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격동하는 재벌/거평그룹

노련한 M&A ‘마이더스 나승렬’

(사진/짧은 기간에 재계 28위로 급성장한 거평그룹 서울 강남 사옥.)

“가방끈이 짧아도 열심히 살다보니 최고학부에 다니는 여러분들 앞에 서 게 되는군요.” 초등학교 학력이 유일한 나승렬(53) 거평그룹 회장은 얼 마전 서울대학교 경영대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다. 강연주제는 ‘거평그 룹의 M&A(기업 인수합병) 사례’. 나 회장은 요즘 그룹총수들 중에서는 가장 잘 나가는 인기강사다. 지난해부터 외부강연 요청이 하나, 둘씩 들 어오기 시작하더니 올 들어서는 연초부터 대학교, 민간단체는 물론 정부 에 이르기까지 쇄도하고 있다. 이번 11월 한달 동안 예약된 것만 이미 3 건에 이른다.


새우, 고래를 삼키다

나 회장의 인기는 그가 총수로 있는 거평그룹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거평의 성장사는 한 중소기업이 한국 기업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 로 짧은 기간 안에 굴지의 대기업으로 비약발전한 압축성장의 과정, 바로 그것이다. 이런 나 회장을 두고 재계에서는 ‘재계의 풍운아’‘M&A의 귀 재’‘마이더스의 손’ 등 여러 별명이 따라 다닌다. 그의 가치는 한국경 제가 사상 최악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최근 우리의 우울한 현실을 배경 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지도 모른다.

거평의 성장사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93년까지만 해도 계열사 3개에 , 종업원이 80여명에 불과했던 거평은 불과 4년 만에 계열사 22개, 종업 원 5천여명의 식구를 거느린 재계순위 28위(자산 기준)의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 오는 11월27일 창립 18주년을 맞는 거평이지만 그룹체제를 정 식으로 갖추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해 전이다. 사업영역도 기계금속, 반 도체, 화학 등 제조업에서 금융, 건설, 유통 등 서비스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이 기간 중 거평이 M&A를 통해 인수한 기업만 15개. 그룹의 주력을 이루고 있는 대한중석, 제철화학, 시그네틱스, 새한종합금융 등이 모두 이때 인수됐다. 모기업을 중심으로 다른 기업을 인수해 몸집을 키우 거나 사업영역을 넓힌 다른 그룹들과는 달리 거평은 M&A 자체를 통해 성 장했다고 할 수 있다. M&A를 통해 기업성장에 필요한 시간을 최소화하는 나 회장의 이런 경영은 ‘시테크 경영’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 다.

거평이 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94년 텅스텐을 원료로 절삭 공구를 만드는 대한중석을 인수한 때부터이다. 재계에서는 “새우가 고래 를 삼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때 대한중석의 계열사였던 대한중석건설, 중석공영(현 거평주택개발)이 함께 따라왔다. 같은 해 부도가 난 라이프쇼핑(현 거평유통)과 한국양곡유통(현 거평양곡 유통)을 인수했다. 95년에는 반도체 조립검사업체인 시그네틱스 코리아를 인수한 데 이어 포철로부터 포스코 켐(현 거평제철화학)과 정우화학(현 거평화학)을 사들였다. 96년 이후에는 나 회장이 숙원사업으로 꼽아온 금 융업으로의 진출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거평파이넨스를 설립한 데 이어 강남상호신용금고(현 거평상호신용금고)를 인수했고 지난해 11월에는 새 한종합금융을 사들여 다시 한번 큰 화제가 됐다. 올 들어서도 지난 1월 태평양패션(현 거평패션)을 인수했다.


“부도리스트에 우리가 끼였다고?”

이들 기업의 인수비만 줄잡아 4천여억원. 총수의 무리한 사업확장 욕심 끝에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들이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를 깨며 줄줄 이 쓰러지고 있는 현실에서 거평의 장래에 대해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사 람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보그룹 부도 이후 증권가를 중심으로 부 도 후보업체 리스트가 돌 때마다 거평은 단골멤버였다. 거평그룹의 한 임 원은 “지금은 거평에 대한 루머가 사라졌지만 한때는 정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털어 놓는다.

거평은 이런 세간의 시선에 대해 “거평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 ”라고 잘라 말한다. 올 들어 부도를 내고 쓰러진 대기업들이 안고 있던 공통분모는 부진한 경영실적과 함께 외부차입에 의존한 빚 경영이다. 특 히 종합금융사 등 제2금융권의 단기차입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한보사태 이후 이들의 무차별적인 자금회수에 견디다 못해 대기업들이 두손을 들어 버리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M&A로 성장한 거평이 외부차입금, 그것도 단기차입에 크게 의존했을 것으 로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거평의 차입금 규모나 구조를 들 여다 보면 이런 일반의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다. 정태석 거평그룹 기획조 정실 사장은 “그룹 전체 금융차입금은 9천억원 내외로 자기자본 대비 부 채비율(금융계열사 제외)이 347% 수준”이라고 말한다. 이는 지난해 말 기준 30대그룹 평균 부채비율인 387%를 밑도는 것이다. 또 비금융계열사 로 포함돼 있지만 사실상 금융업을 하고 있는 새한렌탈과 거평프레야의 임차보증금 2천5백억원을 빼면 부채비율은 220%로 뚝 떨어진다는 설명이 다.

전체 외부차입금 가운데 단기차입금 비중도 25∼30%에 그친다. 최근 부도 를 낸 대기업들의 단기차입금 비중이 높게는 50%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인다. 거평도 올 들어 일부 종금사들로부터 대출상환 요구를 받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단위가 50억, 1백억원 정도로 작아 아예 은행 대출금 등 안정적인 자금으로 갚아 버렸다.


LBO 기법, 꼬리에 꼬리를 문 인수

(사진/거평의 성장사는 극적인 요소가 많다. 토이랜드 광주점을 둘러보는 나승렬 회장. 주택건설로 사업을 시작한 그는 부동산을 보는 안목이 특별한 것으로 정평이 있다. )

축지법을 쓰듯 기업인수를 통해 초고속으로 사세확장을 거듭한 거평의 재 무구조가 이처럼 양호하다는 것은 미스터리처럼 들린다. 거평은 그 열쇠 를 지난 80년대부터 미국에서 기업 M&A가 유행할 때 주목을 받았던 LBO(L everaged Buy-Out·자산 담보부 인수) 기법으로 제시한다. 거평의 LBO기 법은 잠재력 있는 기업을 사들여 보유부동산을 활용하거나 사업구조조정 으로 회사의 가치를 끌어올린 뒤 재평가된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해 다시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이다. “재무구조가 튼튼한 우량기업만 사들였습니다. 피인수 기업의 잠재능력에다 여유분을 재활용해서 새로운 기업을 인수했지요. 부실기업을 인수해 성장한 다른 그룹들과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나 회장의 설명이다.

LBO기법의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94년 인수한 대한중석이다. 산업은행이 관리 중이던 대한중석은 공기업 민영화의 일환으로 매물로 나왔으나 새 임자가 나서지 않아 입찰이 두번씩이나 유찰된 골치거리 기업이었다. 그 러나 나 회장은 대한중석의 자산이나 경영자료를 꼼꼼하게 분석해 본 결 과 명동의 알짜배기 땅, 1백여만주의 포철 주식, 5백만평의 상동광산, 15 만평의 대구 공장부지 등 보유자산이 엄청나고 경영내용이 괜찮은 데도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숨은 진주’임을 알아냈다. 나 회장은 즉각 고향선배로 대한중석 임원을 지낸 염동일씨를 고문으로 영입해 인수작업 을 진행시켰다. 막판에 대성연탄이라는 복병이 나타났지만 나 회장은 예 정가보다 1백억원 많은 6백61억원의 인수가격을 써내 낙찰을 받는 뚝심을 발휘했다. 거평은 대한중석에 대해 자산재평가를 실시해 1천5백억원 이상 의 차익을 적립하는 한편 보유자산을 담보로 은행대출금을 얻을 수 있었 다. 대한중석은 또 텅스텐 소재의 특수공구가 해외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 아 수출이 호조를 보이는 등 인수 첫해부터 경영이 정상궤도에 올랐다. 대한중석에서 마련된 자금은 바로 시그네틱스와 새한종금 등 뒤이어 사들 인 기업들의 인수 밑천이 됐다.

사실 대한중석을 사들인 돈도 91년에 인수한 대동화학(현 (주)거평)으로 부터 확보된 것이다. 당시 대동화학은 법정관리 상태로 부채가 많아 인수 할 가치가 없는 기업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나 부동산에 남다른 안목 을 지니고 있던 나 회장은 구의동 공장부지 등 보유 부동산의 가치를 보 고 32억원의 싼값으로 인수했다. 나 회장은 인수 직후 대동화학의 영위업 종을 고무신과 군화 등 신발에서 건자재 제조업과 무역업으로 전환해 경 영정상화를 이루었고 이를 토대로 92년에 바로 자산재평가를 실시해 재평 가 적립금으로 자본을 늘려 대한중석 인수자금으로 활용했다.


유사업종 통폐합, 힘을 집중하다

이처럼 거평의 M&A 과정에는 회사나 부동산을 보는 나 회장의 안목이 결 정적으로 작용했다. 나 회장에게는 어느 회사가 망할 회사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눈이 있다는 것이 그룹의 설명이다. 주택건설로 첫사업을 시작 한 나 회장은 오래전부터 부동산을 보는 안목이 특출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삼강산업 경리부장을 마지막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끝내고 지난 79 년 금성주택(현 거평건설)을 설립한 나 회장은 부동산 경기가 붐을 이루 던 지난 89년 남들이 거들떠 보지 않던 서울 서초동과 논현동 땅에 센추 리 오피스텔과 거평타운을 지은 뒤 분양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사업기반 을 마련했다. 100% 분양에 성공하면서 1천억원 이상의 이익을 올린 서울 동대문 거평프레야 도매센터 건립사업도 그의 선택이 적중한 사례다. 기 업을 보는 눈과 부동산을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나 회장은 이를 모두 겸비한 셈이다.

나 회장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운이 좋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의 사업 운은 지난 94년 포스코 켐과 정우석탄화학, 시그네틱스를 인수할 때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포철 계열사인 석탄화학업체 포스코 켐의 인수자로 는 사실상 애경유지가 내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애경유지와 포스코 켐의 생산품목이 겹치면서 공정거래법상 인수자격에 문제가 생겨 재경매가 이 루어지자 이 틈을 타 거평이 막판에 뛰어든 영풍을 따돌리고 개가를 올렸 다. 시그네틱스도 평소 교분이 두터운 인사로부터 인수제의가 들어와 검 토를 하던 중 다른 회사로 팔렸다는 소문에 포기했는데 1년 정도 지난 시 점에서 다시 제의가 와 우여곡절 끝에 인수에 성공했다.

대기업의 부도 도미노 현상이 극심한 상황에서 거평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은 M&A를 통한 기업인수와 동시에 구조조정을 진행시킨 것이라는 게 그룹의 설명이다. 정태석 기획조정실 사장은 “원래 내용이 건실한 회사를 인수했지만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구조 조정을 꾸준히 병행해 왔다”면서 부실이 표면화된 뒤 뒤늦게 구조조정에 착수하는 다른 기업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기업인수 과정에서 딸려온 불필요한 자회사나 사업부문을 떨어내고 유사업종을 하나로 통폐합해 온 것은 그 일례이다. 거평유통의 경우 여의도, 잠실 등 전국 7곳의 슈퍼마 켓을 기존의 직영점 형태에서 임대점으로 전환하는 대신 새로 시작한 창 고형 할인점에 힘을 모으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펴고 있다. 대한중석 인 수 때 딸려온 대한중석건설과 중석공영은 기존에 있던 거평건설과 하나로 합병할 계획이다. 부동산 임대 및 건물관리업체인 거평프레야도 어린이용 장난감 전문도매업체인 거평토이랜드와 합병을 추진 중이다. 또 지난해말 인수한 태평양패션(현 거평패션)은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스타킹 부문 의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이전시켜 주문자상표부착(OEM)방식으로 물건을 들여오고 있다. 거평은 이런 사업부문 정리와 통폐합이 완료되면 계열사 수가 현재의 22개에서 15∼16개 정도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기대 밖 매출·경영진 정예화 과제

연관사업을 확대해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는 것도 구조조정의 한 방법이 다. 거평은 지난 7월 법정관리 중인 공업용 다이몬드 생산업체 삼미화인 세라믹스를 자산인수 방식으로 1백5억원에 인수한 뒤 대한중석과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거평은 텅스텐 등 초경합금공구 외에 다이아몬드 코팅공 정도 취급하고 있는 대한중석이 삼미화인세라믹스와 합병할 경우 싼값의 합성다이아몬드 공급이 가능해지는 등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 회장은 평소 욕심은 금물이라고 강조한다. 무리한 기업인수나 전망이 불투명한 투자는 절대 안한다는 것이다. 자금운용 능력이 100이라 할 때 70만 쓰고 30은 비축해 두어야 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자금운용원 칙 70%론’이나, 한 봉우리에 오른 뒤 내가 어디에 서있나 여력이 얼마나 있나를 점검하고 다음에 오를 봉우리를 선택하는 ‘산봉우리 이론’ 같은 나 회장의 지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거평에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룹의 주축기업들이 나름대로는 안 정적인 기반을 유지하고 있지만 수익성 높은 사업은 많지 않아 지난해 1 조5천억원의 매출을 올렸음에도 이익이 2백억원이라는 소규모에 그쳤다. 올해도 경기부진과 맞물려 매출이 애초 목표인 2조3천억원에 훨씬 미달하 는 2조원에 그치고 이익도 2백억원대 이하로 줄어들 전망이다. 짧은 기간 안에 사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충원된 경영진의 정예화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0일 제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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