한 장수는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싶었겠지만, 장수에게 장애인 아들이 생겼을 때 장수는 어찌할 줄 몰라 집 밖으로 도는 아버지가 됐다”고 설명했다. 어버지의 역할 모델이 부재했던 장수에게 장애아의 아버지는 버거운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수는 바쁜 경찰 일을 이유로 집 밖으로 도는 비겁한 선택을 했다. 아버지 최장수의 의도치 않은 실수는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 다미를 돌보던 어느 날 다미에게 치즈햄버거를 주면서 드러났다. 다미가 극심한 유제품 알레르기를 가진 줄 장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미는 생사를 오가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소영은 장수의 실수를 계기로 이혼을 결심한다. 이렇게 <최장수>는 아버지 최장수의 무관심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최장수의 실수를 자연스레 드러냈다. 대개의 인간사가 그렇듯, 장수의 실수는 소영에게 치명적인 결함으로 다가온다. 장수는 다미를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소영은 “그 인간은 다미를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다”고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한다. 장수를 좋아하는 현수에게도 아버지는 부재했다. 아버지는 가출하고 재혼한 어머니와 살았지만 자신도 10대에 가출했다. 소매치기를 하면서 살아가던 현수는 강력반 형사인 장수에게 붙잡혀 감옥에 가지만 오히려 현수는 장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장수를 사랑하게 된다. 소영을 사랑하는 준호도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부재는 준호와 현수에게 조금은 어긋난 사랑을 선택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대신 소영에게는 완벽한 아버지가 있었다. 신부전증을 앓는 소영이 눈치채지 못하게 딸에게 신장을 주고, 소영이 일을 나가면 손자·손녀를 도맡아 돌보는 아버지가 있다. 이렇게 헌신적인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소영만이 밖으로 도는 남편을 내치면서 아이들을 지키려는 어머니로 나온다. 이렇게 <최장수>는 아버지의 자리를 묻는 드라마다.

유오성·채시라의 빼어난 연기, 자연스런 입말

<최장수>는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묻는 남자 드라마지만, 그렇다고 여성들을 주변화화지는 않는다. 바람 피우지 않은 남편과도 이혼할 수밖에 없는 ‘그 여자의 사정’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 현수는 장수에게 “처음 볼 때부터 사랑했다”고 말한다. 현수는 장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사진/ 한국방송)

소영이 얼마나 억척스럽게 살아왔는지가 지나치지 않게 그려지면서, 소영이 다시 나타난 첫사랑의 왕자님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도 현실감 있게 드러난다. 결국 소영은 여자의 욕망을 엄마의 자리에 내어줄 수밖에 없지만, <최장수>는 소영의 갈등을 무심하게 외면해버리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 경찰이라는 남성성이 강한 직업세계를 그리지만 남성성을 일방적으로 찬양하지도 않는다. 가끔은 장수에게 에어로빅 의상을 입히고 에어로빅을 따라하게 하는 재치도 빠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유오성과 채시라의 연기는 <최장수>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최장수를 연기하는 유오성은 씩씩하면서도 구슬픈 연기로 오랜만에 돌아온 드라마에서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최장수 캐릭터는 유오성의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다. 유오성은 범인과 ‘맞장’ 뜨기를 주저하지 않는 귀여운 형사 최장수 역할도,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혼자서 쓸쓸히 죽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 최장수의 연기도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채시라는 ‘엄마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채시라가 아픈 아들의 목에 연고를 발라주면서 “어때 시원하지, 이쁜 우리 새끼”라고 말할 때, 정말로 그의 얼굴에는 ‘엄마 표정’이 새겨진다. 이렇게 불치병에 걸린 남편과 화해하는 아내 이야기라는 어찌 보면 평범한 설정은 사건의 구체성과 주인공의 연기로 실감나게 살아난다. 조현수를 연기하는 최여진의 당돌한 표정도 10살 넘게 많은 아저씨를 사랑하는 아가씨의 심리를 어색하지 않게 그려낸다.

<최장수>의 구성도 드라마치고는 평범하지 않다. 보통의 드라마 어법이라면, 소영이 장수와 이혼하는 이유가 드라마의 초반에 모조리 나왔겠지만, <최장수>는 모든 사정을 드러내놓고 시작하지 않았다. 드라마 중간에 회상신과 환상신을 섞어가면서 소영이 왜 헤어지려고 하는지, 장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서서히 드러낸다. 그래서 소영이 이혼을 선택하는 이유가 처음에 충분히 설득되지 않지만, 서서히 이해된다. 이혼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흔히 극단적인 갈등을 전제하고 감정을 폭발시킨 이후에 그 감정의 여운으로 ‘연명’하는 데 비해, <최장수>는 시공간을 오가면서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자연스러운 ‘입말’은 <최장수>에 자연스러움을 불어넣는 또 하나의 비결이다. 단순하지만 유쾌한 최장수의 캐릭터는 “오카이”라는 한마디로 드러난다. 최장수는 “오케이”를 발음기호 그대로 읽어서 “오카이”라고 발음하는데, 이 한마디는 최장수의 성격을 한마디로 드러낸다. 최장수가 소속된 강력반의 반장으로 나오는 안석환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이 새야, 새야”(“새”는 “새머리” 또는 “새끼야”의 줄임말로 들린다)에서도 거칠지만 귀여운 남성성이 느껴진다. 이렇게 평범한 상황에 적절한 코드를 새겨넣은 대사는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예컨대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실을 알고 소영과 이혼을 순순히 받아들인 장수가 가정법원 앞에서 소영에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지금까지 같이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시청자들은 눈물 짓게 된다. 때때로 상황이 만들어내는 역설은, 주인공은 웃고 있지만 시청자는 울게 만드는 페이소스에 이른다.

오소영의 갈등이냐, 최장수의 눈물이냐

<최장수>는 8월4일로 20부작 가운데 10부를 끝내고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원래 <최장수> 홈페이지에 소개된 기획 의도는 두 가지였다. 최장수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억울한 인생과 오소영으로 상징되는 우리 시대 아줌마들의 욕망을 이야기의 두 축으로 삼았다.


△ 준호는 소영을 사랑하지만, 소영에게 사랑해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곁에서 소영을 돕는다.(사진/ 한국방송)

드라마의 절반이 끝났지만, 오소영의 욕망과 갈등은 시청자들과 충분히 소통되지 못했다. 아니 시청자들은 오소영의 갈등보다는 최장수의 눈물을 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오소영의 연애담이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부부의 화해 국면으로 접어들 <최장수>에서 오소영의 갈등이 빠진다면, 드라마는 신파로 빠지기 십상이다. 이것이 중반부를 넘어서는 <최장수>에 남은 숙제다. 참, 제목이 ‘투명인간’인 이유는 장수의 아이들이 들려주었다. “우리 눈에 아빠가 안 보여도요, 아빠는 늘 집에 들어와서 우리들 자는 거 보고 엄마랑 자고 간대요.” 물론 ‘투명인간’에는 최장수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간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슬픈 이야기라도 웃으면서 봐달라"

후반부에선 가는 사람과 산 사람이 이별하는 법을 보여줄 예정

인터뷰/ <투명인간 최장수> 작가 박계옥

<투명인간 최장수>의 박계옥 작가는 베테랑 시나리오 작가다. 95년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해 <돈을 갖고 튀어라> <깡패수업> <댄서의 순정> 등 13편의 시나리오를 쓰거나 각색했다. <투명인간>은 <줄리엣의 남자> 이후 오랜만에 쓰는 장편 드라마다. 박 작가는 오랜만에 드라마를 쓰면서 재미도 느끼고 갈등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소영과 준호의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갔으면 했는데,


△ (사진/ 이명국 인턴기자)

시청자들은 소영과 장수를 빨리 화해시키라고 주문한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소영과 준호의 이야기가 끝나버리면, 드라마가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는 고민이다. 그는 남자들의 입말이 절묘하다고 했더니 “<깡패수업> 같은 영화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편 이야기라는 설정이 <장밋빛 인생>이나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겹친다.

=<투명인간>의 아이디어는 이미 2002년에 나왔다. 오래전부터 가족을 위해 열심히 회사 일을 하지만, 회사 일 때문에 가정에 소홀해 결국 가족에게 외면당하는 가장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장밋빛 인생>의 남편 버전이라는 이야기는 억울하다. 드라마를 보는 주부들이 최장수의 이야기면서 내 남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드라마의 기획 의도에 찰리 채플린과 로베르토 베니니가 언급돼 있다. <투명인간>에도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장면이 적지 않다.

=슬픈 이야기라도 웃으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삼십대 후반이 되니까 웃으면서 눈물이 나오는 페이소스의 의미를 내가 조금은 이해하는 것 같다.

소영이 왜 이혼을 원하는지가 설명되지 않고 전제돼 있다는 느낌이다.

=소영은 10대에 신장이식을 받았다. 이식받은 신장의 기능이 보통 30년을 간다고 하는데, 소영은 10년은 장수를 기다리면서, 10년은 장수와 함께 살면서 보냈다. 소영에게는 10년의 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소영은 나머지 10년을 온전히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어한다.

앞으로 후반부에서 그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잘 이별하는 법을 그리고 싶다. 현세에 집착하는 문화가 강해서인지 우리는 이별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가는 사람도 산 사람에게 기억을 잘 덜어주고 가고, 산 사람도 가는 사람을 잘 보내는 법을 보여주고 싶다.

극한 갈등을 통해서 시청률을 올리는 드라마들이 적지 않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가 여성의 심리를 세심하게 드러내서 여성작가인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보다. 따로 취재를 하지는 않지만, 우리 집사람도 아줌마니까 내 생활이 녹아들어서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