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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특집 > 특집2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8월24일 제6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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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족의 품위가 말이 아니오”

정부에선 1960년대부터 고정 생계비 지급했지만 당사자들은 턱없이 부족해해… 1974년 842만원 받던 이방자 여사는 3400만원 요구해 1800만원으로 맞춘 듯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대한민국 정부의 황실 정책은 어떤 모습이었나. 첫 움직임은 3대 국회가 1945년 9월23일 만든 ‘구황실재산처리법’이라는 법률로 구체화된다.


△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와 달리 옛 황실에 관대한 편이었다. 이는 쿠데타로 집권한 뒤 지지 기반이 부족했던 그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방자여사와 대화하는 모습.(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이 법의 뼈대는 “구황실 재산을 국유로 하는 대신 구황족들에게 생계비를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법 4조는 생활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구황족’의 범위를 “이 법이 시행될 때 살아 있는 구황실의 직계 존비속과 그 배우자”라고 못박았다.

박정희, 황족들의 불행을 동정하다

그렇지만 이 법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는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법에서 말한 ‘구황족’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1963년 영친왕 환국을 이끈 김을한(작고)씨는 1980년 탐구당에서 펴낸 <인간 영친왕>에서 “영친왕이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탓이 크다”고 말했다. 오랜 미국 체류 기간 동안 대한제국의 왕자(프린스)라고 자칭해온 이 박사(그는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다)는 영친왕을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친왕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운명을 개척해가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는 시류에 적응하는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1945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 마지막 황태자다운 기상을 보여주는 대신, 1947년 10월14일 신적강하(臣籍降下)로 왕족 신분을 잃을 때까지 일본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법에 구체적인 근거 규정이 만들어진 것은 1961년 2월20일 장면 정권이 국무원령 204호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을 제정하면서부터다. 이 법은 구황족의 범위를 △고종·순종의 배우자 △고종·순종의 자와 그 배우자 △순종의 황태자·황태자계의 호주 상속인과 그 배우자 △고종의 자의 호주 상속인과 그 배우자 △황태자계의 호주 상속인의 자와 그 배우자로 범위를 한정했다. 그러나 이는 날림으로 만들어진 법이었다. 순종은 아들이 없고, 영친왕은 순종의 황태자인 동시에 고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해 10월17일에 개정된 법은 ‘구황족’의 범위를 △악선제 윤씨(순종의 부인) △삼축당 김씨(고종의 부인) △광화당 이씨(고종의 부인) △사동궁 김씨(의친왕 이강의 부인) △영친왕 이은과 그 배우자로 축소했다. 그 뒤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고종의 딸 덕혜 옹주를 귀국시킨 뒤 1962년 4월10일 법을 다시 바꿔 그 범위 안에 덕혜 옹주를 포함시켰다.

그때 지급된 돈은 얼마였을까. 김을한씨는 <인간 영친왕>에서 매달 순종의 정비인 순정효황후 윤씨에게는 50만환, 의친왕비 연안 김씨에게는 30만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씨와 삼축당 귀인 김씨에게는 각각 10만환 등 모두 100만환을 지급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법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인간 영친왕>에 따르면, 영친왕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최초로 받은 보조금은 1961년 의친왕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조카인 이수길 ‘구황실 재산관리 사무총국장’이 가져다준 100만환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이수길 황손은 자리를 내놓게 되지만 박 대통령이 옛 황족들의 불행한 삶을 동정한 탓에 대한민국 정부는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게 된다. <한겨레21>이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찾아낸 문서를 보면, 1962년 9월26일 김세련 재무부 장관은 영친왕 치료비 지급을 위한 예비비 1945달러 사용 승인을 요구하는 안건을 각의에 제출한다. “이은씨는 1961년 8월부터 와병 중에 있어 치료를 계속 하고 있으나 아직 완쾌하지 못하여 매월 일화 10만원 평균의 치료비를 국고에서 보조 지출코저 하는 것임.”

이구씨에겐 매년 품위유지비 1억200만원 지급

그렇지만 정부의 지원은 충분하지 않았다. 만년에 이방자 여사가 살던 창덕궁 낙선재 쪽에서는 늘 생계비 부족을 호소했던 것 같다. <한겨레21>이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대통령 보고서 ‘이방자 여사 및 덕혜 옹주에 대한 생계비 지원 현황’을 보면, 1974년 현재 낙선재에서는 이방자 여사와 덕혜 옹주와 상궁 3명을 포함해 19명이 살거나 일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지급된 돈은 1973년 936만원, 1974년에는 10% 정도 줄어든 842만원이었다.


△ 이방자 여사(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1989년 숨을 거둘 때까지 정부 보조금을 받아가며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았다. 말년에 그는 장애인들을 위해 자혜학교와 명혜학교 등을 만들어 자활사업에 나섰다.(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문서를 보고한 정종택 보고관은 “낙선재에서는 매년 3400만원을 요구하고, 문교부에서도 매년 1800만원 정도로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며 “각하께서 윤허하시면 문교부 건의안과 같이 문화재관리 특별회계 예비비 중에서 인상 지급토록 조치하겠습니다”고 적었다. 각하가 정 보고관의 건의를 윤허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법률에 근거 규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1996년 영구 귀국을 결심한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에게는 1996년 일제침략사 조사연구비라는 명목으로 1년에 1억2천만원, 1997년부터 숨을 거둔 2005년까지 문화관광부는 대동종약원을 통해 ‘품위유지비’라는 명목으로 매년 1억200만원을 지급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이구 황손의 후사를 잇기로 결정된 이원(41·의친왕의 9남 이충길씨의 아들)씨에게도 “이 돈을 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의문의 창덕궁 방화사건

1960년6월6일, 서류 조사 돌입하자 구황실재산 사무총국이 불탄 이유는…

해방 직전 옛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일본 방송인 출신 작가 혼다 세쓰코는 1980년 한국에 번역된 책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범우사)에서 영친왕의 비서를 지낸 조중구의 메모를 통해 1945년 해방 직전 옛 조선 황실의 재산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옛 조선 황실의 재산은 부동산 △임야 6만4천 정보(1정보는 3천 평) △밭 91만 평 △논 32만 평 △택지 31만 평, 동산은 △미술품 1만 수천 점 △은행예금 680만엔 △유가증권 250만엔 △현금 50만엔 등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메모에 전국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궁전과 묘지는 빠져 있다.

1954년 제정된 ‘구황실 재산처리법’으로 이 재산은 국가 소유가 됐지만, 온전히 국고로 보전되지 못한다. 김을한씨는 <인간 영친왕>에서 “동산은 말할 것도 없고 임야나 토지 등의 막대한 부동산이 불하나 임대계약의 형식으로 당시 권력가들이 나누어먹기로 다 가져갔다”며 “이렇게 털린 땅이 서울 근교만 해도 수십만 평은 된다”고 적었다.

꼬리가 길면 결국 잡히게 돼 있는 법이다. 보다 못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당시 대한여행사 이사장이던 오재경(작고)씨를 구황실재산 사무총국장으로 임명해 사무총국 개혁에 나선다. 그는 문교부 국장으로 있던 이창석씨를 데려다가 옛 황실의 재산 관련 서류를 꼼꼼히 모아 조사에 돌입하려 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60년 6월6일 밤 서류를 쌓아둔 창덕궁 내 구황실재산 사무총국이 불에 타 전소된 것이다. 불이 난 뒤 이씨는 “이것은 방화가 확실하다”고 말했지만 사건은 유야무야 덮히고 말았다.

김을한씨는 <인간 영친왕>에서 “그 뒤로 10여 년 동안에 벌써 여러 사람의 사무총국장이 파면 또는 철창 생활을 하게 된 것으로 봐 구황실 재산이라는 게 얼마나 무문하고 이권의 대상이 돼왔는가 알 수 있다”며 “사무총국이 황족들에게 겨우 몇십만원의 생활비를 주며 자기 돈을 거저 주듯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