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통일운동의 지평을 바꿨다

(사진/지난 8월 파주 경모공원에서 열린 북한어린이돕기걷기대회. 북한동포돕기운동은 대북적개심을 민족애로 바꿔놓았다.)

올 한해 남한사회를 뜨겁게 달궈온 민간단체의 ‘북한동포돕기운동’은 1 1월 초 현재까지 2백억원(한적 기탁분) 이상의 지원금을 모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이 과정에서 종교인 중심의 서명운동 참여자만 1백7만명에 이르 는 등 수백만명이 굶주리는 북한동포돕기에 조그만 정성을 보탰다. 이것 은 옥수수, 쌀, 특수 어린이영양식, 옷, 라면, 무·배추 종자 등 다양한 형태로 바뀌어 북한동포들에게 전달됐다. 이번 운동은 이밖에 북한동포들 의 남한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성과도 거뒀다. 북한적십자사는 지난 6월 남쪽의 지원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등 여러 경로로 ‘남쪽 인민 ’의 정성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민족애가 대북적개심 눌렀다

북한동포돕기운동의 이보다 더 큰 성과가 있다. 우리 사회 내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 변화는 북한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통일론, 정부와 민간기구의 통일과정에서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돕기운동 관계자들은 “이런 변화가 통일조국의 청사진을 좀더 구체적으 로 만들 것”이라면서 “이것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차기 정부의 통일 정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민간단체들은 우선 북한돕기운동이 “통일운동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 는 대중성을 보였다”는 데 주목한다. 최근 ‘옷보내기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김동규 부장은 올해 북한돕기운동에 참가한 이들이 수백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그는 “북한돕기단체 만도 수백개가 넘는 상황에서 정확한 참가자수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 렵다”면서도 “직·간접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수백만명은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실제로 종교인들이 중심이 됐던 ‘식량 1백만t 긴급지원을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이 지난 8월26일 통일원에 전달한 서명록에만도 모두 1백7만명 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 결과는 지난 7월5일 서명이 시작된 지 채 두달 도 안 되는 기간에 거둔 것이라는 점에서 국민들의 높은 관심도를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이는 언론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상태 속에서 진행됐다.

북한돕기운동이 어떻게 이런 광범한 지지를 얻었을까. 이에 대해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박기호 신부는 “우리의 전통적인 민족애가 북한 식량난을 계기로 대북적개심을 누르고 복원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도 “북한의 식량난이 북한주민들은 호전적이라 는 막연한 불안감을 상당 부분 씻어줬다”면서 “물론 이런 움직임이 다 른 부문에서 시작됐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운동이 민족화합에 크게 기여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 결과 이 운동은 보수적이라고 평가되던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범국민운 동이 될 수 있었다. 한 예로 기독교 예장 통합·합동, 기독교 성결교회 등 ‘보수적’인 교회들이 주로 참가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한 관계자도 “그동안 소속 교회들이 북한에 대해 닫혀 있었다”면서 “식량 난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게 사실”이라고 전한다.


민족화해운동으로 개념전환 시도할 때

(사진/7·4남북공동성명 25돌을 맞아 정부차원의 대북지원을 호소하는 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 )

‘평화의 쌀 보내기 운동’을 벌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한교협·KNCC )의 김동완 총무는 이런 높은 국민참여를 “남북한간의 진정한 화해와 나 눔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한교협은 현재 “과거는 화해하고 오늘은 나 누고 평화를 만들어 통일로 가자”는 모토를 내세우고 있다. 말하자면 북 한돕기운동이 통일로 가는 ‘첫 단추’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민간단체들은 그런데 이 첫 단추가 “통일운동의 변화를 강제했다”고 평 가한다. 즉 북한돕기운동이 통일운동을 이전의 ‘이론 중심’에서 ‘생활 중심’으로 바꾸는 실질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통일운동의 전면에 등장했던 ‘연방제’ 등 통일방안이 북한돕기운 동이 진행되면서 전선에서 상당히 후퇴한 것은 그 좋은 실례다.

‘겨레사랑-북녘동포돕기운동’의 한축을 이루는 전국연합의 조성범 자주 통일위원장은 “전국연합은 이미 몇년 전부터 통일운동의 대중화·일상화 를 주장해왔다”면서 “북한돕기운동이 바로 그런 성격의 운동”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또 “이 운동은 이론이 아닌 북한동포를 돕는 실제과정에 서 국민들에게 남북한이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올 한해 한총련 주류가 북한돕기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 잘못된 이론’이 “통일운동에서 국민들과의 괴리를 확대시킨 사례”로 꼽았다.

한교협 김동완 총무의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북한돕기운 동은 남북사회가 진정한 통합에 이르려면 ‘정치형태의 통일’을 넘어 ‘ 삶에서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 다. 즉 북한주민들의 구체적인 식량난이나 탈북자 소식에 접하면서 ‘거 대한 담론’이던 통일이 ‘북한주민들과 더불어 살기’로 변화하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간단체들은 이런 움직임이 결코 ‘이론없는 통일운동’을 추구 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들은 북한돕기운동이 오히려 ‘구체성 에 바탕을 둔 통일논의 재구성’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밝힌다. 우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김동규 부장은 통일운동이 민족화해운동이나 평 화공존운동으로 개념전환을 시도할 때라고 설명한다. 그는 현재의 남북한 상황이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났지만 흡수통일은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 고 진단한 뒤 “따라서 현재 중요한 것은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까’ 하 는 고민”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반해 겨레사랑-북녘동포돕기는 ‘실천적 활동에서 나온 통일론’을 고민중이다. 재야단체들이 주축을 이룬 ‘겨레사랑’은 북한돕기운동의 열기를 각 지역단위로 결집한 뒤 이들이 북한의 각 지역과 자매결연을 맺 는 등 민간교류의 확대로 발전시킬 구상이다. 이와 관련해 천주교 정의구 현전국사제단은 “이를 통해 기존의 반공정책이 더불어 살아가는 통일세 상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는 대항논리를 만들어갈 예정”이다. 한 마디로 북한돕기운동이 각 단체에 ‘새로운 통일론 모색기’를 만들어준 셈인데, 역으로 모든 논의가 북한돕기운동을 앞으로의 통일논의 시발점으 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통일과정의 민간영역 필요성 확인

(사진/식량 1백만t 지원을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 종교인들 중심으로 두달도 안 돼 1백7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

민간운동단체들은 북한돕기운동의 성과 중 하나로 통일과정에서 ‘민간영 역’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해준 점을 꼽는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박기호 신부는 북한돕기운동이 “정부의 힘만으로 진정한 남북통일을 이 루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언론·기업의 참여 금지, 창구단일화 등 여러 가지 제약조건을 두었는데도 북한돕기운동이 국민들의 높은 성원 속에 진행되고 있는 것은 ‘정부가 할 수 없는 영역 ’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구체적으로 정치영역에서 해결 할 수 없는 통일과정에서의 마음가짐 등은 민간영역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다.

한교협 김동완 총무는 통일과정에서 바람직한 정부와 민간부문 관계를 “ 정부는 민간을 신뢰하고 민간은 정부의 통일방안을 이해하고 한발 앞서 나아가는 것”으로 정식화했다. 정치영역에서 막히는 부분을 민간이 뚫어 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돕기운동은 또 민간통일부문의 존재 이유가 ‘정권이 아닌 국민의 시 각에서 바라보는 통일관’에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민족 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의 법륜 집행위원장은 “현재는 남북 정부나 민간 단체 그 누구도 ‘실효성 있는 통일방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서 “이때 민간부문은 북한돕기운동 등 구체적 실천에 바탕한, 실현 가능한 정책을 정부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통일과정에서 정부와 민간이 서로 협력하는 것은 필수적”이라면서도 “북한돕기운동단 체들은 ‘정권의 이익’이 아닌 ‘민중의 이익’에 바탕을 둔 문제제기를 해 둘 사이엔 갈등도 내재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민간 북한돕기운동단체들은 북한에 대한 인식이 ‘대등한 통일주 체’에서 ‘원조의 대상’으로 급격하게 바뀐 상황에서 민간 통일운동이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고 강조한다. 남쪽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북한주민 들이 패배의식에 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칫 북한돕기운 동이 ‘1등 국민, 2등 국민’식의 인식을 조장한다면 이는 더불어 사는 연습이기도 한 이 운동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이다.

민간운동단체들은 북녘동포돕기운동이 가져온 이런 다양한 변화가 어떤 결과를 빚을지는 내년 초 들어설 새 정부의 통일방안에 의해 크게 좌우될 것으로 예측한다. 실제로 민간진영의 북한돕기운동이 큰 성과를 보였음에 도, 북한의 식량난 해소에는 여전히 정부 차원의 대규모 원조가 핵심적 요소이다. 더욱이 민간단체들은 오는 98년은 새 정부가 북한의 사회간접 자본, 농업개혁, 전력부족 문제 등 구조조정문제에 본격 나서야 할 시점 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새 정부의 통일정책이 남북관계는 물론 남한 내의 화합에도 큰 영향을 줄 것임이 분명하다. 민간단체들은 우선은 새 정부가 올바른 통일 의 길을 가도록 촉구하는 데 초점을 맞출 예정이지만, 만일 “새 정부가 정권적 이익에 매몰돼 현 김영삼 정권의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본격적인 싸움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새 정부 대북정책 정권안보 이용 말아야

이와 관련해 한 북한돕기 민간운동단체의 간사는 “최근 어떤 후보를 찍 는 게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지를 묻는 문의전화가 많이 걸려온다” 면서 “그런데 사실 나 스스로도 어떤 후보가 진정한 통일에 기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밝혔다. 보수계층을 의식한 후보들의 지나친 ‘안전운행’으로 차별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민간 북한동포돕기운동단체들의 전망엔 희망이 더 많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현 정권과 같은 대북지원정책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현 재 각당 대통령 후보들도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과연 새 정부의 대북정책이 전환기를 맞고 있는 국내의 통일인식과 조화 를 이뤄 ‘7천만 민족’의 화합에 일조할지, 민간운동단체들과 계속 불협 화음을 낼지 궁금하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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