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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1월24일 제6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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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창살 아래 웅크린 성병관리소

미군에 ‘깨끗한 몸’ 제공하기 위해 기지촌마다 설치… 죄인처럼 감금당했던 여성들

▣ 동두천=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소요산 앞에서 18년 동안 군밤 장사를 했다는 김길년(73) 할머니는 “최근 들어 건물에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새해 초 내린 폭설 탓에 이제는 사람들의 출입이 끊겨버린 건물 주변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소요산 입구에서 동두천시가 2002년 5월 문을 연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황폐하게 버려진 2층짜리 건물을 하나 만나게 된다. 그곳이 그 옛날 악명 높던 ‘동두천 성병관리소’ 터다. 미군들은 그 시설을 ‘몽키하우스’라 불렀는데, 어원이 무엇인지 확인할 도리는 없다.


△ 미군들은 성병관리소를 ‘몽키하우스’라 불렀다. 기지촌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여성들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여성들은 관리소가 정한 엄격한 일과표에 맞춰 살아야 했다.

“도망치다가 죽는 경우도”

성병관리소는 이미 사람들에게 잊혀진 기억이 됐다. 동두천시 보건소 예방의학담당 구자경 계장은 “성병관리소 직제는 1996년 1월 해체됐다”고 말했다. 관련 기록들도 폐기되거나 분실돼 찾을 수 없다. 동두천시가 1998년 4월30일 펴낸 <동두천 시사>를 보면, “성병관리소는 ‘전염병 예방법’ 29조에 의거 성병 보균자를 격리·수용 치료함으로써 (중략) 성병 전염을 근절시키려는 목적으로 운영된다”고 적혀 있다. 성병관리소는 소요산 본부 말고도 동두천시 생연동과 광암동에 진료소를 운영했고 직원은 별정 5급이었던 소장을 합쳐 12명이 근무했다.

관리소는 임질이나 매독에 걸린 것으로 확인된 여성들을 강제 수용해 치료하는 일종의 감금 시설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여성들의 생활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방에 트인 창문마다 쇠창살이 설치돼 있다. 다큐인포가 2004년 9월 써낸 <부끄러운 미군 문화 답사기>에는 “사회적 천민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기지촌 여성들이 이곳에서 도망치다가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방 안 쓰레기 더미 안에는 한때 여성들이 읽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한가족협회 발행 <가정의 벗> 1990년 8월치, 잡지 <연합>의 1992년 4월치 화보, 〈TV가이드〉 등이 뒹굴고 있다. 언론인 출신의 작가 김운성씨가 1998년에 쓴 <경기의 메아리>라는 책을 펼쳐드니 겉장 안쪽으로 ‘동두천시 성병관리소’라는 직인이 찍혀 있다. 건물의 당시 주소는 동두천시 소요동 8번지였고, 전화번호는 ‘5859’였다. 건물 안에서, 크고 작은 인권침해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시설은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을까. 미국 웨슬리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캐서린 문이 프린스턴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동맹 속의 섹스>(삼인 펴냄·2002)는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기지촌 주변 정화활동에 나서게 된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뒤좇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제 잔재였던 공창이 불법화된 것은 미군정 시절인 1948년 2월14일 ‘공창제도 등 폐지령’이 시행된 뒤고, 성매매가 불법화된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부랴부랴 만든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제정·공포된 1961년 11월9일 이후다. 그러나 국가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여성들과 ‘전쟁 미망인’들의 호구지책까지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군기지가 들어선 동두천·문산·평택·부평·이태원 등의 도시마다 기지촌이 형성됐고, 그 주변에는 성병에 찌든 여성들과 마약 복용자들이 흘러넘쳤다. 1960년대 말까지 한국 정부는 “기지촌 주변 여건을 개선해달라”는 미국 쪽의 요구에 방관자적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 관리소가 폐쇄된 뒤 건물은 버려졌다.

미군 잡아두기 위한 기지촌 정화사업

상황이 변한 것은 1969년 7월24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한 뒤다. 이후 미국은 1971년 말까지 한국에서 미 7사단을 포함한 병력 2만 명을 철수했다. 한국 정부가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정래혁 당시 국방부 장관은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군축 반대 광고를 실었고, 정일권 국무총리는 “7사단이 한국에서 나가면 개인적으로 활주로에 드러누울 것”이라고 말했다. 캐서린 문 교수는 논문에서 “한국 정부는 미군을 잡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고 말했다.

‘성병’ 문제는 1970년대 초·중반 한국과 미군 사이에 벌어진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 회의록에서 자주 거론되던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 합동위원회에 설치된 ‘민군 관계에 관한 소위원회’에서 미군 쪽은 “정기적 성병 검사를 강화하고, 감염 여성들을 격리시키라”고 강조했고, 한국 정부는 이를 대부분 수용했다.

한국 정부가 기지촌 주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와대 밑에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만든 것은 1971년 12월31일이었다. <한겨레21>은 1971년 이후 한국 정부가 추진한 기지촌 정화대책 관련 문건들을 추적했다. 첫 단서는 1972년 10월30일치 ‘관보’(6290호)에서 나왔다. 1972년 10월 유신 직후 설치된 ‘계엄사령부’는 그해 10월28일 각 계엄 사무소와 계엄 분소, 내무부, 법무부, 보사부 등에 ‘기지촌 정화대책’이라는 문건을 내려보낸다. 조치 사항은 딱 두 개였다. 하나는 마약 사범을 구속하라는 것, 두 번째는 성병 감염자는 완전 치료한다는 것이었다. <한겨레21>이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청와대 문건 ‘기지촌 정화대책’을 보면, 1977년 현재 기지촌 주변의 ‘윤락여성’은 9935명이고, 성병 진료기관은 62개소였다. 여성들은 깨끗한 상태에서 미군에게 ‘제공’되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성병 검진을 받았고, 문제가 생길 때는 공짜로 치료를 받았다. 국가는 한 달에 한 번씩 여성들을 불러모아 “미군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것과 “외화를 벌어들이는 당신들은 애국자”라는 교육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능한 국가의 잘못을 받아내야 하는 것은 늘 여성의 몸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우리를 지배해오던 중국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주던 여성들의 이름은 ‘공녀’였고,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그들의 ‘위안부’에서 ‘양공주’로 변해왔다. 미군 당국은 깨끗한 여성의 몸을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행정력을 동원해 이를 만족시켜야 했으며, 그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떠넘긴 한국 사회는 여성들을 ‘양갈보’라 부르며 경멸했다.

한국 사회의 수치스러운 망각

1월15일 <한겨레21> 취재진이 찾은 버려진 건물의 벽면에는 병에 걸려 끌려온 여성들이 지켜야 할 ‘일과표’가 남아 있었다. 아침 7시 기상, 8시 조식, 10시 검진 및 치료, 11시 교육. 12시에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아침과 똑같은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들이 어떻게 그 생활을 받아냈는지 지금에 와서 따지고 드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그들의 희생 위에서 살아난 한국 사회가 그 여성들을 이미 기억에서 지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수치스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