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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2003년03월06일 제449호 

오르가슴을 ‘공부’하는 길

옥석 가려내기 어려운 성관련 지침서, 쓰레기 속에서 보석을 찾아라

지난해 개봉한 독일영화 <걸스 온 탑>은 ‘여성판 아메리칸 파이’로 불렸다. 세명의 10대 소녀가 단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좌충우돌 소동을 벌인다. 소원은 오르가슴에 이르는 것이다. 오르가슴을 느껴보기 위해 대담한 성적 모험을 펼치지만 기회는 좀체 오지 않는다. 남자친구 혼자만 즐기고 끝나는 데 실망해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남자와 관계를 가지려다 혼비백산하는 일만 당하는 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답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한다. 주인공 가운데 한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자전거 안장의 마찰에서 오르가슴을 느낀다. 이 ‘놀라운 발견’은 곧 친구들과 공유되고 이들 역시 처음으로 오르가슴을 경험한다. 그러나 어딘가 부족하다. 세 소녀는 물체가 아닌 따뜻한 숨결에서 진짜 오르가슴을 느끼고 싶어한다.

<섹스북>에서 <섹슈얼 엑스터시>



주인공들이 자기 나라에서 출판돼 호평받은 <섹스북>(권터 아멘트 지음, 박영률출판사 펴냄)을 참고했다면 어땠을까 <섹스북>은 청소년과 20~30대 성인을 위한 성 계몽서로 국내에서도 교보문고의 서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성 지침서 중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2대 스테디셀러 가운데 하나다. 주인공들이 지침서를 전혀 참고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남자 경험이 전혀 없는 리사는 책에 쓰여 있는 ‘남자를 사로잡기 위한 행동지침’을 현실에 적용해보려 하지만 하나도 들어맞지 않아 몹시 당혹해한다.

오르가슴에 이르는 방법론을 다루는 성 지침서는 현실적 필요성에도 ‘그렇고 그런’ 포르노그래피로 취급받는다. 언론사 출판담당 기자들에게 꾸준히 배달되지만 대체로 무시당하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성 지침서나 성 실용서다. <섹스북>처럼 국제적으로 검증이 끝났거나, 국내에도 방영되는 미국의 인기드라마 <섹스 앤 시티>의 여주인공 킴 캐트럴이 쓴 <만족>(한숲 펴냄) 같은 화제의 책이 아니면 곧바로 ‘폐기처분’되기 십상이다. 서점에서 홀대받기도 마찬가지다. 번듯한 바깥 진열대로 나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서가 안쪽에서 잠자고 있어야 하는 운명이다. 인터넷 서점에는 수많은 성 지침서들이 올라 있지만 절반 이상이 절판된 상태다. 교보문고는 “절판되는 경우가 많은 건 출판된 지 오래됐거나 1년에 한번씩 작성되는 청소년 유해목록에 오르는 책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서가에만 진열하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오는 경우만 살 수 있는데 스포츠신문 등에 실리는 성 관련광고를 보고 오는 고객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교보문고의 경우 이런 식으로 한달에 10부 정도가 팔려나간다. 지난해 말 미국·일본에서 수십만권씩 팔린 <만족>의 국내 판권을 산 한숲출판사가 낭패를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 관련서를 내기는 처음이었다. 언론에서 꽤 회자됐지만 유통이 힘들었다. 당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서점쪽으로 성 관련서에 대한 판매 자제 요청을 했는데 그 때문인지 서점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반품이 들어왔다. 성 지침서에 대해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이 정도인 줄 몰랐다.”

건강서 형태로 또는 의학자의 감수로 나오는 수많은 성 지침서의 옥석을 가려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최근 출판된 <섹슈얼 엑스터시>(마르고 아난드 지음, 태일출판사)처럼 종교적 색채가 더한 경우는 더욱 곤란하다.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지은이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탄트라(비밀스러운 가르침) 기법을 현대적으로 응용해 오르가슴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는 하이섹스”를 제시한다. 지은이는 라즈니시 등 여러 탄트라의 ‘스승’을 연구했다면서도 “힌두교·불교·요가와 같은 특정 종교나 신앙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 종교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힌두교나 티베트 불교 등에서 섹스의 절정을 자신을 떠난 우주와의 합일로 보며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는다. 자기의 완고한 신념이나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초월적 상태, 몰아의 상태에 이르는 한 방법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몸 에너지의 근원인 성 에너지를 일깨워 전체 에너지를 유통시키고 한계에 봉착한 에너지를 깨워낸다고도 본다. 그러나 자칫 수행이 혼란스러워질 수 있어 공식적으로는 이런 수행을 금지한다. 달라이 라마도 옳지 않은 방법이라고 금지한 바 있다.”

‘성기 중심주의’ 넘쳐난다



그런데 수많은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곤란한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성 지침서가 남성의 왜곡된 여성관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이다. 통신판매만으로 3쇄까지 찍어낼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한채윤의 섹스 말하기>(2001, 도서출판 해울)는 레즈비언 같은 성적 소수자를 위한 성 안내서이자 여성주의 관점에서 새롭게 쓴 성 지침서다. 한채윤씨는 이 책을 쓸 때 시중에 나도는 수많은 성 지침서를 검토해보고는 “대부분이 허섭스레기”라고 결론지었다.

“글쓴이의 70%가량이 남성들인데 일본 책을 그대로 베끼거나 성 경험이 많은 남성들의 잡담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남성들이 어떻게 하면 여성들을 비명지르게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자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바라는가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쓴 책은 거의 없다. 지은이가 여성이어도 남성들이 쓴 것을 참고해 쓴 것이어서 별 차이가 없었다. 오르가슴에 대한 범주도 너무 좁다. 몸에 오는 물리적 반응만이 오르가슴은 아니다.”

오르가슴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생물학적으로, 성의학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남성적 언어라고 비판한다. 여성학 강사인 권김현영씨는 정상신체 중심주의를 문제삼았다. “이렇게 하면 성감이 좋아진다는 등의 이야기는 사실 크게 틀린 건 아닐 것이다. 성애에 대한 철학 없이 성기 중심주의로 가는 게 너무 넘쳐나는 게 문제다. 장애인을 포함해 여성들이 자기 신체의 특징을 찾아내고, 자기 성감을 느끼고 알아내는 과정을 알려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신체 특징상 특정 체위에 접근할 방법이 없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라고 책에 쓰인 대로 남자들이 공략해올 때 여성들은 아파하기만 한다. 여성들이 원하는 성 지침서는 기술적인 서술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것, 예컨대 어떻게 하면 분위기를 깨지 않고 이 남자에게 콘돔을 끼우게 할 것인가 같은 것이다.”

남성들이 사정만 하면 모두 오르가슴에 올랐을 것이라고 보는 건 널리 퍼진 오해다. 그런데 남성들의 크기 콤플렉스처럼 여성들이 오르가슴에 대해 지나친 환상(예컨대 소설과 영화에서 묘사되는 기막히게 멋진 장면들)을 주입받아 또 다른 장애를 겪는 건 아닐까. 페미니즘 저널 <이프>의 권혁란 편집장은 오르가슴 신화가 주는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며, 1998년 겨울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오르가슴을 찾아서’의 취재 때 경험을 들려줬다. “15명의 여자를 만나 몇 시간씩 이야기하며 내린 결론은 그들이 오르가슴에 대해 아예 포기하고 산다는 것이었다. 오르가슴을 모른다가 아니라 실제 섹스에서 실현해보는 게 귀찮고, 파트너에게 자기가 원하는 걸 말하는 게 어떤 반응으로 되돌아올지 뻔히 아니까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쪽으로 정리해버린 것이다. 그해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을 이야기했을 때 선정적이라고 논란을 샀지만 지금은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 됐다. 그렇지만 아는 것과 실제의 거리는 여전히 너무나 멀다. 현실은 너무 완고하고 고루하다.”

구성애식 설법에서 한단계 발전

손환철 교수(서울대 의대 보라매병원 비뇨기과)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민감하기 때문에 자기가 느낀 오르가슴을 모르고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쾌감을,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데도 이러고 살아야지 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게 아닌데 방탕한 여자라거나 밝히는 여자라고 보지 않을까 하는 눈길을 두려워하는 게 더 보편적이다.”

<이프>가 외쳐온 ‘남자를 위한 욕망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욕망’에 겉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성지침서의 한 가지라 할 어린이 성교육서도 변하고 있다. 권혁란 편집장은 과거의 성교육서가 ‘네 몸의 주인은 너 자신’이라는 구성애식 설법이었다면 지금은 ‘네가 주인이 돼 너의 몸의 욕구를 잘 봐라’고 한단계 발전한 책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오르가슴은 포기의 대상이거나 절대적 환상의 영역이 아니다. 스스로 찾아가야할 근원의 욕망이다. 제대로 된 성지침서는 그 길의 좋은 동무가 될 것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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