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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경제 > 경제2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3년10월02일 제4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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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을 보면 사회가 보인다

히트상품 변천사를 통해 본 라이프스타일…최근 경기 침체로 가정용품과 이민상품 등 인기

현대홈쇼핑에서 최근 선보인 캐나다 이민상품이 홈쇼핑 사상 최대의 빅히트 상품으로 떠올랐다. 단 두 차례 방송에 4천명의 신청자가 대거 몰려 홈쇼핑 8년 역사상 단일품목 최고 주문매출액(700억원)을 기록했다. 현대홈쇼핑쪽은 “폭발적 호응 속에 이주공사의 1년 매출액을 훨씬 능가하는 기록을 세웠다”며 “알선 이주업체마다 이민상품 가격을 제멋대로 책정하고 있는데, 이런 혼탁하고 음성적인 이민상품 시장을 투명화하자는 생각에서 기획했다. 우리 사회에 이민 잠재수요가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다”고 스스로 놀라워했다.

올 여름 TV홈쇼핑 시장을 뒤흔든 또 하나의 대형 히트상품은 접착식 실리콘 브래지어인 ‘누브라’다. 우리홈쇼핑이 가장 먼저 내놓은 누브라는 지난 6월 처음 소개되면서부터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사진/ 홈쇼핑 사상 최대의 빅히트 상품으로 떠오른 현대 홈쇼핑의 캐나다 이민상품. 무형 서비스 상품이 홈쇼핑 상품의 새로운 영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무형 서비스 상품이 새로운 영역으로

첫 방송에서 1분당 무려 450건씩 문의가 들어와 50분 만에 3억5천만원어치가 팔렸다. 그 뒤 LG홈쇼핑, CJ홈쇼핑, 현대홈쇼핑 등이 잇따라 실리콘 브래지어 판매 경쟁에 뛰어들면서 누브라는 매출액 100억원이 넘는 대박상품으로 등장했다. 우리홈쇼핑 관계자는 “올 여름에는 더위가 일찍 찾아오면서 노출이 심한 옷이 유행했다”며 “단기간 승부를 노리고 탱크톱에 받쳐입는 속옷으로 누브라 상품을 기획했는데 시즌상품으로 빅히트를 쳤다”고 말했다.

이민상품과 누브라를 비롯해 TV홈쇼핑 히트작들은 최근의 소비 트렌드와 유행 그리고 사회 변화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올해 홈쇼핑 히트상품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주방·생활용품의 뚜렷한 강세다. LG홈쇼핑의 올 상반기 최대 히트상품은 ‘락앤락 밀폐용기 세트’로, ‘새지 않는 밀폐용기’라는 장점이 입소문을 타면서 방송이 나갈 때마다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LG홈쇼핑은 올 상반기에만 락앤락 20만 세트를 팔아치웠다. LG홈쇼핑에 따르면 락앤락과 함께 ‘한성포기김치’ ‘셰프라인 양면팬’이 상반기 히트상품 1∼3위를 차지했다.


△ 사진/ 한 홈쇼핑 채널의 모피·피혁 의류 판매 행사. 경기가 침체하면서 의류·패션 품목을 히트상품 대열에서 뒤처지고 있다.(한겨레)


주방용품이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건 CJ홈쇼핑에서도 마찬가지다. CJ홈쇼핑의 상반기 빅히트 상품은 ‘해피콜 압력팬 세트’로 약 25만 세트(120억원어치)를 팔았다. 해피콜 압력팬은 위·아래 양면에 두개의 팬을 붙인 뒤 틈새를 실리콘 패킹으로 처리해 냄새와 연기를 제거하고 기름이 튀는 것을 방지한 상품이다. 경제 침체기의 소비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홈쇼핑 히트상품이 ‘소이러브’다. 생콩을 넣어 두부와 두유, 각종 죽류를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소이러브는 올해 처음으로 히트상품 대열에 올랐다. 소이러브는 2000년과 2001년 연속으로 LG홈쇼핑 히트상품 1위에 오른 ‘도깨비방망이’(고기전·부침개를 하거나 양념을 다질 때 사용하는 주방 필수 도구)에 이어 홈쇼핑 시장에 다시 등장한 대표적인 아이디어 주방용품이다. 이 밖에 한성포기김치는 지난해에 LG홈쇼핑의 히트상품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주방용품과 김치가 빅히트 상품에 대거 포함된 이유는 뭘까? LG홈쇼핑쪽은 “경제 불황과 소비 위축으로 가정마다 외식을 줄이고 대신 집에서 음식을 직접 조리해 먹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치 판매량 급증 역시 불황기에 실질소득이 감소하자 맞벌이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CJ홈쇼핑쪽도 “경제가 불황일 때 소비자들이 꼭 필요한 상품만 사기 때문에 패션 및 의류는 판매가 떨어지는 반면 식품과 주방용품은 오히려 판매량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주방·생활용품은 “불황을 타지 않는 상품” 또는 오히려 “불황에 강한 상품”이라는 얘기다.

반면, 경기가 점차 회복세를 보였던 지난 2000년과 2001년에는 건강 관련 제품이 홈쇼핑 히트상품 자리를 독차지했다. 건강 옥돌매트는 2000년 LG홈쇼핑의 최대 히트상품이었고, CJ홈쇼핑에서도 베스트셀러 5위 안에 들었다. 당시 가정용 수돗물을 연수로 만들어주는 연수기도 피부건강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홈쇼핑 히트상품 베스트 10에 들었다. 그러나 그동안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건강상품과 전자제품, 의류·패션 품목은 상대적으로 히트상품 대열에서 밀리고 있고, 올해는 대신 압력밥솥·프라이팬 등이 히트상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경기 침체로 취업난이 깊어지는 가운데 해외에서 인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취업상품까지 홈쇼핑에 등장했다. 현대홈쇼핑이 지난 6월 내놓은 ‘미국 기업 인턴십 프로그램’(1천만원 안팎)은 방송 2시간 만에 20억원어치가 팔릴 정도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현대홈쇼핑은 “미국 기업에 근무하면서 실무능력을 쌓는 이 프로그램에 200여명이 대거 몰렸다”며 “가전·의류 등 유형상품 외에 이민상품이나 취업상품 등 무형 서비스 상품이 홈쇼핑 상품의 새로운 영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 사진/ 남대문 시장의 쇼핑객들. 홈쇼핑을 통한 상품 구입은 홈쇼핑 채널이 주는 엔터테인먼트를 함께 추구한다.(한겨레 강창광 기자)


상품의 ‘경험’ 자체도 소비

중·고등학생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 상품도 등장할 정도로 홈쇼핑에서 파는 상품 영역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대다수 홈쇼핑 업체들은 방콕·파타야 동남아 여행상품은 물론 래프팅·서바이벌 상품, 그리고 오페라 <투란도트> 관람권 같은 공연티켓까지 팔고 있다. LG홈쇼핑은 아침 과일배달 서비스 상품을 선보인 데 이어 세균박멸 등 집안청소를 대행해주는 상품(평당 5만원)도 내놓았다. 집을 리모델링해주는 상품도 이미 나왔고, 결혼정보업체 등과 제휴해 이성교제를 주선해주는 상품을 새로 개발중인 홈쇼핑 업체도 있다. 우리홈쇼핑 관계자는 “요즘엔 히트상품이 나와도 수명이 아주 짧다. 기존 고객들이 이제는 생활용품이나 의류에 식상해하고 있다”며 “업체마다 신상품 개발팀을 꾸려 소비행태 변화와 사회의 변화상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상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 TV홈쇼핑 시장에서 인기몰이에 성공한 이민·취업상품, 누브라, 여행상품 등은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와 맞물려 있다.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요즘 식료품·생활용품을 홈쇼핑을 통해 싸게 구입하면서도 취미·여가생활, 인생 진로에도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홈쇼핑 방송에서만 비교적 싼 가격에 독점적으로 파는 상품도 있지만, 이민·취업·여행상품 등은 다른 시장에서도 이미 팔고 있는 것들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숙희 수석연구원은 이를 ‘홈쇼핑을 통한 상품 구입’이라는 새로운 소비 패턴으로 설명했다. “소비자는 이제 상품뿐 아니라 상품의 ‘경험’ 자체도 소비하고 있다. 쇼핑과 더불어 홈쇼핑 채널이 주는 엔터테인먼트, 분위기, 즐거운 느낌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비에서 엔터테인먼트 기능이 중시되면서 소비 자체를 취미 또는 여가활동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확대되고 있다. 이제 소비는 사람들에게 심리적·감각적인 자극을 주는 ‘일상탈출’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