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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2001년04월24일 제356호 

[특집] “그날의 주검을 어찌 잊으랴”

베트남전 종전 26돌, 퐁니·퐁넛촌의 참화를 전하는 사진을 들고 현장에 가다

사진은 말이 없다. 사진 속의 주검들도 말이 없다.

빛바랜 11장의 흑백사진을 보고 알 수 있는 사실은 “참혹하다”는 것뿐이다.

미군 촬영자가 붙인 사진설명 속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익명으로만 존재해왔다. “한국군이 마을을 다녀간 뒤 발견된 시체들….”

<한겨레21>은 다시 퐁니·퐁넛촌을 찾았다. 베트남 중부 항구도시인 다낭으로부터 남쪽으로 23km 떨어진 이곳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가장 상징성을 띤 공간이다. 참화를 겪은 직후 미군에 의해 유일하게 사진자료가 남겨졌으며, 당일 작전과 관련하여 한국군 해당부대 장교와 하사관들이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로부터 대통령 특명수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National Archives &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지난해 11월 발견된 11장의 희생자 사진을 들고 그 가족들을 만났다.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이제 더이상 익명이 아니다. 그들 모두에겐 이름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으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목매는 가족들이 있었다. 33년이 지났지만 가족들은 결코 사진에 담긴 그날의 풍경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오는 4월30일은 베트남전 종전 26돌이다. 베트남전쟁은 20세기 전쟁사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으로 이야기된다. 불행한 것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했던 한국이 아직도 그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이 식민지배에 관하여 계속 헛소리를 하듯, 우리는 베트남에 관하여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던가.

<한겨레21>은 베트남전 종전 기념일을 맞아 현지르포와 함께 ‘베트남 특집’을 꾸몄다. 이 기획이 ‘한국 대 일본’, ‘한국 대 베트남’이라는 두 가지 관계를 동시에 생각해보는 계기를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



오른쪽 귀퉁이에 꼬마가 누워 있다.

7∼8명이 떼죽음당한 사진(1번 사진) 속에서 오직 꼬마의 얼굴만 정면으로 명확히 보인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온 듯한 군인의 하반신이 사진 가운데에 있고 왼쪽 나무엔 M16 소총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군인의 오른쪽 발 바로 옆에서 꼬마는 눈을 뜬 채 숨져 있다. 몸통은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고, 얼굴만 빠끔히 나왔다.

찐 쩌는 어디로 간 것일까

1968년 2월12일(음력 1월14일),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촌 럽남마을. 사진의 주인공은 그날 아침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마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하루 남은 정월 대보름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장을 볼 참이었다. 동구 밖을 지나 마을 초입에 있는 당산나무에 다다를 즈음, 갑자기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뛰기 시작했다. 1번 국도쪽에서 한국군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남조선 군인들이 쳐들어온다아!” 그도 겁에 질려 뛰었다. 총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 순간 어머니를 놓쳤다. 그리고….


사진/ 찐 쩌의 아버지 찐따이(위)와 어머니 쩐 티득(아래).


찐 쩌. 한창 뛰어놀았을 13살의 사내아이. 찐 따이(78)와 쩐 티득(74) 부부의 세째아들. 취재팀이 퐁니촌을 찾아 주민들에게 사진을 보여줬을 때 가장 먼저 나온 이름은 바로 이 찐 쩌였다. 취재팀 방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찐 쩌의 부모는 사진을 붙들고 눈물을 쏟았다. “어렸을 적 집안이 어려워 공부도 못 시켰어요. 매일 소 꼴 먹이러 다니고 고생만 했는데… 너무 가슴이 아려요.”

그날 한국군을 목격한 뒤 황급히 달아나던 쩐 티득은 고샅길에 이르러서야 찐 쩌가 없어진 걸 알았다. 한국군은 마을을 향해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쩐 티득은 찐 쩌를 찾기 위해 다시 들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얼마쯤 갔을까. 그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옆구리와 오른쪽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졌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튀고 있었다. 수류탄까지 날아들었다. 가물거리는 의식의 마지막 끈을 놓치면서도 그는 찐 쩌 생각만 했다. 찐 쩌는 어디로 간 것일까.

“찐 쩌는 우리 집으로 피신했어요.” 주민들 중에서 응웬 티 탄(41)이 나섰다. 그는 “당일 찐 쩌가 자신의 집 동굴에 숨어 있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그날 응웬 티 탄의 집 동굴에 숨어 있던 사람은 그와 찐 쩌를 포함해 언니 응웬 티 쫑(당시 11살), 남동생 응웬 득 퉁(당시 6살), 이모 판 티 응우(당시 32살), 이종사촌동생 도안 쩨 민(당시 5살), 오빠 응웬 딕 상(당시 15살) 등 7명이었다고 한다. “땅굴로 피신했어요. 근데 한국군이 안을 들여다보더니 수류탄을 보여주며 다 나오라고 했어요. 나가는 대로 다 쏴죽였지요.”

두 가슴이 잘린 채 “아빠…”


사진/ 사진 속에서 학살당한 가족 4명을 발견한 응웬 티 탄. 당시 학살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현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은 그와 오빠뿐이었다. 물론 응웬 티 탄 역시 왼쪽 옆구리에 총상을 입었다. 오빠는 엉덩이가 다 날아갈 정도의 중상을 입었고, 결국 성 불구자가 됐다. 시장에서 채소를 사서 마을로 들어오다 한국군과 맞닥뜨린 어머니 핀 티 찌(당시 34살)는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마을 입구에서 집단학살됐다.

응웬 티 탄은 사진 속의 주인공들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찐 쩌 왼편 소총 옆에 있는 사람이 언니에요, 그 오른쪽이 남동생, 그 옆이 이모, 그 옆이 이종사촌동생….” 그날 찐 쩌는 바로 그의 옆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 사진은 다 죽고나서 시체를 끌어낸 뒤 찍은 거예요. 맞아요. 이종사촌동생이 입었던 이 옷도 기억나요.” 그는 특히 찐 쩌가 두번 죽었다고 분노했다. 한국군이 동굴 속의 사람들을 차례로 사살한 뒤 집에 불을 질렀고, 찐 쩌를 불구덩이에 던졌다는 것이다. “제 가족들이 다 죽었어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매일 그날을 생각해요. 도대체 왜 죽였나요. 그땐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도 모르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모르겠어요.”

이미 <한겨레21>이 보도한 바 있지만, 68년 2월12일 퐁니·퐁넛촌에 진입한 것은 호이안에 주둔했던 청룡여단 제1대대1중대(중대장 김석현·현재 브라질 거주)였다. 당시 1중대원들은 베트콩 수색 소탕작전인 ‘괴룡 1호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퐁니·퐁넛촌 측면을 통과하던 한국 군인들은, 어디선가 날아온 저격에 부상자가 발생하자 민가쪽으로 공격의 방향을 틀었다. 이날 60여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희생됐다. 한국군은 왜 이토록 과격하게 나왔던 것일까. <파월한국군전사>에는 당일 군인들의 사망기록이 없다. 단 한명의 부상자뿐이다. 그런데 심지어는 여자의 가슴까지 자를 정도로 잔인했던 것일까.


사진/ 두 가슴을 잘린 응웬 티 탄(위)의 동생 응웬 티 호아(아래 오른쪽)와 그 현장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는 쩐 더 투언.


가슴이 잘린 엽기적인 모습으로 숨진 여인(2번 사진). 그의 이름은 응웬 티 탄(당시 21살·앞의 증언자와 동명이인)이었다. “아오자이를 즐겨입는 젊고 예쁜 처녀”였다고 마을 주민들은 기억했다. 사진을 촬영한 미군이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 있는 여자”라고 설명을 달았듯, 그는 다낭병원에 후송돼 하룻동안 생명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여동생 응웬 티 호아(46)는 아직도 언니의 얼굴이 생생하다며,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언니는 한쪽 가슴이 완전히 도려져 있었고, 또다른 가슴은 반쯤 베인 상태였어요. 그래서 가슴이 덜렁덜렁거렸죠. 왼쪽 팔은 잘려 있었고, 몸에 총상이 있었지만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있었어요. 병원에서 언니는 계속 ‘엄마’만을 불렀습니다. 엄마는 죽었는데 말이에요. 언니가 숨을 거둘 때의 모습도 기억나요. 눈을 뜨고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아빠’하고 나지막하게 불렀지요. 그리곤 고개를 떨구었어요. 마지막이었습니다.”

응웬 티 호아의 가족은 당시 고향인 퐁니촌으로부터 세 시간여 떨어진 항구도시, 다낭에 살고 있었다. 대보름 제사를 앞두고 향불을 올리기 위해 큰언니인 응웬 티 탄과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 등 4명이 고향을 찾았다. 4명 모두에게 그 길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이 되고 만 셈이다. 당시 집단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마을주민 쩐 티 투언(42)은 ‘목격자’였다. “한국군이 마을사람들을 한 지점에 모아놓고 총을 갈겼습니다. 저 역시 그곳에 있었지만 다행히도 맨 밑에 깔렸지요. 기어나와봤더니 한국군이 응웬 티 탄 언니를 강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대검으로 장난을 치고….”

막내에게 젖을 물리다 쓰러진 어머니


사진/ 막내에게 젖을 물리다 죽은 호아 타 지엔(왼쪽 사진 맨 아래)의 큰아들 레 딘 묵.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퐁니·퐁넛촌은 남베트남 정부군의 보호를 받는 전략촌이었다. 적성지역이 아니었기에 가족들의 분노는 더욱 하늘을 찔렀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난 직후 피해자 가족들은 시신을 메고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이 공동관리하는 초소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그날 레 딘 묵(당시 8살)은 그 초소 안에 있었다. 아버지는 미군 밑에서 일하는 남베트남 정부군이었다. 전날 밤 아버지 레딘 쭉(당시 40살)은 장남인 그를 포함하여 세명의 아들을 초소에서 재웠다고 한다. 돌이 채 안 된 막내 레 딘 망만 집에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에게, 어머니가 한국군의 총에 맞기 직전 막내아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사진 속의 어머니(3번 사진)는 정말 젖을 드러낸 채 누워 있다. “사진을 보자마자 엄마인 줄 바로 알아챘습니다. 얼굴이 다 드러나 있지 않지만, 가슴과 배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우리 네 형제 중에서 어머니는 저를 가장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셨거든요. 요즘도 가끔 엄마 꿈을 꿉니다.”

레 딘 묵은 아버지 레 딘 쭉이 아내의 죽음 앞에서 한숨만 쉬며 전전긍긍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미군 밑에서 근무했던 터라 남들처럼 화도 못 내고 속만 태웠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시신을 들쳐업고 성난 얼굴로 초소에 왔을 때 거기엔 어머니의 주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죠. 아버지는 그로부터 4년 뒤 어머니 곁으로 영영 가시고 말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인정했나요?”

마을 주민들은 취재팀이 들고간 11장의 사진을 돌려보면서 다섯 시간 동안 퀴즈를 풀듯 주검들의 이름을 알아맞혀나갔다. 얼굴의 특징, 옷, 시신의 상태와, 베트남 전범조사위에 기록된 ‘희생자 명단’을 대조해 확인하자 거의 모든 인물들의 신상명세가 나왔다. 형체조차 없이 불에 그을린 주검은 레 티 탄(70)의 큰시아버지였고, 팔에 붕대를 감고 있던 소녀는 쩐 티 득(당시 16살)이었다. 학살현장에서 6명의 가족을 잃었던 그는 2년 전 암으로 죽었다고 한다(공교롭게도 미국 취재결과 이 사진들을 찍었던 미군 본 J.Vaughn 상병도 94년, 46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을 보면서 일부 주민들은 흥분을 삭이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보면 볼수록 복수심과 증오심이 끓어오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정부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이 사건의 진실을 인정했나요?” 물론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쿠앙남=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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