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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단 ] 2000년08월30일 제324호 

[진단] 민주의 제단, 끝없는 표류

집권2기로 넘어간 민주화 운동 관련 3대 법안… 현실적 장벽에 가로막혀 명예회복 가물가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가족과 동지들에 대한 명예회복 작업이 이렇게 힘겹고 어려울 줄 몰랐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인권 개선을 국정 지표의 하나로 내세운 김대중 정부 출범 2년6개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와 민주노총·경실련·참여연대 등이 함께한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국민연대) 관계자들은 최근 이런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동안 그저 억울하고 가슴아픈 과거로만 묻혀 있던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각종 희생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는 끈질긴 투쟁 끝에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이 제정됐지만, 명예회복을 이뤄내기가 생각만큼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특별위 구성 늦어져 흐느끼는 유가족들

8월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2층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 지난 6월 말 임대한 200여평의 공간은 3개월째 텅 비어 있다. 행정자치부 등 정부쪽 파견자 몇몇만 눈에 띌 뿐이다.

어느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남편과 아들 딸의 억울한 넋이라도 위로하겠다는 애달픈 뜻을 품은 유가협 회원들. 그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무려 442일 동안 천막농성을 벌인 끝에 지난해 12월28일 ‘의문사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리고 7달의 산고를 거쳐 7월4일 시행령까지 확정됐다. 그러나 아직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할 주체인 진상조사위원회조차 구성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먼저 현실적인 장벽에 가로막혔다. 특별법은 위원장과 2명의 상임위원을 포함해 모두 9명으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공정하고 내실있는 진상규명을 위해 대통령이 법조경력 10년 이상이나 부교수 이상의 직책으로 8년 이상 재직한 사람, 3급 이상 공무원으로 5년 이상 재직한 사람들 가운데 국회동의를 받아 위원을 임명토록 했다. 그러나 7월 초 위원선정에 착수하자 곧바로 문제가 불거졌다. 엄격한 자격요건을 충족할 만한 인물군이 부족했고, 그나마 조건에 맞는 인사들 대다수가 위원직을 꺼렸다.

유가협 한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위원을 추천하기 위해 몇몇 인사들과 접촉했지만 ‘최선을 다해도 욕 먹을 수 있다’며 거부해 애를 먹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상당수 인사들이 의문사 사건 자체가 과거 정권이 관련 증거를 샅샅이 없앴기 때문에 ‘고급옷 로비’나 ‘조폐공사 파업유도’ 특별검사처럼 명확히 밝힐 게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뜻밖의 난관에 부닥친 유가협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을 상대로 “위원을 맡아달라”는 간청과 항의를 거듭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빠졌다. 결국 지난 7월 중순께 국민연대에 참여한 민주노총·경실련·참여연대 등의 단체의 공동노력으로 가까스로 위원을 선임했다.

그러자 청와대가 제동을 걸고 나왔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에서 유가협과 국민연대가 후보로 추천한 김형태 변호사를 비토하고 나선 것이다. 김 변호사가 옷로비 특검 때 수사진행 상황에 불만을 품고 뛰쳐나와 기자회견한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유가협은 청와대를 상대로 한 차례 더 힘겨루기를 벌였다. 그리고 7월 말에야 겨우 청와대와 유가협 사이에 위원 추천에 관한 의견이 일치됐다. 유가협과 국민연대는 청와대에 이돈명 변호사를 진상규명위원장으로, 김형태·조용환·황인성 변호사, 안병욱 교수 등을 위원으로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더미 일처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그러나 이번에는 국회가 걸림돌로 등장했다. 국회의 동의를 거쳐 위원을 임명해야만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들어갈 수 있는데 국회가 한달 이상 파행을 계속하면서 위원 임명이 하릴없이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위원회 구성이 이렇게 늦춰지는 데 대해 유가족들은 “애간장이 녹는다”고 말했다. 천막농성을 통해 얻어낸 법에 진상규명을 위한 최대 활동시한이 내년 9월까지로 한정돼 있는데 이런저런 논란 때문에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법은 의문사에 대한 진정기간을 오는 12월31일까지로 못박고, 사건당 조사기간도 6개월(1회에 한해 3개월 범위 내에서 연장가능)로 한정했다. 내년 9월까지는 모든 진상조사가 완료돼야 하는 것이다.

부족한 시간 속에서도 처리해야 할 사건은 넘쳐난다는 게 또다른 고민이다. “현재 유가협이 파악한 의문사 사건만도 45건이다. 여기에 군입대 뒤 자살처리된 2천여건 가운데 상당수가 진상규명을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법이 허용한 50명의 수사요원이 당장 뛰어들어도 법적시한 안에 제대로 조사하기 힘들다. 그런데 온갖 이유로 위원회 구성이 늦어지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행동들은 시한부 생을 사는 사람의 피를 하루하루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허영춘 유가협 의문사지회장)

참다 못한 유가족들은 지난 8월22일 다시 국회 앞에 섰다. 그리고 애절하게 절규했다. “국회는 빨리 의문사진상규명 위원들에 대한 임명동의를 해달라.” “놀고 먹는 국회 때문에 조사에 필요한 한정된 시간만 소진하고 있다.”…. 그러나 여야가 팽팽히 맞서고 있어 언제쯤 국회가 정상화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유가족들은 무작정 기다리며 가슴을 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된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암울한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에 깊이 팬 상처를 치유하는 첫 단계가 시작되는 것일 뿐이다. 특별법 자체가 그 상처를 완치하기에는 너무 많은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진실규명의 핵심인 진상조사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미약하다. 위원회는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해 진정인, 참고인, 피진정인의 진술서 제출 및 출석을 요구하고 이들을 조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할 경우 뚜렷한 대응방법이 없다. 위원장 명의로 동행명령장을 발부하는 게 고작이다. 그나마 이를 거부하고 출석하지 않더라도 과태료 1천만원을 물리는 것말고는 제재 방법이 없다. 당연히 실효성에 의문이 생긴다. “가해자가 벌금도 아닌 과태료 1천만원을 겁낼 이유가 없다. 살인자로 낙인찍히는 것보다는 과태료를 내면서 버틸 게 불 보듯 빤하다.” 김학철 국민연대 사무국장은 특별법이 갖는 가장 큰 허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때문에 유가협과 국민연대 등은 아직도 싸움이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앞으로 진상조사를 진행하면서 이런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법개정 투쟁도 함께 전개할 것이다.”

유가족의 피맺힌 노력 끝에 가까스로 첫 결실을 맺은 의문사진상규명 특별법. 그러나 법안 자체의 한계와 놀고 먹는 국회, 넘쳐나는 의문사 사건과 이를 감당할 인력부족 등이 어우러지면서 애절한 한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보상법도 범위 놓고 논란 가열


(사진/멀고 먼 명예회복의 길.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돼음에도 흐느끼는 유가족들)


의문사진상규명 특별법과 같은날 국회를 통과한 민주화 보상법은 상당히 빠른 진척을 보이고 있다. 지난 7월10일 시행령이 공포된 뒤 한달 만인 8월10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코오롱빌딩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구성됐다.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희생된 사람과 그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을 추진하게 될 주체가 선 것이다. 그리고 지난 8월21일부터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별로 민주화운동보상지원팀을 설치해 대상자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5일 만인 8월25일 현재 전국에서 사망자 6명, 상이자 10명 등 모두 1210명이 보상 및 명예회복을 신청했다. 심의위원회는 오는 10월21일까지 신청을 받는 동시에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별로 경찰과 공조해 1, 2차 기초조사를 벌이게 된다.

특히 신청자가 몰리고 있는 서울시와 광주시가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26일 현재 170명의 신청을 접수받은 광주시는 서류검토 결과 타당성이 인정된 90건에 대해 1차 기초조사에 들어갔다. 광주시내 5개 구청별로 관할 경찰서에서 20명씩 경찰력을 지원받아 경찰과 공무원 2인1조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서울시도 일단 25일까지 접수된 180명에 대한 서류검토를 끝내고 28일부터 구청과 경찰 합동으로 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곳곳에서 문제점도 노출되고 있다. 가장 큰 쟁점은 보상법 제정 당시부터 문제로 지적됐던 법률적용 대상인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범위이다. 보상법 제2조(정의)는 법적용 대상을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사망 행방불명, 상이, 질병 및 후유증을 앓거나 유죄판결·해직 또는 학사징계를 받은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에 따를 경우 온갖 애매한 영역이 존재한다. 먼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기소유예되거나 이른바 ‘녹화사업’으로 강제징집된 사람, 수배자 등은 유죄판결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신청대상에서조차 제외된다. 반면 구류나 벌금을 받은 사람은 그 대상이 된다.

또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교원·법관 등 각종 임용면접에서 탈락한 사람도 제외된다. 특히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교사나 노동운동관련 해직자, 사학비리 척결을 위한 학내투쟁 관련자들의 경우 민주화 운동에 포함시켜야 하는지가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실제 대상 접수 단계부터 일부 혼선이 발생하고 있다. 8월25일 현재 접수결과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서울의 경우 150명, 광주는 140명이나 접수됐다. 전교조가 조직적인 신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무자들은 “일단 조사는 시작했지만, 대상인지 아닌지 불명확해 골치 아프다”고 고민을 하소연하고 있다.

“심의기구 판정도 부처서 반대하면 그만”


(사진/한 시민이 서울시 민주화운동 보상 신청 접수 창구에 서류를 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국 시국사건관련 미임용자 원상회복추진위(회장 유윤식)나 전교조, 민주노총 등은 “국가권력의 총체적 압박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었다”면서 “당연히 명예회복 대상”이라고 외치고 있다. 특히 전교조의 경우 “10년 가까운 해직기간에 대한 경력인정 임금보상, 연금불이익 해소가 명예회복의 핵심”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심의위원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위원회에서 아직 보상 및 명예회복 기준이나 대상 등을 구체적으로 정한 바 없다”면서 “명예회복 분과위 등 하부조직이 갖춰지면 검토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오는 9월9일께 심사위원회 산하에 관련자 및 유족여부심사분과, 명예회복추진분과 등이 구성되면 그곳에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모두 심사는 할 수 있지만 위원회는 심의기구일 뿐”이라며 “판정을 내려도 교육부 등에서 반대하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심사대상에는 포함하겠지만 전교조 등의 요구가 수용될지는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국민연대와 전교조 등에서는 정부가 보상 및 명예회복 대상을 축소하고 위원회의 공정성을 해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심의위원회의 사건성격 규명체계가 논란의 핵심이다. 현재 행정자치부와 검찰 등에서 심의위원회에 파견된 지원단(단장 김광진·행자부 3급)은 정치, 사회문화, 노동, 언론, 학원1, 학원2 등 6개 분야에 공채 수석전문위원과 보조위원, 5급 공무원 등이 포함된 ‘전문위원실’을 두고 이곳에서 민주화 운동 사건의 성격규명작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또 전문위실의 검토 사안에 대해 다시 7명의 관계자가 참여한 ‘사건규명단’에서 법적용 관점에서 중점검토를 거친다. 이 규명단에는 전문위원실 5급 공무원 외에 공무원 신분인 관련 법제관이 더 참여한다.

조호원 복직교사 원상회복추진위 부위원장은 “이는 중요 사건별로 민주화 운동인지 아닌지를 먼저 성격규정한 뒤 관련 신청안을 모두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예비심사”라고 성토했다. 그는 특히 “과거 가해자였던 공무원들이 사건의 성격규정 및 진상규명에 핵심주체로 참여한다는 것은 공정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최고기구인 심사위원회가 개별 신청 사안마다 기초·광역단체 등의 기초조사 자료 등을 놓고 직접 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 모든 사안에 대해 보상 및 명예회복 여부를 90일 이내(행방불명자는 120일) 완결한다는 것도 현재 인력구조나 접수 건수 등을 고려할 때 만만찮은 작업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심사위원회 지원단의 한 관계자는 “결국 모든 사건을 다 조사하려다보면 수박겉핥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보상과 명예회복을 통해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화합에 기여한다는 취지의 민주화운동 보상법도 앞날이 장밋빛은 아닌 것이다. 이와 관련 국민연대 한 관계자는 “대상이 축소 왜곡될 경우 법개폐 투쟁도 불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 대통령’을 자임해온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강한 집착을 보였던 인권법은 지난 2년6개월 동안 법무부와 시민단체 사이에 끝없는 논란만 거듭된 채 아직도 결론을 못내고 있다.

법무부가 98년 8월 법인형태의 민간인권기구 설치를 핵심으로 한 인권법안을 공개했고, 그뒤 몇 차례 수정을 거쳐 지난해 4월7일 국회에 공식 제출했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인권위의 감시대상인 법무부가 법제정을 주도하며 인권위를 법무부 산하 단체로 만들려 한다”면서 “독립적 국가기구로 인권위 설치”를 주장하며 맞섰다. 결국 시민단체의 반발로 정부는 15대 국회에서 이 법안처리를 포기했다.

인권위 위상 둘러싼 힘겨루기 여전


(사진/인권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김대중 대통령은 8·15경축사를 통해 아시아 최초로 인권법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지난 8·15 경축사에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인권법을 시행하겠다”고 다짐한 뒤 이 문제는 또다시 논쟁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법무부가 지난 8월24일 독립적인 비정부조직으로 위상을 정하되 인권위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예산안 조정권과 위원 가운데 법무부 추천 몫 3명을 대통령에게 넘기는 내용의 새로운 안을 내놓은 것이다. 오는 9월10일까지 의견수렴을 거쳐 이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실현을 위한 민간단체공동위원회’(상임집행위원장 곽노현 교수)는 “15대에서 폐기된 법안의 민간인권기구란 용어를 비정부기구로 이름만 바꿨을 뿐 법무부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면서 “법무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국가기구로 인권위를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다. 남규선 민가협 총무도 “새 법안은 누가 봐도 문제될 만한 몇몇 조항만 바꾼 것일 뿐”이라며 “화장만 고친 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인권위 위상을 둘러싼 지루한 힘겨루기가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건국이래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한 민주주의 정통세력을 자임하는 김대중 정부 출범 2년6개월. 그러나 그 정권의 모태가 된 민주화 운동 희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항상 외쳤던 국제적 수준의 항구적인 인권국가를 목표로 추진해온 민주화 운동 관련 3대 법안은 아직도 미완성의 목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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