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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특집 > 특집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7월26일 제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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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까, 이명박의 ‘유능한 CEO’ 신화

각종 특혜와 탈세·노조 탄압·부실 경영 등 의혹 투성이인 그의 ‘현대’ 시절

▣ 특별취재반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는 여전히 부동의 1위다. 최근 다소 떨어지기는 했지만 7월 중순까지도 그의 지지율은 여전히 30%를 크게 웃돌고 있다. 이 후보를 겨냥해 제기된 여러 도덕성 논란이 ‘국민들이 원하는 후보는 부처나 예수가 아니라 경제 지도자’라는 이 후보 쪽 대응 논리를 결정적으로 허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혁재 성공회대 교수는 “이명박 후보가 곧 경제 지도자라는 이미지는 그가 현대건설 재직 시절을 통해 얻은 샐러리맨의 우상 이미지에서 출발한다”며 “서울시장 재임 중 청계천 복원을 밀어붙인 것도 경제 지도자의 이미지를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현대건설 재직 시절이 신화를 탄생시켰다면, 서울시장 재임 중 죽어 있던 청계천을 복원한 것은 흑백의 신화에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다.

과연 이명박 후보가 최고경영자(CEO)로 재직하던 시절 현대건설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 1990년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회장(가운데)이 말레이시아를 방문해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노태우 비자금’사건에 등장

1995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천억원가량의 비자금을 받아 착복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노 전 대통령은 징역 15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35명도 뇌물 공여 혐의로 기소됐다.

이때 이명박 후보의 이름도 등장한다. 비자금이 오간 1991년 현대건설 회장이었던 이 후보가 공사 수주와 관련해, 유아무개 당시 석유개발공사 사장을 통해 노 전 대통령에게 8억1300만원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해 6월 현대건설은 석유개발공사에서 발주한 여천 석유비축기지 공사를 646억원에 따냈다. 석유비축기지 공사는 6공화국 시기의 주요 국책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 현대건설이 써낸 낙찰가는 공사 예정 금액의 94.2%이었다. 대부분의 국책공사가 공사 예정 금액의 80% 안팎 수준에서 낙찰되곤 했던 관례를 보면 94%가 넘는 공사 금액을 써냈다는 것은 예정가가 사전에 누출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검찰은 현대건설에서 관급공사 수주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차아무개 국내영업본부 전무와 이명박 회장을 불러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이 후보가 돈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 후보는 기소 대상이었던 35명의 기업인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후보가 자의가 아니라 석유개발공사 유 사장의 강제에 따라 돈을 냈고, 액수도 관례로 인정할 만했다는 것이 검찰의 발표였다.

당시 대검 중수1과장으로 비자금 수사를 담당했던 문영호 변호사는 “검찰이 이명박 후보를 조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직접 건넨 것이 아니라 유 사장을 통해 전달했고, 대가성도 약하다고 봤기 때문에 기소 대상에서는 제외한 것으로 기억된다”고 밝혔다. 검찰 조사를 받은 차아무개 전무는 관련 사실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다.이명박 후보 쪽은 회사 차원에서 진행된 사건의 책임을 이 후보 개인에게 묻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후보의 진수희 대변인은 “당시 사건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어두운 모습 가운데 하나로 그 책임을 이 후보에게 돌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며 “당시 이 후보는 그룹의 2인자로 정주영 명예회장의 심부름을 하는 역할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이명박 후보가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에 현대건설이 이런 유형의 특혜 의혹에 시달린 것은 이때뿐만이 아니었다.

현대건설이 1991년 10월에 따낸 상무대 이전공사 역시 특혜 의혹으로 얼룩진 사업이었다. 6공화국 시기의 대표적 국책사업이었던 상무대 이전공사는 현대건설과 청우종합건설이 공동 도급자로 참여했다.


△ 현대건설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명박 회장의 지시로 납치됐다고 주장했던 서정의씨. 1988년 5월11일 납치 6일 만에 돌아와 피랍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사진/보도사진연감89)

6공화국 대형 국책사업은 그의 것?

사업자가 선정된 이후 현대와 청우가 공사를 낙찰받게 된 경위에 대한 의혹이 불거져나왔다. 상무대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자 94년 국회에서는 국정조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6월 국정조사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이아무개 전 청우종합건설 부사장은 “(청우종건 대표로부터) 상무대 본공사 입찰 예정가가 1790억원이니 이 사실을 현대건설 쪽에 알려주라는 지시를 받았다”라고 폭로했다.

결국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현대와 청우종건은 공사 예정가 1790억원의 99%인 1771억원을 써내 낙찰받은 사실이, 1994년 국방부 검찰 기록 등을 통해 드러났다.

당시 건설업계에서는 이처럼 건설 관련 국책사업을 둘러싸고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를 건설업체의 수주 경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대형 국책사업의 경우 건설업체가 권력과 유착해 공사 예정 금액을 사전에 알아내는 사례가 다반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6공화국 시절 현대건설은 대형 국책공사를 가장 많이 따낸 업체였다. 1988년부터 92년까지 현대건설이 수주한 관급사업은 △여천 석유비축기지 공사 △상무대 이전공사 △공군기지 이전 사업 △영종도 신공항 3공구 △월성 원전 2호기 △태안화력발전소 1, 2호기 건설사업 등이 있다. 이명박 후보는 6공화국이 시작되던 88년 3월부터 92년 1월까지 현대건설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 국회 재무위 국세청 국정감사에서는 현대건설의 1천억원대 탈세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해 국정감사 속기록을 보면 국세청은 89년 2월부터 4월까지 현대건설과 한진, 극동건설, 효성물산 등에 대해 한 회사당 세무 공무원 100명 이상을 투입해 석 달 동안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벌인 결과, 이들 기업이 1천억원 이상의 탈세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그러나 과세 과정에서 정부 최고위층과의 직거래가 이뤄진 뒤 세금이 100억원으로 조정됐다는 주장이었다.

의혹을 제기했던 유인학 전 평화민주당 의원은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당시 국세청 내부 관계자의 제보를 통해 축소된 세금 가운데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제공됐다는 사실을 확보했다”며 “문제 제기를 할 때 이명박 후보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이 후보 역시 현대건설 회장직에 있었기 때문에 탈세 의혹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명박 후보가 현대건설 회장 시절 노조를 탄압했다는 의혹도 설명돼야 할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현대건설 노조 설립을 추진했던 서정의씨는 지난 6월21일 한나라당 검증위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조 탄압을 주장했다. 서씨는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회사 쪽이 납치했던 인물이다. 그는 납치의 배후에 이 후보가 있다고 주장했다.

노조 설립 추진자 납치, 배후 의혹도

서씨는 “노조 설립을 추진하던 중 이명박 회장이 직접 노조 설립을 포기하라고 회유했지만 이를 거부했다”며 “이 회장 면담 직후 회사 쪽이 사주한 조직폭력배들로부터 납치를 당했다”고 말했다.

서씨 납치 사건은 1988년 5월부터 6월까지 한 달 넘게 거의 모든 언론사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언론 보도의 초점은 이 후보의 연루 여부였다. 88년 6월4일치 <동아일보>는 ‘서씨 납치 최고 책임자는 누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만약 이 회장의 관련 여부를 밝히지 않고 사건을 종결지을 경우 ‘편파 수사’라는 여론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점을 검찰은 우려하고 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의문점은 (현대건설) 최 이사의 주장대로 최 이사가 혼자서 계획하고 지시했는가 하는 점이다.”

<동아일보>는 이와 함께 최 이사가 혼자 납치 청부 비용 2천만원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 현대건설 노조관계대책회의의 최종 결정권자는 이명박 회장이었다는 점 등을 들어 납치 배후를 강하게 암시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에서 활동했던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은 “1980년대 말 노조에 대한 회사 쪽의 탄압 행태를 보면 대체로 회사 경영진의 판단이 개입됐다”면서 “서씨 납치 사건 역시 최고위층의 지시 없이 아랫선에서 알아서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문제 제기에도 당시 검찰은 이 후보에 대해 서씨 납치 혐의에 대해서는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노조설립 방해 혐의에 따른 부당노동 행위에 대해서만 약식 기소했을 뿐이다.

이 후보가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절 현대건설의 노조 탄압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1988년 우여곡절 끝에 노조가 설립된 이후에도 회사 쪽은 노조 가입자들의 탈퇴를 끊임없이 강요했다. 89년 12월부터는 직원들의 노조가입률을 30% 이하로 떨어뜨린다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회사 간부들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현대건설의 이같은 부당노동행위는 1990년 국회 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문제로 지적됐다. 노동부는 이에 조사에 착수했고, 91년 2월 당시 정훈목 사장 등 고위간부 4명을 노동조합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언론에서는 이명박 회장을 노조 탄압의 핵심으로 지목했지만 입건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노조 탄압 의혹에 대해 이 후보 쪽은 “노조 설립을 좋아할 경영자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반면에 당시 현대건설 노조 간부들 사이에서는 이 회장이 노조와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고 반박했다.


△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명박 후보(왼쪽 두 번째)는 입사 후 12년만인 1977년 대표이사 사장, 그리고 88년 회장 자리에 올랐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맨 오른쪽)과 윷놀이를 하는 모습이다.

91년에 외화 부채 5891억원 ‘부실 경영’

1990년 현대건설은 중동 사태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그해 7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사태에서 어려움이 비롯됐다. 이라크에서 건설공사를 대거 수주해놓았던 현대건설이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사대금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명박 후보와 당시 함께 근무했던 임건우 전 현대건설 부사장은 “걸프전을 앞둔 89, 90년 이라크 경제 사정이 많이 악화되면서 자금 회수가 어렵게 되자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명박 회장에게 시킨 가장 중요한 업무가 자금 회수와 확보였다”며 “그래서 유럽 각지로 자금을 확보하러 다닌 것이 이 회장의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후보의 노력은 큰 빛을 보지 못했다. 1990년부터 자금 사정이 악화되기 시작한 현대건설은 91년 외화 부채가 5891억원으로, 전체 국내 기업 가운데 다섯 번째로 빚이 많은 회사로 꼽혔다.

1992년 초 이 회장이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현대건설은 1차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같은 해 6월1일과 30일자로 만기가 돌아온 이라크 공사 관련 어음 6천만달러에 대해 신디케이트론을 추진했지만 외환은행이 지급보증을 거부함으로써 부도 징후가 현실화됐다는 언론 보도가 터져나왔다.

당시 현대건설의 위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다. 이라크 수주를 무리하게 감행한 탓에 10억달러가 넘는 미수금이 발생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92년 대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정주영 명예회장을 겨냥한 정부 차원의 자금 압박이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영광은 내 덕, 책임질 일은 남 탓?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최고경영자였던 이명박 후보가 현대건설의 부실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그룹 계열사의 한 전직 최고경영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후보가 경제만큼은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경제 전문가를 자처할 수 있는 것은 현대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현대건설의 영광은 모두 자신의 몫으로 돌리면서 회장 재직 시절에 벌어졌던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한 책임은 부하 임직원이나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돌린다면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쳐지겠는가. 영광과 책임은 동시에 가져가야지, 어느 하나만 따로 떼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명박 조사는 안강민 담당?

비자금 사건 당시엔 검사로, 지금은 한나라당 국민검증위원장으로 만나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과정에서 검찰을 오갔을 때, 수사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은 안강민 한나라당 국민검증위원장이었다. 안 위원장은 당시 대검 중수부장으로 일하며 비자금 수사를 총괄했다.

묘하다면 묘한 두 사람의 인연을 안 위원장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이 후보를 기소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한겨레21>의 질문에, 그는 “이명박 후보가 검찰 조사를 받은 사실 자체에 대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기소를 한다고 해도 정주영씨라면 모를까 이 후보는 아예 기소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 안강민 한나라당 국민검증위원장(왼쪽)과 이명박 후보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사진/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안 위원장은 1995년 12월8일 검찰 출입기자들과의 일문일답 과정에서 “(이 후보에 대한 조사는) 노태우씨를 기소하기 훨씬 전의 일로 석유비축기지 공사와 관련해 현대건설 재직 시절 유아무개 전 석유개발공사 사장을 통해 노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조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를 기소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유 전 사장의 강제에 따라 돈을 냈고, 액수도 관례로 인정할 만했다”는 게 안 위원장의 설명이었다.

안 위원장과 이 후보는 한때 현대와 관계를 맺었다는 인연도 함께하고 있다. 안 위원장은 검찰을 떠난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현대강관(현재 현대하이스코)의 사외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검증청문회가 열린 지난 7월19일로 사실상 활동을 마친 검증위원회의 검증 결과는 안 위원장과 이 후보의 인연 때문에라도 더욱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검증위는 나름의 노력에도 한계를 드러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수사 당시에도 그랬듯, 당내 검증기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이번에도 조용히 헤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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