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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 2002년01월23일 제394호 

너 ‘자격’ 있니?

미래인생을 향한 투자, 자격증 취득에 인생을 건 직장인들로 학원가 와글와글


사진/ 98~99년에는 실직으로 인해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전문자격증을 따기 위해 몰려들었다면 지금은 직장인들이 자발적으로 학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서울 제일고시학원 공인중개사 과정 강의모습.

밤 9시 학원가 밀집지역인 서울 노량진의 한교고시학원 5층. 저녁 7시부터 시작된 세무사, 감정평가사 강의실 문이 열리면서 수강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온다. 20대 학생에서부터 넥타이를 맨 30대 직장인, 늙수그레한 40대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뒤섞여 복도는 사람들로 꽉 들어찬다. 휴식시간을 틈타 커피 한잔으로 머리를 식히려는 사람들이다. 이 시간에 504호 감정평가사 대비 회계학 강의실에서 교재를 읽고 있던 원아무개(28)씨에게 “어떻게 학원에 오게 됐냐”고 물었더니 대뜸 시험 때문에 직장을 그만뒀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험공부를 해왔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5년 동안 다니던 건설회사를 지난주에 그만뒀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평가사 자격증만 따면 취업이 보장되고 평생 고용불안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1∼2년 정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옆방에서 강의를 듣고 있던 김아무개(33)씨 역시 지난해 8월 9년 동안 근무해온 회사를 그만두고 감정평가사 시험을 준비중이다.

확실한 미래 대비책은 자격증?


사진/ 서울 종로고시학원 입구.


서울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 부근의 미국공인회계사(AICPA) 교육기관인 ISA 6층 강의실에서도 이런 풍경은 그대로 살아난다. 삼일회계법인이 운영하는 이 학원은 강의실마다 100여명의 수강생들로 꽉꽉 들어찬다. 강의실 옆에는 작은 랩(LAB)이 서너개 붙어 있는데 이곳도 사람들로 촘촘히 들어차 있다. 강의테이프를 비디오에 넣고 1명씩 공부하는 방이다. 5층 상담실에는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상담을 진행중이며, 맞은편 비디오 대여창구에는 강의테이프를 빌리려는 직장인과 대학생 20∼30명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이 학원에서 만난 김인홍(40)씨는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으나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자격증 시험에 나섰다고 털어놨다. “자격증이 모든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격증을 따놓아야 앞날을 대비할 수 있지 않겠어요?” 당장 전직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지금 언제든지 자신의 두발로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한달에 15만원씩 들여 강의를 듣는다는 것이다. 그의 이력을 들어보면 이런 얘기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0여년 동안 은행에 근무하다가 99년 자신이 다니던 은행이 통폐합되면서 졸지에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외국계 회사에 취직했지만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이제는 학벌이 아니라 실력이 중요한 세상이고, 회사든 내 개인적으로든 앞으로 어찌될지 모른다. 어찌됐든 확실한 대비책은 자격증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같은 학원에서 만난 김아무개(40)씨는 금융감독원 과장이다. 그는 다목적으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승진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직장을 그만두거나 이민가거나 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자기 부서 동료 3∼4명도 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학생에서부터 30대 직장인, 직장을 그만둔 40∼50대까지 고시학원들은 자격증을 따려는 인파들로 밤낮없이 붐빈다. 요즘은 방학이라 학생들까지 대거 밀려들어 그야말로 학원들은 대호황을 누리고 있다. 물론 학원가의 자격증 열풍이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고시 바람이 열병처럼 번진 것은 이미 3∼4년 전 일이다. 또 외환위기 직후에도 은행 퇴출 등으로 직장을 잃은 실직자들이 98∼99년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가를 찾았다.

더이상 월급쟁이는 싫다


사진/ 서울 노량진 한국법학원 영상독서실에서 강의를 반복청취하는 수강생들. 인터넷 사이트의 사이버 강의도 급증하고 있다.


1999∼2000년의 각종 자격증 응시자들이 크게 늘어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법시험 응시자는 2000년 2만3천명에서 2001년 2만7천명으로 불었으며, 1월12일 마감된 올해 시험에는 3만명을 넘어섰다. 세무사 시험 응시자도 98년 6900명, 99년 8100명에서 2000년 1만1천명, 2001년 1만400명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변리사·공인노무사·공인중개사 응시자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공인회계사·감정평가사·법무사·관세사는 1999, 2000년 대폭 늘었다가 2001년 약간 줄어들었다. 외환위기 이후 실직자들이 쏟아지면서 일시적으로 응시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고용불안과 취업난이 극심해지자 자격증 취득 열기는 다시 살아나는 양상이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자격증 1개씩 준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다. 인터넷을 통해 자격시험 강의를 동영상으로 진행하는 온라인 전문 사이트 와우패스의 임재환(34) 사장은 “지난해 1월 1만2천여명이었던 유료 회원이 지금 4만명으로 늘어났다”며 “학생이 다수인 일반 학원과 달리 직장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특히 전직을 고려하는 경우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일반 학원보다 인터넷 강의를 선호한다는 설명이다.

학원가에서는 지난해부터 자격증 공부를 새로 시작한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에 올해부터 응시자가 다시 급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특히 변리사 시험 등 몇몇 자격증은 올해부터 선발인원을 미리 정하는 상대평가에서 일정한 점수 이상이면 숫자에 관계없이 합격시키는 절대평가로 전환하기 때문에 응시자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변리사 시험 전문학원 패튼스쿨의 김철호 상담실장은 “변리사 시험 응시자가 지난해 8751명이었지만 올해는 1만5천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최근의 자격증 열풍은 외환위기 직후와는 다른 양상이다. 98∼99년에는 실직으로 인해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전문 자격증을 따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학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회사를 그만두고 자격증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격증 준비를 미래 인생에 대한 투자로 보기 때문이다. 서울의 종로행정고시학원에서 공인중개사 강의를 듣고 있는 김아무개(47)씨는 “20년간 다니던 직장을 최근 그만뒀다”며 “더이상 월급쟁이로 살기 싫다. 언제 떨려날지 모르는 고용불안에 시달리느니 능력껏 일할 수 있는 중개사가 훨씬 낫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서는 시험을 준비하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변호사·공인회계사·변리사 등의 고급 자격증을 취득해 부와 성공을 거머쥐기 위해서나 학생들의 취업난 때문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월급쟁이로 취업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고려대 4학년 박미희(24·전파공학과)씨는 “돈만 많이 벌려는 게 아니다”며 “자격증이 있어야 사회에서 자신을 내세울 수 있고 적절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시험을 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절대평가 전환하는 올해가 찬스


사진/ 학벌이 아니라 실력이 중요한 세상. 고용불안의 시대는 미래를 위해 자격증을 따라고 권한다.


자격증 열풍을 일으키는 데는 정부의 전문 자격사 시험제도 개혁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행정규제개혁위원회가 지난 98년 전문 자격사들의 수를 대폭 늘리기로 방침을 정한 뒤 합격의 문이 크게 넓어졌기 때문이다. 자격증 소지자들을 늘려 국민에 대한 서비스 수준을 높인다는 취지다. 이에 따라 국가공인 자격시험들이 선발방식을 기존의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잇따라 전환하고 있다. 특히 변리사·세무사·감정평가사는 올해부터 절대평가로 전환된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추진해온 시험제도 개혁의 효과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절대평가 시험 첫해에 많은 합격자가 나온다는 것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다. 어렵게 출제했다가 합격자 수가 급감했을 경우 사회적 비난여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94년 절대평가로 실시된 감정평가사 시험이 어렵게 출제되는 바람에 93년 130명이었던 합격자가 19명으로 줄었고, 그 결과 시험 자체가 95년부터 상대평가로 바뀌어버렸다. 이런 이유로 많은 수험생들이 2002년을 노리고 있다. 앞으로 많은 자격증 소지자들이 쏟아져나올 것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진출해 자리를 잡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올해가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물론 전문 자격증을 딴다고 해서 앞날이 모두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응시자가 많아지고 시험제도 개혁으로 합격자들은 크게 늘어나면서 전문 자격증도 희소가치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97년 700명을 뽑았던 변호사 시험의 올해 선발 예정인원은 1천명이다. 회계사도 97년 453명에서 1천명으로 늘어났다. 절대평가를 하는 변리사·세무사·감정평가사는 인원이 대폭 늘어날 것으로 예상될 뿐 몇명이 합격할지 짐작조차 어렵다. 더 문제는 이들이 실무수습을 끝내는 1∼2년 뒤다. 이들이 대거 개업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가 떨어지다보니 자격증을 따놓고 아예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공인노무사의 경우 자격증 소지자 1180명 가운데 개업 노무사는 350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대기업의 노무 담당 직원들이다. 개업한다 해도 그다지 수입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공인중개사는 모두 12만여명. 이 가운데 개업한 사람은 3만명에 불과하다. 9만여장의 중개사 자격증이 장롱 속에서 잠자고 있는 셈이다. 관세사의 경우 한때 고소득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응시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공인중개사, 9만장의 자격증이 잠잔다

그래도 대부분의 자격증 학원은 사람들이 미어터진다. 9만장의 자격증이 잠자고 있는 공인중개사의 경우도 응시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 종로행정고시학원 공인중개사반 강의실은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발디딜 틈이 없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월급쟁이 생활에 인생을 맡겨놓을 수만은 없다”고. 그리고 대안은 자격증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이동임 박사는 “우리나라는 그동안 학력이 중요시됐지만 고학력화와 기술의 급격한 변화로 학력의 의미가 축소되고 자격증이 새로운 지표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1년 주요 자격시험 응시 현황
직종 응시자 합격자
변호사 27625 991
공인회계사 12047 1014
세무사 10468 603
변리사 8751 200
법무사 6706 101
감정평가사 6094 183
공인중개사 132996 15084
공인노무사 1283 201
관세사 2074 94
 

(단위 : 명)

글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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