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목차 지난호보기 독자마당 기사에대한의견

한겨레21 구독신청 sitemap

e-Book
표지이야기 특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과학 인터뷰 스포츠/건강 사진/만평 칼럼 독자마당
Home > 경제 > 경제2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6월05일 제713호
통합검색  검색
벗어나자, 석유중독

인구 26위, 경제 11위에 견줘 너무 앞선 석유소비량 세계 7위… 의존도 낮추는 방법 고민해야

▣ 글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배럴(bbl). 석유 단위를 셀 때 쓰이는 이 단어는 최근 유가가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신문과 방송에 자주 나온다. 나무통이란 뜻의 배럴은 19세기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생산한 원유를 나를 때 나무통을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위인 리터(ℓ)로 환산하면 1배럴은 158.9ℓ가 된다. 1.5ℓ짜리 플라스틱 음료수통 106개 분량이다.

석유 1배럴의 값은 지난 2월19일 미 서부텍사스유(WTI) 기준 100.04달러로 사상 처음 세 자릿수에 진입한 뒤 130달러를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해 같은 기간 1배럴은 60달러에 미치지 못했다. 2000년 이전에는 10~20달러 수준이었다.


△ 5월29일 서울 여의도의 한 주유소. 국제유가 급등으로 국내의 휘발유, 경유값도 치솟아 리터(ℓ)당 2천원대에 육박하고 있다. 액화석유가스(LPG) 등 가스 가격도 6월부터 줄줄이 인상될 전망이어서 서민들과 생계형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석유값이 이처럼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 사이에선 투기세력이 석유값을 밀어올리고 있다는 주장과 수요에 견줘 공급이 못 미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고유가, 투기 탓인가 공급 부족인가

투기세력 때문이라는 주장은 이렇다. 미국발 금융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경기가 침체되면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내려 달러 약세가 이어지자, 저금리 달러에 매력을 못 느낀 투기자본들이 원유나 금, 옥수수, 밀 같은 실물 시장에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가 급등 원인을 투기세력에서 찾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석유수출국기구(OPEC)다. 차키브 켈릴 OPEC 의장은 5월28일 스페인 국영 라디오와 한 인터뷰에서 “투기세력이 유입되면서 유가가 급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지 소로스도 영국 일간지 <데일리텔레그래프>와 한 회견에서 투기세력을 고유가 주범으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에서 유가 급등 원인을 찾고 있다. 1956년 킹 허버트 박사가 제시한 ‘피크오일’(peak oil) 이론이 대표적이다. 피크오일은 석유 생산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시점을 일컫는다. 소비는 계속 늘어나는데 생산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석유를 살 수 없게 된다는 얘기다. 피크오일은 매장량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와는 별 관계가 없다. 수요가 늘어날수록 피크오일에 이르는 기간은 단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앞으로 20년 안에 전세계 석유 공급이 수요보다 매일 1억 배럴씩 모자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석유 부족 현상이 이르면 2012년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적절한 공급 증가가 이뤄지지 않으면 국제유가가 2년 안에 배럴당 150∼200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가 인상 원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법도 다르다. 갈등도 빚어진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4월29일 기자회견에서 “국제유가가 급격히 뛴 이유는 석유 생산이 석유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OPEC에 석유 공급을 늘리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OPEC은 “금융시장을 떠난 투기자본 때문에 유가가 올랐다. 석유 생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석유값 인상은 장기적으로 우리의 먹을거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가가 상승하면 석유를 대체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진다. 석유 대신 바이오디젤이나 바이오에탄올을 더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이오연료는 콩과 옥수수를 원재료로 한다. 바이오 연료를 많이 만들어낼수록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비싼 농산물 가격의 폭등이 예상된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의 유가 상승은 투기세력과 수요-공급의 문제가 혼재돼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앞으로 유가는 단기적으로 조정을 받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꾸준히 오를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고유가는 서민경제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유가 상승에 연동돼 원가 부담이 커진 전기, 가스, 철도, 고속버스 등의 공공요금이 하반기에 줄줄이 오를 예정이다. 액화석유가스(LPG)에 도시가스(LNG)에 소규모 가게, 노점에서 주로 쓰는 가정용 LP가스 가격 인상도 예상되고 있다. 자고 나면 치솟는 경유값 때문에 화물차 운전자들이 손을 놓는가 하면 어민들이 조업을 포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부 ‘석유독립특별위원회’를 만들라

현재 국제시장에선 경유가 휘발유보다 8~9달러 높다. 휘발유는 주로 자동차 연료로 쓰이지만, 경유는 발전용과 산업용, 농업용 등 수요가 다양해 중국·인도와 같은 신흥시장에서 수요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휘발유가 더 비싼데, 휘발유에 붙은 유류세(교통세·교육세·주행세)가 1ℓ당 737.26원(부가가치세 포함)으로, 경유의 523.27원보다 200원 이상 비싸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서민들이 쓰는 경유에 대해선 세금이 없는 면세유를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5월29일 서울 용산의 한 아파트 단지. 평일 대낮임에도 자가용들이 주차장에 가득 차 있다. 급등하는 유가가 부담스러운 운전자들이 차를 주차장에 세워놓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고유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석유 중독’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유가 상승을 막을 수 없다면,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고 에너지 소비를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박복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팀장은 “나라마다 고유가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중국·인도형은 에너지 소비 억제보다 해외 유전 확보와 같은 공급 위주 정책에 주력하고 있다. 반면 유럽·일본형은 에너지 소비 억제와 대체에너지 개발에 정책의 역점을 둔다. 석유자원이 유한하다고 본다면 우리나라가 추진해야 할 방향은 후자라고 본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하루에 쓰는 석유는 약 230만 배럴로, 장충체육관 부피의 5배가 넘는다. 인구 규모(세계 26위)나 경제 규모(세계 11위)에 견줘 너무 앞선 세계 7위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에너지 사용량 가운데 22%는 가정과 상업 부문에서 쓰이고 있다. 이 가운데 10%만 절약하면 6억달러의 외화가 절약된다. 이는 전국 고등학생들이 2년 동안 무료 급식을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보통 사람들이 석유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실천도 필요하다. 자가용 대신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힘들더라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가는 작은 실천이 석유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를 석유를 우리의 딸과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안준관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본부 부장은 “석유가격 상승은 원가 상승, 물가 상승, 수출채산성 악화, 경제 둔화 등으로 경제의 모든 부분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런 악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석유로부터의 독립’이다. 대통령 산하 ‘석유독립특별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위원회를 통해 국민, 학자, 관료, 정치인들 모두가 지혜를 짜내 한국 사회가 석유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1배럴의 원유에서 뽑을 수 있는 휘발유는 63.5ℓ. 2000cc 소나타(연비 11.5㎞/ℓ)에 ‘만땅’(70ℓ)을 넣고 달리면 730㎞를 갈 수 있다. 서울~부산을 왕복하기에 조금 부족한 정도. 1000cc의 경차 모닝(연비 16.6㎞/ℓ)으로 달리면 730㎞의 같은 거리를 가는데, 소나타의 3분의 2인 44ℓ만 있으면 된다. 석유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싶은 당신이 경차나 소형차를 타야 하는 이유다.


고유가 부추기는 환율정책

수출에 목말라 세금 쏟아붓네

정부의 잘못된 환율정책이 고유가를 부추겨 서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고환율(원화약세) 정책으로 서민들이 고유가와 고환율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지적이다.

강만수 경제팀은 ‘경제성장률 7%’라는 성장목표에 집착해 1970년대식 수출 드라이브에 ‘올인’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세금을 쏟아부어 환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5월27일 한때 1050원을 웃돌았다. 지난해 각종 경제연구소가 예상한 올해 환율은 880~930원이었다. 이러다 보니 거의 모든 나라 화폐에 대해 약세인 달러가 유독 원화에 대해서는 강세다. 국제유가 상승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고환율 때문에 국내 기름값이 더 올랐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이유다.

5월27일 두바이유는 배럴당 126.48달러로 이명박 정부 출범 전에 견줘 37.7% 올랐다. 급등하는 유가에 더해 환율마저 치솟으니 원화로 치르는 기름값은 훨씬 더 비싸진다. 같은 기간 원-달러 환율도 덩달아 9.4% 올랐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저환율이 고유가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했는데, 새 정부 들어서는 환율이 급등세로 돌아서면서 고유가 충격을 증폭시키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적정 수준 이상으로 환율을 끌어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높은 환율은 단기적으로 수출 증대와 경기 부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과가 있다. 고환율은 수출 기업들에는 좋지만 그 부담은 국민이 짊어져야 한다. 당장 경유값 급등도 국제유가가 오른 것이 일차적 원인이지만 환율 상승 탓도 크다. 5월27일 정부는 뒤늦게 달러를 대량 매도하면서 환율을 끌어내리기는 했지만 ‘뒷북 대책’이라는 비판이 따른다.

정부의 유가 전망도 ‘뒷북’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4월28일 이명박 대통령이 주재한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 합동회의’에선 올해 연간 유가 전망치(두바이유 기준)를 배럴당 90달러로 예측했다. 하지만 두바이유 가격 곡선은 이런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고유가 대책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3월 유류세를 10% 인하했지만 유가 급등으로 효과는 채 일주일도 가지 못했다. 정부는 5월28일 뒤늦게 국무총리 주재로 에너지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종합대책을 내놨다. 정부가 가스, 전기, 주유 등의 대금을 대신 지불하는 ‘에너지 바우처’를 저소득층에게 지급하고, 화물운송 업계와 영세 사업자를 위한 유가보조금 지원을 2년 연장한다는 것이 뼈대다. 지난 정부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나왔던 기존 대책의 재탕 삼탕이다. 바우처 제도의 경우 예산을 어떻게 마련할지, 서민이나 영세 사업자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지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예산을 마련하더라도 시행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비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