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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2003년06월25일 제465호 

러시아에 진출한 ‘진짜 한국사’

박노자 교수가 펴낸 최초의 한국사 통사론… 정치경제학 밖의 정신·사상사 등 폭넓게 다뤄

<한겨레21>에 칼럼을 연재 중인 박노자 교수(블라디미르 티호노프·오슬로국립대 한국학)가 최근 모스크바의 동양학 전문 출판사인 ‘무라웨이’(개미)에서 러시아어로 쓴 한국사 개설서를 냈다. <한겨레21>은 러시아 한국학 발전의 의미 있는 저작으로 평가받는 이 책과 관련해, 모스크바 국립대 아시아·아프리카 연구부의 볼코프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Volkov Sergei Vladimirovich) 교수의 서평을 받아 싣는다.

이번에 발간된 <한국사> 제1권(원시시대∼1876년)은 74년 모스크바에서 발간된 <조선사> 1, 2권에 이어, 러시아어로 쓰인 두 번째 한국사 교재다. 박노자 교수는 “학생시절 정치·경제사에 치우친 <조선사>를 보며 시험 치는 게 개인적 고생이었다”며 “문체도 덜 딱딱하면서 불교·유교 등의 정신문화를 아우르는 새 교과서를 꼭 만들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꿈이 이뤄졌다”고 기뻐했다. 그는 또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좀더 잘 조명하고 학생들에게 좀더 강력한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역사를 쓰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박노자 교수는 현재 <한국사> 제2권(1876~1945년)을 집필하고 있다.

서평을 쓴 볼코프 교수는 1998년 서울대 출판부에서 한글로 출간된 <한국고대불교사>를 낸 적이 있으며 <한국 고대사에서의 귀족과 관료>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의 관료층 연구> 등 한국사·동아시아사 관련 저작들을 갖고 있다. 그는 이 책이 “러시아 독자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중적 독자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힐 것 같다”고 밝혔다. -편집자



박노자 교수의 <한국사> 출간은 폭넓은 독자층 사이에 한국 관련 지식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실 러시아 독자는 최초로 연대별로 정리된 한국 전통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것은 한국사를 통속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 도식의 하나의 ‘사례’로만 취급하지 않고 그 자체로 체계화해 기술한 최초의 러시아어 한국사 통사론이다. 그 통사론을 쓴 사람이 러시아의 인정받은 한국 전통사 전공자 중에서 최연소 전문가라는 점은, 어쩌면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사진/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의 한국 전통사 전공자 가운데 최연소자로 꼽힌다. 박 교수는 러시아 한국학계에서 유일한 가야 전공자이다.(한겨레 김종수 기자)


물론 소련/러시아의 사학에서 한국 전통사 관련 일련의 서적이 나온 바 있었지만 그 중에서 주목받을 만한 서적이라면 대개 세부적 문제를 서술하는 데 국한된 책들이었다. 개설서라고 할 만한 것은 30년 전에 나온 <조선사> 상·하권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책은 당시 소련의 어용 이념인 통속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한국사에 적용하는 최악의 시도에 불과했다. 그 책은 ‘계급투쟁’과 ‘생산관계 발전’에 대한 궤변으로 가득 차 있어서 구체적인 역사 사실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어느 왕이 어느 왕을 계승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대다수 왕들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사 교과서가 나왔다

이와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이제 드디어 학생들에게 독습의 교재로 추천할 만한 교과서가 나왔다는 것이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티호노프(박노자)의 책은 무엇보다 교과서다. 이 책은 이해하기 쉬운 명료한 문체로 쓰였으며 가독성이 매우 높다. 이 책은 독자의 흥미를 잘 끌기에 전문가는 물론 비전문가에게도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자료 배정 방법도 이 책의 장점이다. 흔히 한국사 개설서들이 후대로 내려갈수록 좀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심하면 18~19세기 관련 기술은 아예 그 전 시대 전체에 관한 서술과 분량이 비슷할 정도다. 그런데 민족 문화의 주요 특징들이 형성됐던 초기 역사는 후대의 역사 못지않게 재미있고 중요하다. 티호노프의 책은 바로 고대사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고고학을 자세히 기술했다.

이 책의 시대 구분법과 구성은 흥미롭다. 한국의 전통사를 세개의 시대로 크게 구분하고, 시대마다 장을 달리해서 서술한다. 제1장, 한반도의 원시문화에서부터 신라의 통일까지 모든 국가들을 포함한다. 고조선·백제·고구려·신라·가야 등 고대의 준(準)국가나 국가들의 역사를, 저자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등 물질문화의 발달과 긴밀하게 연결시켰다. 예컨대, 고조선 역사를 청동기와 전기 철기문화의 일부분으로 다뤘으며, 이른바 ‘삼국시대’의 역사를 ‘성숙한 철기문화’의 일부분으로 고증하였다. 제1장은 물질문화를 기준으로 해서 구성됐지만, 제2, 3장 등은 사회·정치적 특징에 의거해 구분한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를 다루는 제2장의 제목은 ‘한국사에서의 귀족과 관료들의 사회’이며, 조선조를 조명하는 제3장은 ‘중소 지주 사회에서의 관료적 성리학적 왕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학자로서의 시작을 가야 연구자로 해서 지금까지 러시아 한국학계에서 가야를 전공한 유일한 학자로 남아 있는 티호노프의 책인 만큼, 가야사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했다. 사실, 이른바 ‘삼국시대’에 가야나 부여가 삼국(신라·백제·고구려)과 지정학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는 현실- 즉, 삼국시대가 오국(五國)시대였다는 현실- 을 잘 인지하지 않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가야와 부여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 박노자의 책에서는 가야사가 신라사와 동등하게 취급됐다(안타깝게도 부여에 대해서는 비교적 적은 지면을 할애했다). 통상적인 국가별 서술이 아니고 오국의 사회들을 비교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이 책의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가야사에 깊은 관심… 한국인도 읽으라


사진/ 박노자 교수의 〈한국사〉는 러시아로 쓰인 두 번째 한국사 교재다. 1권은 원시시대에서 1876년까지의 한국사가 연대별로 서술됐다.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한국사상- 특히 불교사상- 의 발전을 기술하는 부분들이다. 이 책은 상당한 분량을 한국인의 정신생활 발달사에 할애한다. 아마 티호노프는 현재 러시아 전문가 중에서 한국 초기 불교의 여러 교파의 교의에 대해 전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티호노프는 한국 고대·중세 불교 여러 교파의 교의를 상세히 서술할 뿐만 아니라 원효·의상·자장 등 고승의 생애와 활동, 사상의 독특한 내용을 자세하게 파헤치기도 한다. 그는 불교의 역할을 신라인들의 정체성의 근본, 신라라는 국가의 구성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든 사상적·종교적 ‘시멘트’로 높이 평가한다.

고려·조선 시대의 사회적 관계와 신분층 구성 문제에 관한 티호노프의 생각은 비록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소련 사학의 전통적 통설이나 남북한 사학계 통설들과 사뭇 다른 독자적 해석으로 주목을 끈다. 그가 전기, 중기(15∼18세기)의 조선을 세계사상 가장 안정되고 통치자들의 행정 파악력이 뛰어난 관료국가 중 하나로 보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조선적 관료국가의 모델’을 근본적인 변화 없이도 장기적으로 지속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자본주의 맹아설’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조선인이라는 종족 집단의 동질화 과정에 대한 티호노프의 견해도 괄목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개인적 특성과 관련된 또 한 가지 요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나의 생각으로, 티호노프의 책은 러시아의 독자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중적 독자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힐 것 같다. 한국에 몇년 동안 살면서 일했던 이 책의 저자는 어떤 러시아 학자보다 한국문화의 정신, 그리고 한국인들의 사고의 틀을 체화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러시아 문화 전통의 소유자, 러시아 학술의 대표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각은 세계사 문맥 속의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볼코프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 모스크바 국립대 아시아·아프리카 연구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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