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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 2000년11월15일 제334호 

[표지이야기] 편견인가, 꿰뚫어 본 것인가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의 보고서 “쿠앙남성 주둔 한국군은 무능·부패·잔혹”


(사진/총을 맞은 채 연못 근처에서 발견된 퐁니·퐁넛촌 여성들.이 사진을 찍은 '본'은 “가운데 임신한 여성은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듯 머리앞이 날아가 있다”고 썼다)


“한국군의 전투력은 타군보다 강하고, 무섭다. 한국군과는 접전하지 말라. 한국군 병사들은 잔인하다. 한국군은 약점을 찾아서 기습하거나, 저격을 해서 전투력을 약화시켜라.”

한 베트남전 참전용사는 최근 수기에서 월맹군사령부가 한국군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한국군은 “용감하고, 멋있고, 친절하며, 인정이 많고, 예의 바른” 군대였다. 이같은 사실은 또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일관된 지휘방침으로도 입증된다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미군과는 달리,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한국군은 베트남인의 정서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대민지원사업과 군사활동 등을 통해 그들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비아냥 섞인 부정적 평가

그러나 <한겨레21>이 입수한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의 베트남전 관련 문서들에서 미국이 평가한 한국군의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미군은 문서에서 한국군에 대해 “전투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주월미군, 남베트남 군대 등 연합군에 비협조적이었고, 베트남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혹행위를 했으며, 암시장 거래 등 각종 불법행위를 일삼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미군은 한국군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몇몇 부분에서는 비아냥까지 섞어 비난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정반대의 평가가 어떻게 가능할까.

파월한국군에 대한 미군쪽의 이같은 평가는 당시의 상황을 엄밀하게 객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 이같은 평가에는 한국군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녹아 있을 여지도 많다. 특히 무엇보다 주월미군이 자신들의 군사적·정치적 실책을 한국군에 덮어씌우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파월한국군전사> <해병전투사> 등 한국쪽의 공식적인 역사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한국군에 대한 미국쪽의 평가라는 점에서 이를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것은 베트남파병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새로운 장을 연다는 의미가 있다는 게 <한겨레21>의 판단이다.

한국군에 대한 평가는 1968년 2월12일부터 1969년 4월15일에 이르는 1년2개월 동안 다낭시에 파견된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이 주월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에게 보내는 장문의 보고서에 등장하고 있다. 평가대상 부대로는 당시 베트남 쿠앙남성 지역에서 작전을 벌인 한국군 해병 제2여단에 맞춰져 있다.

미군은 크게 △한국 해병 제2여단의 전투력 및 전투태도 △주월미군과 남베트남군대와의 협조 관계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 △암시장 거래 등 전투와 무관한 불법행위 등을 주로 다뤘다.

먼저 한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미군은 “베트콩 등 적들에 대한 주요 군사행동을 주도적으로 취하기를 꺼린다”고 분석했다. 1968년 3월18일치 보고는 “한국군은 정기순찰과 매복을 하기 위해 그들의 사령부를 떠나기를 꺼려했고, 베트콩의 매복을 매우 두려워했으며 (베트콩이) 밤에 나타나는 상황에 대응하는 것을 피했다”고 썼다. 같은달 25일치 보고에서는 “쿠앙남성 자문단이 (베트콩에 대한) 수색과 파괴활동을 요청했지만 이를 무시했다”는 언급도 등장한다.

“한국군보다 베트공이 더 낫다”


(사진/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의 보고서는 “한국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증오심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미군은 또 한국군이 주월미군과 남베트남군대와의 협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연합군 사이에 이뤄져야 할 정보 무료교환 요청이나, 남베트남 정부 관료들로 구성된 성(省) 자문단의 권유나 요청에 대해서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한국군의 자세도 문제삼고 있다.

“많은 한국군들이 남베트남 정부가 자유롭고 자율적인 정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대부분의 한국군은 남베트남 경찰과 관련된 법률을 무시한다. 한국군 책임전술지역에서 남베트남 군경찰의 교통통제권한과 도로차단 기능을 뺏어버리는 것이 그 한 가지 예이다.… 김연상 준장도 (연합군들이 참여하는) 지휘관 회의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것은 그에게 남베트남의 주권에 대한 강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1969.7.9)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는 가장 심각하게,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지난 두달 사이 한국군 정찰대가 마을에서 발생한 조그마한 총격전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를 살해한 사건이 최소한 세번 발생했다. 가장 불명예스러운 사건은 1968년 2월12일 퐁니(Phong Nhi)마을에서 일어났다. 그곳에서는 79명(또는 69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베트남 농민들은 한국군을 매우 두려워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군보다 베트콩이 더 낫다고 얘기했다.”(1968.3.18)

“한국군 부대가 디엔 반(Dien Van)현에 주둔했고 그들은 우리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우리 마을로 들어와서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내고 총을 쏴 사람들을 죽이고 가족들의 몸을 자르는 등 야만적인 행위를 했다. 한국군 부대는 시체를 그대로 두거나 숨기고 그 현장을 떠났다.”(1969.2)

미군과 남베트남 군 수뇌부들은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은 “게릴라전의 정치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군의 잔혹행위로 인한 결과로서 베트남 주민을 상대로 한 심리전에서도 실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증오심은 너무나 심각해서 주민들은 베트콩이 설치한 지뢰나 그들이 저지른 테러까지 종종 한국군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베트콩의 정치적 선동활동에 의해 ‘박정희 용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얻은 한국군들은, 도저히 가망성은 없지만, 만일 그들이 위대한 전사 또는 인도주의자로 돌변한다 하더라도 주민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1969.4.23)

피난민 처리 무원칙한 대응


(사진/베트남전 기간중 미군 수륙양용차와 함께 협동작전을 벌이는 한국 해병들)


“베트남 관리들과 베트남 민간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반한감정의 깊이와 강렬함 때문에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다.… 실상 한국군이 동맹군으로서 행동하기보다는 아시아의 점령군과도 같이 행동하는 상황이 계속됐기 때문에 베트남 관리들의 경고는 효과를 볼 가능성이 없었다.”(1969.4.25)

미군은 한국군의 용감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 용감성 역시 잔혹행위와 연관돼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물론 우리는 한국군의 용감성을 높이 평가한다”면서도 “우리가 몇몇 사건을 통해 보았듯이 한국부대는 공산주의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무고한 민간인들의 죽음과 손상에는 무관심했다”는 식이다.

피난민 처리에 대한 무원칙한 대응도 비판거리로 등장한다. “한국군의 인구통제 방법은 오히려 한국군 책임전술 지역 안에서 베트콩에 대한 동조자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됐다.… 한국군은 작전이 불필요한 지역에서도 피난민을 만들어낸다. 최근에는 호이 안(Hoi An) 근처의 캄 하이(Cam Hai)와 캄 안(Cam An)마을에서 한국군이 베트남 농부들을 특별한 이유없이 이동시켰다. 단순히 그들의 책임전술지역을 늘리고 농부들을 인구가 집중된 도시지역으로 밀집시키기 위해서였는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재정착을 위해 사용될 영토가 줄어들기 때문이다.”(1968.3.18)

암시장에 물건을 내다팔거나, 물건을 공공연히 훔치는 등의 ‘도덕적 해이’는 보고서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단골메뉴다.

“한국군의 암시장 운영은 디엔 반 지구, 빈 수엉(Vinh Xuan)과 라이 나이(Lai Nghi)마을에서 한창 진행중인 것이 명백하다. 우리는 이 마을들에서 한국군들이 소다수, C레이션, 쌀을 대규모로 팔고 있다는 보고서를 끊임없이 받고 있다. 1969년 3월13일 아침 우리는 한국지프차가 라이 나이마을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뒤 마을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 주민들이 마을에 주차돼 있는 한국 군지프에서 맥주와 소다수 상자들을 가지고 오는 것을 목격했다. 지프차를 조사하면서 우리는 뒷좌석이 전부 맥주와 소다수 박스로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1969.3.14)

“한국 해병 제2여단 소속 병사들이 포획한 쌀을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다는 보고서를 받았다. 쌀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마을 사람들이 사지 않으려 하자 한국군들은 남베트남군과 민병대를 상대로 이 쌀을 팔려 했다. 그들도 거부하자 한국군들은 민병대들이 기지로 돌아가는 못하도록 했다. 같은날 한국군들은 주월미군사령부 기지로 찾아와서 관할 벙커 근처에 수류탄을 투하할 것이라고 위협했으며 이후 장전한 권총을 꺼내서 수류탄을 쏘겠다며 협박했다. 이 사건과 연루된 한국군들은 대부분은 술에 취한 상태였다.”(1969.3.16)

암시장에서의 활약


(사진/잿더미가 된 퐁니·퐁넛촌 주민.이 상황은 <한겨레21>이 취재한 생존자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암시장 운영과 관련해 보고서(1969.1.30)는 “한국군이 가장 성공적으로 얻어낸 성과는 사실상 (암시장 등을 통한) 경제적인 것”이었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군들이 베트콩들을 상대로 노획한 쌀을 처리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대목도 있다. 문서에 따르면 1969년 1월 한국 해병 제2여단은 베트콩이 숨겨놓은 225톤의 쌀 은닉처를 발견해 쌀을 부대로 후송했다. 쿠앙남성 성장(省長)은 한국군에 노획한 쌀 일부를 피난민에게 먹이는 데 쓸 수 있도록 요청했다. 한국군은 어디에 쌀이 필요한지를 여단에 보고해야 하며 한국군이 주민들에게 직접 쌀을 배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뒤 제2여단은 피난민들에게 먹일 목적으로 300포대의 쌀을 주민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국군은 빈 포대 300개가 반환될 때까지 배포를 중단했고, 대신 이 쌀을 암시장에서 베트남 정부의 공식가격보다 아주 낮은 가격으로 팔았다는 것이다.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한국군을 묘사한 대목도 많다. “1969년 3월18일 한국군 부대 경계선 안에 침입한 돼지를 베트남 농부가 데려가려 하자, 한국군은 그 돼지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1969년 3월17일 수엔 쿠앙(Xuyen Quang)마을에 있던 한국군들이 맥주를 마시고는 돈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또 그 가게에서 일하는 소녀한테서 돈을 훔쳤다고 한다.” “한국 병사들이 라디오·맥주·쇠고기·치즈·닭고기 등을 훔쳤다”는 표현도 나온다.

미군은 한국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당히 과격한 제안을 하고 있다. 즉, 한국군을 후방으로 보내자는 주장이다. “정치적·군사적 상황이 허락한다면 한국 해병 제2여단은 평정지역이 아닌 지역으로 재배치되어야 하며 적어도 동등한 규모의 다른 여단으로 교체돼야 한다”(68.7.27)거나 “베트콩이 100% 장악하고 있어 아무나 닥치는대로 죽일 수 있는 곳을 한국군의 책임전술지역으로 하자.”(1969.4.23)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미군은 결론적으로 “상급 사령부가 한국군의 과거행태를 고려해 이 지역의 평정작전에 다른 연합군 군대를 대대적으로 투입하는 것을 즉각적인 관심사항으로 삼지 않는 한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채명신 총사령관의 반박





(사진/어머니와 함께 흉측한 모습으로 죽은 아이(맨위).미군들이 주검을 수습하고 있다(아래). 작전에 참여했던 장교들은 이곳이 미군 자매부락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당시 파월한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채명신(74·예비역 중장)씨는 <한겨레21>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미군쪽의 이런 평가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채씨는 “베트남전의 성격 규정에서부터 한국군에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를 허용할지 여부 등 크고 작은 문제를 두고 주월미군과 주월한국군 사이에는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다”면서 “(이 때문에) 미군이 비판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군이 아시아문화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다 게릴라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나중에는 한국군이 채택했던 전술개념 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었다”고 덧붙였다.

전투력 문제에 대해 그는 “해병대의 경우 적극적인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오히려 참전 초기 성급하게 공격에 치중한 나머지 베트콩들의 매복이나 기습공격에 다수가 사망한 사건 등을 허위보고하는 사례도 발견돼 3명 이상의 적군을 추격할 때는 사령관의 허가를 받으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였다”고 반박했다.

그는 그러나 한국군이 암시장 거래 등을 벌였다는 등의 미군쪽 지적에 대해서는 “전쟁터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라며서 한국군에도 이같은 불법행위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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