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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8년01월24일 제6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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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가 없어 나를 경멸하던 엄마의 눈빛을”

기지촌 할머니 51명 설문조사…국가는 미군 요구대로 여성들 관리하던 ‘거대한 포주’

2008년 평택은 들썩이고 있다. 주한미군 기지의 2012~2013년 평택 이전계획이 나온 뒤, 온갖 장밋빛 구상들이 쏟아졌다. 개발지구의 땅값은 치솟았고, 시내 곳곳에는 ‘슈퍼평택’ ‘국제도시 평택’ 등의 펼침막이 펄럭인다.

미군 부대 캠프 험프리(K-6)가 있는 평택 안정리에도 재개발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곳에서 수십 년 동안 미군을 상대했던 ‘기지촌 할머니’ 59명은 골목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며 이 바람을 지켜보고 있다. 한평생 ‘출구 없는 삶’을 산 이들은 생존의 마지막 보루인 단칸방에서조차 밀려날까 마음 졸이고 있다. <한겨레21>은 평택시 안정리에 살고 있는 ‘기지촌 할머니’ 51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

▣ 평택=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월8일 추운 밤이었다.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 10여 개의 클럽이 불을 밝힌 큰길에서 5분쯤 걸어갔다. 허름한 2층짜리 시멘트 건물 1층. 파란색 페인트가 드문드문 벗겨진 미닫이 나무 대문을 밀었다. 힘을 줘도 잘 열리지 않고 삐그덕거리기만 했다. 간신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앞이 캄캄했다. 0.5평(1.6㎡) 부엌이었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지만 불은 켜지지 않았다. “할머니”를 부르자 안쪽 또 다른 미닫이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제야 불빛이 비쳤다.

월세방에서도 쫓겨날 상황

방문 앞 검붉은 연탄보일러 옆에 연탄 20여 장이 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김귀자(78·가명) 할머니는 천식이 심해져 두 달째 병원에 있다가 이날 퇴원한 길이었다. 할머니의 단칸방 화장대 거울에는 60~70년대 할리우드 여배우처럼 머리를 부풀려 올린 젊은 시절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의 ‘그녀’는 단아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김 할머니는 천식 때문에 한 마디 하고 숨을 몰아쉬고, 또 한 마디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1963년이었을거야. 윤복희가 미니스커트 입기도 전에 내가 먼저 미니스커트 입고 부츠 신고 평택극장을 돌아다녔어. 그때 파라다이스 클럽 기주(문지기)하던 사람이 지금도 여기 사는데, 날 보면 놀려. 에이(A)급 색시였던 그 김 마담이 늙은이가 다 됐다고….” 1951년 21살에 결혼한 김 할머니는 애가 들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대를 끊을 거면 제 발로 나가달라”는 시어머니의 성화에 1년 만에 집에서 쫓겨나, 부산 미군부대 안 클럽의 웨이트리스로 취직하면서 ‘기지촌 생활’을 시작했다.

‘애를 못 낳는다’던 그는 몇 년 뒤 거짓말처럼 아이를 가졌다. 미군의 아이였다. 김 할머니는 “애가 안 들어선 것이 내 탓이 아닌데 쫓겨난 것이 억울해”라고 말했다. 태어난 애를 “싸들고” 전남편과 시어머니를 찾아가 따지기도 했다. 클럽 웨이트리스 생활, 마담 생활, 미군과의 동거 등 40여 년의 기지촌 생활이 김 할머니에게 남긴 건 월 8만원짜리 단칸방과 천식·골다공증·담석증과, 6살 된 아들을 입양 보내고 먹었던 수면제 28알의 기억과, 2년 전 3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아들 제임스뿐이다.

김 할머니처럼 ‘기지촌 생활’을 한 할머니 59명이 여전히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K-6)가 있는 평택시 안정리에 살고 있다. 매주 화요일 오후 2시면, 할머니들은 안정리 팽성읍에 있는 햇살사회복지회로 모인다. 안정리에 살고 있는 기지촌 여성노인을 돌보는 활동을 하는 단체다. 8일에도 어김없이 모인 할머니들은 “등 붙일 만한, 떠나야 할 불안감 없이 살 수 있는 집 한 채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기지촌 할머니의 90%가 가족 없이 혼자 살고 있다. 우리나라 65살 이상 노인 중 독거노인 비율(18%)보다 다섯 배가량 높은 수치다.

<한겨레21>은 1월4일부터 11일까지 햇살사회복지회와 함께 안정리에 살고 있는 기지촌 여성노인 실태조사를 했다. 59명 중 51명의 할머니가 설문에 응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일일이 문항을 읽어주고 답변을 들었다. 3명은 완강히 거부했고, 5명은 피하거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응답한 이들의 96%인 49명의 할머니가 안정리에서 혼자 살고 있다. 우리나라 65살 이상 노인 중 독거노인 비율은 18.1%(2005년 통계청 총조사인구)인 데 견줘 다섯 배가량 높다. 다른 노인들보다 훨씬 ‘소외’된 여건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은 대부분 셋방살이 신세다. 90%인 44명의 할머니들은 전세·월세살이를 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월세방에 사는 할머니들의 평균 임대료는 13만2200원이다.

할머니들은 이 월세방에서조차 밀려날 위기에 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사업이 2012~2013년 완료를 목표로 진행됨에 따라 미군기지 예정지 주변인 안정리 땅값이 자꾸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10만원짜리 월세방에 사는 전명옥(69·가명) 할머니는 “이 집도 팔려서 1~2년 안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7가구가 살던 슬레이트 지붕 건물엔 이제 할머니를 포함해 3가구만 남았다.

미군 요구로 인종차별 금지

새로 올 미군에게 집터를 내줘야 할지도 모르는 할머니들은, 젊은 시절에는 그 미군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관리되고 규제됐다. 대표적인 것이 1971년 시작된 성병검진이다. 박정희 정권이 1971~76년 ‘기지촌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벌인 사업으로, 당시 ‘기지촌 여성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출근도장 찍듯 성병 유무를 확인받고 ‘보건증’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황정숙(63·가명) 할머니는 검사받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약국 원장이 그때 보건소장이었어. 여자가 검사할 때도 있었는데 그 영감이 검사할 때면 면봉으로 자궁을 어찌나 꾹 누르는지, 너무 아프고 수치스러웠어. 그 영감은 우리를 ‘더러운 양색시’라고 생각했나봐. 그래서 살짝 눌러도 될 걸 부러 꾹 누르는 거 같았어.” 검사에서 불합격판정을 받은 할머니들은 ‘수용소’라고 불리는 곳으로 끌려갔다. ‘성병관리소’를 할머니들은 ‘감옥’ ‘수용소’라 부렀다. “팬티 쪼가리 몇 개 싸서 갔어. 사흘이고 나흘이고 거기서 하릴없이 주는 약 먹고 있는 거지. 산골짝에 있는 덴데, 거기 갇혀 있는 게 뭐 좋아. 도망도 많이 나오고, 빨리 나오려고 지키는 사람한테 돈도 주고 그랬지.”

미군의 성병 예방 등을 목적으로 한 미군 당국의 요구에서 출발한 기지촌 정화대책으로 혜택을 받은 이들은 미군이었다. 성병을 옮기는 ‘주범’으로 관리·규제된 대상은 기지촌 여성이었다. 국가를 대신해 현장 감독 역할을 한 이들은 미군의 영업정지 명령을 받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한 클럽 업주들이었다. 군대와 국가가 ‘거대한 포주’였다.


안정리에서 포주들의 규제는 더 거셌다. 1971년 7월 흑인들이 클럽 내 흑인차별을 문제 삼아 클럽을 돌아다니며 한국인을 때리고 기물을 부순 사건이 일어났다. 주민 80여 명이 부상당한 ‘안정리 사건’이다. 당시 흑인들의 난동은 ‘영내’의 흑백 갈등을 ‘영외’로 끌고 나온 측면이 컸다. ‘만만한’ 클럽과 한국인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한 셈이다. 실제 당시 클럽들 중에는 흑인 미군이 가는 곳과 백인 미군이 가는 곳이 구분됐고, 피부색에 따라 출입이 통제되기도 했다. 어떤 피부색의 미군을 상대하느냐에 따라 여성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갈렸다.

이 사건으로 미군 당국은 열흘간 군인들의 외출을 금지했다. 손영순(65·가명) 할머니는 “색시 생활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그때라니까. 우리는 다 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어. 근데 미군들이 안 나오니까 어떡해. 먹고살 길이 막막했지”라고 말했다. 이 사건 뒤에 미군은 클럽의 인종차별을 강하게 규제했고, 미군 당국의 ‘영업정지’ 명령의 위력을 아는 포주들은 이에 충실히 따랐다. 캐서린 문 미국 웨슬리대학 교수는 그의 책 <동맹 속의 섹스>(삼인 펴냄)에서 “주한미군 사령부 대표들이 클럽 업주, 종업원, 군인 그리고 여타 기지촌 주민에게 인종차별과 관련한 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회합을 정기적으로 가졌다”고 쓰고 있다. 미군은 인종차별 금지 명령을 내렸고, 외무부는 이를 지침으로 발표했고, 업주들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숫자만 알았어도 할로, 할로 했겠나

윤복례(51·가명)씨는 흑인 군인과의 성관계를 강요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맣잖아. 몸에 깜장이 묻을까 침대 위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문밖으로 뛰어나갔더니 글쎄 포주가 기다리고 있는거야. 매맞고 다시 들어갔지 뭐.” 미군과 한국 정부간의 결정이 기지촌 여성 개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성들은 업주들의 다양한 요구를 받아내야 했다. 윤복례씨는 업주들이 건넨 코데인 시럽을 많이 먹었다. 윤씨는 “미군들과 관계를 할 때 아프면 술에 타 먹으라고 포주들이 줬어. 다른 약들도 줬어. 다 감기약인데 먹으면 뿅가서 실없이 웃게 되고 자신감도 생기고 아픈 것도 잊어”라고 말했다. 윤씨는 “그러다 중독돼서 우리가 직접 약국 가서 사먹고 그랬어”라고 덧붙였다. 감기약으로 사용되는 코데인 시럽은 모르핀 성분이 들어 있는 일종의 마취제다.


△ 할머니들은 미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대부분 입양 보냈다. 한 할머니의 ‘되찾은 아들’이 보내온 가족사진.

윤씨는 서른 살에 ‘양색시’ 일을 관뒀다. 아이를 열한 번째 지우고서였다. “아이가 들어섰다고 하면 포주가 그길로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애를 지워줬어. 그러면 뭐해. 그러고 다시 그날 밤 내 방으로 미군을 밀어넣었는데.” 윤씨는 그렇게 열한 번의 수술을 하고 나니, 남자 손이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진저리쳐진다고 했다. 윤씨가 그 뒤로 했던 일은 공사장 막일이다. “차라리 막일이 마음 편했어. 사람들이 그러대. ‘양색시’ 하다가 공사판에서 일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그러면서 나를 좋게 봐줬어.”

윤씨는 지금 신부전증, 천식, 고지혈증 등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몸무게가 2년 전보다 15kg이 불어 있다. 숨이 차서 바깥에 나가 걷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방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의사는 ‘우울증’ 진단도 내렸다.

윤씨가 그나마 막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육체적 조건이 돼서였다. 많은 할머니들은 일찍이 건강을 잃었다. 기지촌에서 떠나고 싶어도,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도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1999년까지 ‘히빠리’(클럽에 소속되지 않고 미군을 상대로 홀로 성매매를 하는 나이 든 여성을 뜻하는 은어)를 해 벌이가 좋았다는 강영애(73·가명) 할머니가 하고 싶었던 일은 여관 계산대에서 계산하는 일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 그 일이 할머니에게는 ‘머나먼 꿈’이었다. “그거라면 몸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근데 그거 하나 할 때도 ‘1, 2, 3, 4’ 숫자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글자도 좀 알아야 하잖아. 내가 숫자 배워서 시계를 읽을 수 있게 된 게 3~4년 전이야. 교회 다니기 시작하면서 십일조를 내야 하는데, 어느 봉투가 내 봉투인지 모르니까 교회 사람들이 가르쳐주더라고. 그전에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가르쳐달라 말도 못하겠고. 내가 ‘1, 2, 3, 4’만 알았어도 그렇게 ‘할로, 할로’ 외치지 않았을지 몰라.” 할머니는 연방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시절에는 그래서 미군과 결혼하는 게 꿈이었다. 김귀자 할머니는 “미군과 결혼하지 못해 자살하는 아가씨들도 여럿 봤다”고 했다. “지금은 문방구로 바뀐 길 건너편 집에 살던 여자는 얼굴이 참 잘생겼어. 결혼하자는 미군이 있었지. 근데 웬걸. 어느 날부터 이 미군이 월급날에도 안 나오고, 연락도 안 되는 거야. 결국 여자가 벽에 자기 머리를 탕탕 찧어 뇌진탕으로 죽었어. 자살한 거지.”

아이를 보내고 약을 먹다

미군과 결혼해도 미국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미군과 결혼하고 같이 미국에 가서 아이 둘을 낳았던 전명옥 할머니는 결국 애 둘을 두고 돌아왔다. “남편이 술을 하도 먹어서 별거하게 됐고, 이후 시민권을 얻어야 하는데 보증을 서주겠다던 시집 식구들이 다 거절했어. 결국 보증인을 구하지 못해 시민권 얻기를 포기했고, 불법으로 계속 미국에 있을 수 없으니까 한국으로 왔어. 젖먹이 아들딸은 지들 할머니한테 두고 왔어. 돌아가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양색시’ 일인데 애들을 잘 키울 수 없을 것 같았어.” 전 할머니는 한국으로 와서, 그전에 생활하던 이곳 안정리로 다시 와 웨이트리스 일을 했다. 돌아온 그날부터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애들 생각에 참을 수가 없어서 밤에 잠이 안 왔어. 그때부터 마약을 했어. 나도 하고, 몰래 팔기도 하고. ” 마약 판매를 하다 적발된 전 할머니는 감방 생활을 하기도 했다.

많은 할머니들의 큰 상처 중 하나는 ‘아이’다. 아이를 보내고 수면제 수십 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들이 많았다. <한겨레21> 조사에서 설문에 응답한 51명의 할머니 중 17명이 “미군의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 평택 안정리에는 10여 개의 클럽이 1960년대 이후 여전히 영업 중이다. 이웃, 가족 등으로부터 ‘양색시’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상처를 키워온 할머니들은 안정리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돈도, 힘도, 용기도 없다.

아이를 낳은 할머니들 중 14명은 아이를 입양 보냈다. 황정숙 할머니는 “우리 아이는 흑인 혼혈이었어. 우여곡절 끝에 낳았는데 키울 길이 막막한 거야. 애를 포대기에 싸서 친정 엄마한테 갔어. 근데 그때 나를 경멸하던 엄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라고 했다. “내 엄마부터 그렇게 우리를 업수이보는데 세상은 오죽하겠어? 용기가 없어서 입양 보냈지. 어디선가 잘살고 있을 거야.” 정은님(69) 할머니는 아이가 다 큰 중학교 때에야 입양 보냈다. “내가 끼고 살고 싶었어. 기를 쓰고 키웠지. 근데 학교 생활이 문제였어. 아이들이 화장실 갈 때마다 놀리니까 애가 화장실을 못 가고 책상에만 앉아 있었던 거야. 한겨울이었어. 학교 화장실을 못 가서 바지에 오줌을 쌌나봐. 집에 왔는데 그 추운 겨울에, 글쎄, 바지가 꽁꽁 얼어가지고는…. 어떡해. (입양) 보내야지.” 주변에서도 다 입양을 권유했다. 아이를 낳으면 펄벅재단이나 대한사회복지회 같은 곳에서 찾아와 “한국에서 혼혈아를 잘 키우기란 힘들다”라며 입양을 권유하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상처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힘들어한다. 최근 4년 안에 이사를 한 17명의 할머니들 중 6명이 “주민과의 불화”로 이사했다고 털어놓았다. 사소한 것들이 할머니들에겐 다 시빗거리가 된다. 오달희(70·가명) 할머니는 “김치를 주는데 막 담은 김치를 안 주고 다 쉬어빠진 걸 찌개 해 먹으라고 주는 거야. 나를 무시하는 거야, 뭐야?”라며 먼젓번 집주인에 대해 한소리 했다. ‘버럭쟁이’인 이찬남(70·가명) 할머니는 이웃과 말할 때는 신경을 곤두세우는 탓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지금은 덜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에게 양색시인 거 티 안 내려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단어를 안 쓰려고 무진장 애썼어.”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사이…

1월8일 점심식사 자리에서도 식사를 준비 중인 봉사자들에게 할머니들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한 봉사자가 무를 썰다 하나 집어먹는 걸 보고는 이찬남 할머니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썰던 걸 지저분하게 주워먹으면 우리가 어떻게 먹어?” 결국 이 할머니는 이날 끝내 식사를 하지 않았다. 빵을 누가 더 많이 먹었는지, 세제·양말 같은 기념품이 누구에게 더 많이 갔는지 등도 주요 관심 대상이자 분쟁의 씨앗이다. 5년째 햇살사회복지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윤아무개 봉사자는 “할머니들이 상처가 많아 자기가 더 이상 다치지 않기 위해 먼저 화내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씨는 “그래도 마음결은 곱고 굉장히 순수하다”고 덧붙였다.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바라보는 것은 기지촌 여성을 부르는 단어 앞에 ‘양’자를 붙이며 그들을 주변화한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할머니들은 자발적으로 이 일을 선택했고, 또 어떤 할머니들은 휩쓸려가기도 했다.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익숙함에 기대어 그대로 남은 할머니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들어왔건 끝은 비슷했다. 할머니들에겐 ‘출구’가 없었다. 이들의 진짜 이름은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이었다. 국가는, 공동체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금 할머니들의 자리는 필리핀 여성들이 채우고 있다. 안정애(49)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은 “국가가 사죄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사이, 미군기지 근처에서 국가와 군대와 가부장의 삼각동맹에 따른 여성 착취는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어제의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때 레인보우77을 안 먹었다면

서울로 돈 벌러 왔다가 기지촌으로 들어선 최숙희 할머니 사연

최숙희(66·가명) 할머니는 노래를 불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할머니가 안정리에 온 건 18살 때다. 충청도 수덕에서 농사짓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서울 사는 조카가 내려와 “아지매, 뭐하러 이렇게 콩밭, 보리밭 매고 시골서 고생해? 서울 가면 좋은 직장 많아. 서울 가서 돈 벌어”라고 말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 서울에 올라왔다. 영등포, 종로 등의 수건공장, 옷공장도 다녀보고 아기 보는 일, 남의 집 청소도 했지만 벌이는 시원찮았다.


어느 주말 친구가 평택에 아는 언니가 있다며 놀러가자고 할 때까지 할머니는 서울로 돈 벌러온 ‘소녀가장’이었다. 처음 간 안정리에서 할머니의 삶은 길을 틀었다. “1960년이었어. 그때 안정리는 허허벌판이었어. 시내에 일곱 집만 있다고 주소도 ‘안정리 일곱집매’였어. 지금 집 있는 자리도 그때는 다 솔밭이었어. 근데 여섯 시가 되니까, 이 좁은 안정리 흙길이 미군으로 꽉 차는 거야. 한 200명은 되는 것 같아. 신기하데. 얼굴이 하얗고, 눈은 퍼렇고, 코는 또 어찌나 큰지. 여기가 무슨 별세계 같았어.”

클럽에 앉아서 할머니는 주스 같은 술 레인보우77을 시켰다. 그때 갑자기 얼굴 하얀 서전(부사관)이 할머니에게 달러를 손에 쥐어줬다. “주스를 먹으면 내가 돈을 내야 하는데 도리어 나한테 돈을 주는 거야. 그래, 언니한테 물었지. 이거 받아도 되냐고. 근데 언니가 괜찮대. 안정리에선 원래 그렇게 하는 거래. 그래서 생각했지. ‘아, 여기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벌리는 데구나. 이렇게 쉬운 방법도 있구나’라고.”

그러고서 최 할머니는 인천, 부평 등 당시 미군기지를 돌아다녔다. 인천에서 만난 미군과의 사이에서 애도 낳았다. 애 아빠는 자기 나라로 훌쩍 돌아갔다. 애가 세 살 되던 해, 자고 일어났더니 부평에 있던 미군기지도 싹 사라졌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부대가 이사가버렸어. 어떡해, 애를 들쳐업고 동두천, 의정부, 송탄을 다 다녔어. 근데 방값도 비싸고 미군도 이제는 안 붙어. 그래 돌고 돌다 처음 왔던 안정리로 온 거야.”

안정리에 다시 온 때 서른하나. 할머니는 이제 한물간 ‘나이 든 색시’가 됐다. “어린애들 노는 데 나이 먹으니 낄 수가 없어. 낮에는 식당에서 일했어. 저녁에 집에 와서 목욕하고 화장 싹 하고 돈 벌러 부대로 갔어. 저녁 6시30분~7시에 부대 앞에 가면 버스 세 대가 서 있어. 장교클럽, 서전클럽, 졸병클럽 각각 25명씩 끊어서, 부대 안으로 들어가서 미군이랑 놀 수 있었어. 돈 많은 유부남이 있는 장교클럽은 어린애들 몫이고, 술 먹고 춤추고 놀기 좋은 졸병클럽이 우리 몫이야. 그래도 어디야? 부대 안에서 놀면 좀 점잖게 놀 수 있었어. 그렇게 마흔 돼서는 클럽 마담을 하고, 그렇게 하다가 지금이 됐네.”

할머니는 녹내장 때문에 손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찍어내며 이야기했다. 인터뷰 마지막 무렵에 할머니는 <앵두나무 처녀>를 다시 읊조렸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드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짓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그때 그 레인보우77을 먹지 않았더라면 할머니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때 미군이 없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