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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 2000년11월15일 제334호 

[표지이야기] “한국군도 많이 당했다”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총사령관 인터뷰… 남베트남군 사령관 만나 사과한 적도



<한겨레21>이 공개한 미군 문서는 베트남 민간인을 상대로 한 한국군의 잔혹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물증이다. 이 껄끄러운 ‘증거’에 대한 참전경험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11월11일 주월한국군 초대사령관(1965∼69년)을 지낸 채명신(74·예비역 중장)씨를 자택에서 만났다. 4시간여의 인터뷰에서 그는 지난해 12월 <한겨레21>과의 전화인터뷰(287호)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쏟아놓았다. 지난해 그는 “양민사살 보고는 고사하고 그런 소문을 들어본 적도 없다. 들었다면 당연히 현지에서 조사했을 텐데 그런 일 없다”고 잘라 말한 바 있다.

먼저 문서 가운데 ‘쿠앙남성의 퐁니·퐁넛마을 민간인 학살사건’(1968년 2월12일)과 관련해 그와 웨스트몰랜드 주월미군사령관 사이에서 오갔던 서신들을 제시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 서신 교환이 단순한 정보교류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했으나, 곧 미군쪽 조사요청이 여러 번 있었고 그 요청에 따라 한국군사령부가 자체적으로 조사를 벌인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다.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해 미군쪽의 정식 조사 요청은 몇번이나 있었나.

=글쎄, 여러 차례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사령관으로서 예하부대의 자체 조사를 지시한 사실은 있나.

=있다. 청룡부대가 있던 투이 호아(Tuy Hoa)나 추 라이(Chu Lai) 같은 지역에서도 그랬고…. 맹호부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참전 초기 대부분의 마을은 베트콩의 수중에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나.

한국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미군쪽이 여러 번 문제제기를 했고 주월한국군사령부에 공식적으로 조사를 요청한 사실이 책임있는 당사자로부터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또 해병대말고 다른 한국군 부대들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채씨는 그러나 조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졌으며, 조사 결과 ‘베트콩의 음모’라고 결론을 내린 배경과 이유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다만 “미군쪽이나 월남군이나 남베트남 정부당국에서 정식으로 조사 요청을 해오는 사건의 경우 우리쪽에서 조사한 결과 그들의 주장이 맞으면 피해에 대해 응분의 보상을 한다”고만 말해 여운을 남겼다. 그는 특히 게릴라전, 즉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기 어려운’ 비정규전 형식으로 진행된 베트남전의 성격 때문에 민간인들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진에는 아이들과 여성들이 다수 포함돼 있고, 살해행위도 전투가 끝난 뒤에 이뤄진 것으로 돼 있다.

=있을 수 있는 얘기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거나 “베트콩들이 한국해병대의 옷을 입고 변장한 것”이라고 답변했나.

=참전 초기 한국군도 베트콩에 의해 많이 당했다. 베트콩들이 한국군 시체의 사지를 따로 찢어 한국군들이 볼 수 있도록 나무에 걸어놓기도 했다. 적 지역에 수색을 나갔던 청룡부대나 맹호부대도 (베트남) 북쪽지역에서 많이 당했다. 그런 참혹한 광경을 보자마자 마을에 들어가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고 와서는 민간인 학살했다고 보고 안 한다. 인간이 불완전하고 감정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전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전투행위가 일단 끝난 상태라면 민간인들을 포로로 취급해야 하는 것 아닌가.

=비정규전에서는 원칙적으로 포로라는 말이 별로 성립이 안 된다.

-그렇더라도 아이와 여자들을 즉결처형하는 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지 않나.

=베트콩들은 보통 무기를 숨겨놓은 채 공격을 한다. 심지어 고아원의 어린아이들이 공격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법규는 이를 배신행위로 규정한다. 나도 베트남 어린아이들한테 당할 뻔한 일도 몇번 있었다. 베트콩이 만들어놓은 선전비디오를 보면 ‘아이들과 노인들도 함께 참여해서 우리는 이렇게 용감하게 싸웠다’고 자랑하는 내용도 많다. 그것이 베트콩이다.

채씨는 “양민학살은 소문도 들은 적이 없다”는 지난해 말의 주장을 수정해 ‘민간인 사살 범죄’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채씨의 태도 변화는 1968년 베트남 민간인 6명을 사살하도록 지휘한 혐의로 사형(1심)과 무기징역(2·3심)을 선고받았던 김종수(59)씨 사건과 관련해 그가 관할관으로서 선고형량에 최종 동의한 사실이 올해 7월 뒤늦게 밝혀진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김씨를 끝까지 유죄로 본 이유로 △김씨 소대가 애초 명령한 지점이 아닌 다른 지역에 매복해 명령을 어긴 점 △사살 뒤 주검을 애초 매복지역으로 옮겨놓아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점 △주검에서 손목시계 등을 빼앗은 점 등을 꼽았다. 그는 “이 사건이 벌어진 뒤 남베트남 사령관을 만나 ‘미안하게 됐다’고 말하자, 사령관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것은 전쟁이다. 그런 것 가지고 군 사령관인 당신이 나에게 사과할 필요가 뭐 있나’ 하면서 오히려 사과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러나 “이 사건처럼 민간인 사살은 있었지만, 조직적이면서도 의도적으로 이뤄지는 ‘양민학살’과는 성격히 전혀 다르다”며 “내가 이미 주장한 바대로 우리 정부와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나서 진상조사를 하는 등의 검증과정을 거치기 전까지 양민학살이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고 강조했다. “대법원 판결도 양민학살이 아니라 민간인 사살이라고 했고 그게 정당하다고 본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올해 7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민간인 사살사건이 김씨 이외에도 10여명 더 있었는데 사건마다 엄정히 처리했다”면서 “전쟁의 규모와 기간 등에 비춰보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피해는 아주 적은 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와 함께 한국군의 공격원칙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신속히 움직이고 (마을을) 완전포위한 뒤 최대한의 심리전으로 베트콩을 끌어내는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민간인들과의 대면접촉과정에서 위험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예하부대가 전과를 과장하거나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전투상황에 대해 허위보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참전 초기 청룡부대가 베트콩의 매복전술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추격하다가 5∼6명이 한꺼번에 전사하면, ‘수색 나갔다가 베트콩이 설치해놓은 부비트랩에 걸렸다’는 식으로 거짓보고를 해 직접 현장시찰을 나가 바로잡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주월한국군사령부가 허위보고를 없애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참전 경험자들의 일치된 증언에 비춰볼 때 민간인 학살 문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은 군 수뇌부에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김종수씨 사건 역시 베트남 지방신문이 기사화하기 전까지는 한국군사령부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채씨는 밝혔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하나는 참전중인 남베트남 하사관의 부인을 한국군이 강간한 사건이 있어 물의를 빚었다는 것, 또 하나는 매매춘 여성으로 구성된 이른바 ‘위안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공식적으로 검토됐으나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군의 남베트관 하사관 부인 강간사건 때도 남베트남 사령관에게 사과하자 그가 ‘남베트남군이나 미군은 더한데 한국군은 이제서야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고 말해 더이상 말을 못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창석 기자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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